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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무척 사랑하는 주인장이 운영하는 독특한 헌책방. ⓒ 김종성
폭염주의보가 흔하게 들리는 요즘, 도심 곳곳에 있는 무더위 쉼터에 저절로 발길이 머문다.

딱히 살 것이 없어도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주는 마트나 편의점에 들르기도 한다. 도심 속 웬만한 무더위 쉼터보다 좋은 곳 가운데 하나가 책방이 아닐까 싶다. 책방에 가기 전 고를 책을 정하지 않고 가는 게 좋겠다. 책들이 촘촘하게 박혀있는 서고를 기웃거리며 여유 있게 이 책 저 책 읽다가 맘에 드는 책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에 한여름 더위도 잊히기 때문이다.

인천시 동구 금곡동에 있는 배다리 헌책방 거리도 무더위를 잠시 잊고 나만의 책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헌책방 거리가 있는 배다리 마을은 인천의 대표적인 구도심이다. 수도권 전철 1호선 동인천역과 도원역 사이 동구 금곡동과 창영동 일대를 말한다. 오래된 집들과 골목이 많아 손때가 묻은 내 카메라나 자전거처럼 친숙하고 편안한 곳이기도 하다.

정겨운 이름의 이 동네는 '작은 배들이 드나드는 다리가 있었다'고 하여 '배다리'라는 이름을 얻었단다. 그 이름에서 짐작되듯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지만, 1899년 우리나라 최초의 경인선(서울-인천) 철도가 생기면서 현재 모습으로 복개됐다. 배다리는 근대기 개항장인 제물포에 이주한 일본인, 중국인에게 밀려난 조선인들이 거주한 마을이자, 해방 이후 밀려든 서민들의 터전이기도 했다.

동네 가이드 역할을 하는 헌책방
과거 양키시장으로 불렸던 송현자유시장. ⓒ 김종성
동인천역에서 내려 4번 출구로 나오면 전통혼수거리라는 입구 간판이 서 있는 중앙시장이 나온다. 포목, 의류, 그릇 등으로 유명했던 중앙시장은 인천뿐 아니라 강화, 수원 등 수도권 지역 사람들이 몰려오는 시장이었단다.

중앙시장 옆에 있는 송현자유시장은 전쟁 직후 근처 미군부대 피엑스에서 흘러나온 수입품들과 구제 물자를 파는 곳이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양키시장이라고 불렀단다. 지금은 가게들이 조용히 웅크리듯 남아 있다.

중앙시장 옆엔 송현자유시장 외에 송현시장과 현대시장 등 4곳이나 모여 있다. 과거엔 모두 배다리 시장으로 불렸으며, 썰렁한 분위기의 지금과 달리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며 활기 넘쳤던 동네로 인천에서 제일 볼 만한 시장이었다고 한다.

'배다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바로 헌책방이다. 1960년대 형성된 배다리 헌책방 거리는 먹고 살기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주머니 걱정을 덜어준 곳이다. 서울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 버금가는 규모로 '작은 동대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단다. 당시 40여 개에 달했지만 동네 재래시장들의 운명처럼 아쉽게도 이제 여섯 곳밖에 남지 않았다.
배다리 마을 안내소를 겸하고 있는 책방. ⓒ 김종성
길고양이에서 책방 지킴이가 된 '나비날다'의 나비와 주인장. ⓒ 박민성
몇 안되는 헌책방이지만 맨 먼저 찾아가야 하는 곳이 있다. 고양이를 무척 사랑하는 주인장이 운영하는 '나비야 날다 책방'. 터줏대감 아벨서점과 함께 각자의 특성을 살려 '배다리, 우리가 지켜야 할 인천의 역사입니다'라는 문구 아래 배다리마을의 존재 가치를 알리고 있다.

헌책방 거리에서 가장 최근에(2009년) 생겨난 '나비야 날다' 책방은 북카페, 배다리 마을 안내소도 겸하는 재미있는 헌책방이다. 배다리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문화행사도 알려주고 따뜻한 차를 마시며 잠시 쉬어 갈 수 있다. 배다리 마을 지도와 함께 원하는 사람은 주인장을 따라 배다리 마을 탐방도 가능하다.

배다리 마을엔 재래시장, 헌책방 거리 외에도 배다리 전통공예상가, 배다리의 옛 정취가 느껴지는 벽화마을, 인천 최초의 공립학교 등 근대의 건축물들, 갤러리·사진관·공작소 등의 문화 공간, 그 맛이 궁금한 '개코 막걸리집' 등이 있다. 잠깐 인사를 나눴던 책방 주인장은 어딘가로 외출을 하고 동네에 살던 길고양이였다는 나비와 함께 책을 읽으며 잠시 가게를 지키기도 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주인장이 모은 고양이 관련 책들도 재밌었다.

