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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2시만 되면 황금마차가 호박으로 변하고 마부들은 생쥐로 변해 버리는 마법에 걸린 파란 드레스의 금발 아가씨가 있는가 하면, 성당의 종소리가 자정을 알릴 적마다 앤틱 푸조를 타고 1920년대 파리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몽상가 남자가 있다. 남자는 매일 밤 성당 앞 오래된 계단에 앉아 자신을 문학과 예술의 황금기로 실어다 줄 친구들을 기다린다. 파리 여행 전 필독서처럼 되어 버린 우디 알렌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이야기다.

주인공 길 팬더는 헐리우드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지만 순수문학 작가로 살고 싶어한다. 1920년대 파리의 비에 젖은 밤거리를 그리워하며, 다락방 한 칸을 얻어 소설을 쓰고 싶은 꿈을 품고 있다. 그의 약혼녀 이네즈는 남자를 이해 못한다. 캘리포니아의 말리부에 신혼집을 차리고 파리에서 사 모은 고가구로 집안을 장식하고 싶을 뿐이다. 툭하면 비가 쏟아지는 파리의 날씨는 불편하기만 하다. 안 팔릴 것이 뻔한 소설이나 쓰고 싶어하는 약혼자 길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때마침 파리를 방문 중인 친구 캐롤과 그의 애인 폴을 우연히 만나 두 커플은 파리 여행을 함께하지만 매번 삐걱대기 일쑤다. 그날 밤도 이네즈는 친구들과 춤을 추러 가고 혼자 남은 길은 파리의 밤거리를 배회한다. 길을 잃고 오래된 성당 앞 계단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린다. 그리고는 어디선가 갑자기 등장한 클래식 푸조. 차에 타고 있던 시끌법석한 젊은 친구들에게 홀린 듯 몸을 싣고 길은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생떼뛰엔뒤몽 성당. <미드나잇 인 파리>이 주인공 길은 이 성당 앞 계단에 앉아 있다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 김윤주
1920년대 파리 한복판에 던져진 길은 평소 숭배해 마지않던 헤밍웨이와 소설을 논하고, 스콧 피츠제럴드와 거투르드 스타인, 피카소와 달리, 만 등을 만나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신비로운 여인 애드리아나를 만나 설렘을 느끼며 밤거리를 함께 걷기도 한다. 하지만, 길이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1920년대 파리에 살고 있는 애드리아나는 정작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아닌, 벨 에포크 시대를 그리워한다. '가장 아름다웠던 시대'라 칭해지는 그 시절. 

어느 날 밤, 여느 때와 같이 애틋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둘 앞에 갑자기 웬 마차가 나타난다. 마차는 벨 에포크 시대의 상징 막심 레스토랑으로 둘을 데려다 준다. 그곳에서 놀랍게도 로트레크와 드가와 고갱을 만나지만, '아름다운 시대'를 살고 있는 그들은 정작 이 시대가 엉망이라고 분노하며 지난날을 그리워한다.

사람은 이렇게 끝도 없이 지나간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어 있는가 보다. 2010년대를 살고 있는 길은 1920년대 파리를 그리워하고, 1920년대 파리의 애드리아나는 1890년대 벨 에포크 시대를 그리워하고, 벨 에포크 시대의 화가들은 르네상스 시대를 그리워하고...

결국 애드리아나는 그녀가 그리도 그리워하던 벨 에포크 시대에 남기로 결정하고 길은 꿈에서 깨어나듯 현실로 돌아온다. 쓸쓸히 센 강 위의 다리를 거닐던 길은 전에 만난 적이 있는, 앤티크 숍에서 오래된 물건들을 팔던 여인과 조우한다. 센 강 위 다리를 비를 맞으며 건너는 길과 여인의 뒷모습을 끝으로 영화는 막이 내린다. 1920년대 음악을 좋아하고, 비 내리는 파리의 밤거리를 천천히 걷기를 즐기는, 서로 닮은 이 여자와 이 남자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것이다. 사랑을 시작하기 딱 좋은 도시, 파리에서.  
생쉴피스 성당 앞 광장의 연인 ⓒ 김윤주
그날 밤은 나도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 길처럼 파리의 밤거리를 헤매 다녔다. 구름이 잔뜩 낀 회색빛 하늘은 두터운 담요처럼 도시를 덮고 있고, 비에 젖은 거리엔 가로등 불빛이 내려앉는다. 젖은 불빛을 머금어 따뜻한 노란 빛이 돌게 된 베이지색 건물들은 6층, 7층 정도의 높이로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좁고 긴 골목길들이 이리저리 이어지는 풍경이 고즈넉하고 운치 있다.

카페 레되마고와 카페 드 플로르가 있는 생제르맹데프레 역에서 출발해 골목길을 조금 걷다 보니 <다빈치 코드>의 무대였던 생 쉴피스 성당이 보인다. 음산한 분위기며 검게 그을린 듯한 건물 벽이며 성당의 거대한 몸체가 영화 속 분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성당 앞 광장에는 분수대가 있고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커다란 나무들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가로등 아래엔 패션 화보에서 막 나온 것 같이 스타일 좋은 젊은 남녀가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다. 저절로 눈길이 가는 이 아름다운 커플은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설레는 연인인 것도 같고, 지친 만남을 정리하려는 오래된 연인인 것도 같다. 한참을 훔쳐보았다. 무슨 사연일까. 헤어지는 밤이 오늘이지는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걷는다.  
파리의 밤거리, 뤽상부르 공원 근처 ⓒ 김윤주
뤽상부르 공원길로 접어들었다. 헤밍웨이가 구스타프 스타인 여사 집에서 문학 이야기를 나누다 공원 문이 닫을 정도로 시간이 늦어지면 공원 밖 이 길로 에둘러 돌아 집으로 향하곤 했다던 바로 그 길이다. 공원을 가로질러 가면 훨씬 가까울 것을 쓸데없는 토론이 길어져 돌아가게 되었다며 투덜대던 장면이 떠오른다. 늦은 시간인데도 뤽상부르 미술관은 아직 열려 있고 이 시간에 입장을 하는 관람객도 눈에 띈다.

뤽상부르 궁전을 끼고 도니 작고 예쁜 카페들이 하나둘 나온다. 깜찍한 소품을 파는 가게와 앤티크 숍들도 보인다. 문 닫은 가게의 쇼윈도우 너머로 "Do one thing everyday that makes you happy"라고 쓰여 있는 장식품에 잠시 시선이 멈춘다. 맞아. 매일매일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 하나씩은 하고 살아야 하는데. 오늘이 가기 전 딱 한줌만큼씩만 행복을 건져 올려도 살만한 인생일 텐데.

하나둘 짝지어 담소를 나누며 걷는 아줌마, 운동복 차림에 조깅하는 아저씨, 카페에 마주 앉아 소곤거리는 남녀, 잠시도 쉬지 않고 입을 맞춰대는 연인들. 파리의 골목길에서 스쳐지나간 이 사람들, 오늘 밤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 하나씩은 건져낸 것일까.  
파리의 소품 가게 진열장. ⓒ 김윤주
골목골목을 돌아 쥬느비에브 언덕 위 팡테옹까지 걸었다. 팡테옹 옆 성당에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생떼띠엔뒤몽 성당이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주인공이 앤틱 푸조를 만나던 바로 그곳이다. 이곳에 앉아 있으면 자정 무렵 혹시 나도 마법 같은 행운을 만나게 되는 건 아닐까? 계단에 앉아 기다려 보았지만 시간이 충분히 늦지 않은 탓인지 간절함이 덜했던 탓인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백 년 전 스물대여섯의 헤밍웨이가 이 골목들을 나처럼 이렇게 헤매 다녔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가슴 뛰는 일이다. 아마도 영화를 만든 감독 우디 알렌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길 팬더를 그렇게 젊은 시절 헤밍웨이가 즐겨 찾던 카페로 데려갔겠지. 헤밍웨이가 살았던 집, 카디날 르므완 거리 74번지도 가보고 싶고, 무프타르 거리와 시장도 구경하고 싶은데 비가 온다. 아쉽지만 시간도 너무 늦었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호텔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영화 속 애드리아나와 길이 애틋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하염없이 1920년대 파리의 밤거리를 거닐 때 잔잔히 흐르던 그 음악이 귓가에 맴돈다. 다나 불르(Dana Boule)의 '내게 사랑을 말해 줘요(Parlez-mois d'Amour)'. 여행에서 돌아온 후 한참이 지난 어느 날 밥을 짓다가 문득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 음악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파리가 그리워서인지 파리를 거닐던 그 시절의 내가 그리워서인지 아무래도 그걸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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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통해 시대를 넘나드는 기호와 이야기 찾아내기를 즐기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인문학자입니다. 이중언어와 외국어습득, 다문화교육과 국내외 한국어교육의 문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대학교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