매달 시 낭송회를 여는 책방
시 낭송회 등 다양한 문화활동을 펼치고 있는 아벨서점. ⓒ 김종성
오래된 헌책방의 필수 품목 사다리. ⓒ 김종성
듬직한 짐자전거가 지키고 서 있는 헌책방 '집현전'은 이 거리에서 가장 오래된 책방이다. 1953년 생겨났으니 무려 63년 된 노포(老鋪) 책방이다. 가게 안에 누가 주인인지 모를 할머니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삼성서림' 책방 주인장 아저씨는 무더위 속에 찾아온 손님이 반가웠는지 냉커피 한 잔을 권했다. 옛날식 이름이지만 '책과 글이 모여 이루어진 숲'이라는 뜻이 담긴 서림(書林)이란 말이 새롭게 느껴졌다.

어딜 가나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보다 바닥에서부터 사람 키보다 훨씬 높이 쌓여 있는 책들이 많다. 나무 사다리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을 만했다. 오래된 헌책방 특유의 묵은 종이 냄새가 풍겨왔다. 오랜만에 가서 그런지 각별하게 느껴졌다. 대형 서점, 인터넷 서점에 밀려 멀쩡한 동네 서점들이 사라지는 마당에 헌책방들이 아직도 남아다니...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헌책방이지만 헌책뿐만 아니라 주인장이 취향이 엿보이는 새책도 할인가로 팔고 있다. 아버지에게 책방을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다는 머리 희끗한 중년의 주인장 아저씨가 추천한 스티븐 킹의 중편 스릴러 소설 모음집 <별도 없는 한밤에>를 읽었다. 아저씨의 말대로 더위를 모르고 빠져들 만한 영화 같은 아니 영화보다 더 몰입이 잘되는 책이었다. 책 속 주인공의 독백에 누군가 밑줄을 쳐놓았다.

"남자는 누구나 자기 안에 있는 다른 남자와 함께 살아가기 마련이다. 자기가 모르는 낯선 남자, 즉 '음흉한 남자' 말이다." 볼펜을 꾹꾹 눌러 밑줄을 그은 걸 보니 무척 공감했나보다.
매달 시 낭송회를 여는 아벨 책방. ⓒ 김종성
'살아있는 글들이, 살아있는 가슴에...' 라는 작은 간판이 붙어있는 40년 넘은 전통의 '아벨서점(http://cafe.naver.com/abelbook)'은 좀 특별하다. 서점 옆에 따로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는데, 1층은 문화예술 관련 서적만 취급한다. 2층은 전시실과 강연장으로 만들어 정기적으로 시 낭송회를 열거나 크고 작은 문화 행사를 갖고 있다.

에어컨 시원한 아벨서점에서 책 구경을 하다가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고 박경리(1926~2008) 선생이 20대 시절 이 동네에서 헌책방을 운영한 사실을 알게 됐다. 2층 전시관 한편에 '박경리 서점'이라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박경리 선생이 배다리 마을에 살았던 시기에 발행된 책들과 자취 등을 함께 전시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아벨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장(곽현숙씨)이 박 작가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를 읽다가 약력에 인천시 동구 금곡동에서 2년간 살았다는 내용을 우연히 발견하면서 알려졌다.
20대 시절 배다리 마을에서 헌책방을 꾸렸던 故 박경리 선생. ⓒ 김종성
박 작가와 배다리의 인연은 19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주안염전에 취직한 남편을 따라 선생은 이 동네로 이주하게 된다. 책을 좋아하는 선생은 중앙시장 등에 있는 고물상에서 책을 하나하나 수거해 헌책방을 개점했다고 한다. 박 선생은 훗날, 이 동네에서 2년 가까이 생활한 것을 두고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단란한 가정을 꾸리면서 좋아하는 책도 실컷 읽고 책방을 하면서 동네 사람들과 친교했을 테니 가장 행복했다던 선생의 말은 과장이 아닐 듯싶다.    

박경리 선생처럼 가난했지만 지난 시절이 행복했다고 느껴진다면 배다리 헌책방 거리에서 가까운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인천시 동구 송현동)도 들르면 좋겠다. 재개발로 사라진 동네의 1960년~1970년대 모습을 엿보고 체험할 수 있는 박물관이다(입장료 1000원). 배다리 마을엔 다락방이 있는 '달이네 게스트하우스'도 있다. 하루쯤 여유롭게 머무르며 마을 여행을 하면 더욱 좋겠다.

덧붙이는 글 | ㅇ 교통편 : 수도권 전철 1호선 동인천역 하차, 2번 출구 도보 5분
ㅇ 배다리 마을 안내 누리집 : www.baedari.com

태그:#인천배다리마을, #배다리헌책방거리, #아벨서점, #나비날다책방, #삼성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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