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여성이 함께... 서로의 이정표가 됐다
'바이킹' 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뿔 달린 모자와 방패, 무시무시한 전투력, 바다를 점령한 배, 그리고 남성.
8세기 말부터 11세기 말까지 바다를 휘저은 바이킹, 강인한 남성의 대명사로 느껴질 겁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이혼을 원하는 아내의 요구를 들어줘야 했던 남편의 모습도 있습니다.
남녀 누구든지 원하면 이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세 곳의 장소(증인 앞, 집 문지방, 침실)에서 '이혼합니다'라고 말하면 이혼이 성사됐다고 하네요.
게다가 당시 바이킹 여성들은 이혼 후 부부의 재산을 나눠 가졌습니다. 또한 재산을 상속받을 수도 있었죠.
바이킹은 여성과 남성이 공존하는 세계였던 거죠.
아이슬란드도 바이킹의 나라였죠.
아이슬란드 여성들은 항해를 떠난 바이킹 남편을 대신해 가계 경제를 책임졌다고 합니다.
이런 역사가 오늘날 아이슬란드 성평등의 기반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오래 전, 그러니까 바이킹의 나라 아이슬란드에서는 여성이 상당한 경제권을 가졌고, 이것이 오늘날 성평등의 나라 아이슬란드의 원천 아니냐는 설명이죠.
여자 바이킹의 전설
"길 잃은 어머니, 고아, 과부는 분노했지.
내가 찾은 대담한 계획, 아이슬란드로 향했고,
나는 친족, 노예, 자유인과 함께 여행을 지도했어.
(중략) 죽음에 맞서 삶에서 내가 이겼어."
(영국 싱어송 라이터 클레어 화이트의 '생각이 깊은 오드의 노래, Song of Aud the deep-minded' 중 일부)
아이슬란드 바이킹 중에는 여성도 있습니다. 아이슬란드 구전 역사를 기록하는 '사가(Saga)' 중에 락스델라 사가(Laxdela Saga)가 있습니다. 이 사가는 일명, 생각이 깊은 오드(Aud the Deep-Minded) 혹은 운(Unn)이라 불렸던 아우두르 딥 마인드 케틸스도티르(Auður djupuðga Ketilsdottir)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락스델라 사가에 따르면, 그녀는 용감함·대담함·모험정신을 상징합니다.
Unn(834년 출생 ~ 920년 사망 추정)의 아버지 역시 바이킹이었습니다. 그녀는 아일랜드 출신 지도자와 결혼했지만 비극적으로 남편이 일찍 사망합니다. 그 후 바이킹 족장이었던 아들마저 측근의 배신으로 잃습니다. 그 즈음 아버지마저 죽습니다. 남편과 아들, 아버지를 모두 잃은 그녀에게는 안전한 땅이 없었습니다. 잇따른 비극이 몰아쳤지만, 그녀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삶을 개척했죠.
Unn은 배를 만들 것을 명령했고, 가족·친지·노예와 함께 아이슬란드로 탐험을 시작했습니다. 895년 겨울, 그녀는 아이슬란드에 상륙했습니다. Unn은 일단 자신을 따라온 이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었습니다. 포로들에게도 자유와 땅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존경받고 자비로운 지도자로서, 행동가로서 명성을 굳혔죠. 척박한 '얼음의 땅' 아이슬란드에서 Unn은 일족을 지키며 살아냈습니다. 그녀는 죽어서도 바이킹으로 기억됐습니다. 높은 지위의 다른 바이킹들처럼, 그녀는 바이킹 왕국 '발할라'로 안전하게 항해하라는 의미로 만들어진 '배무덤'에 묻혔습니다.
여기까지가 락스델라 사가에 적힌 Unn의 이야기입니다. Unn은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 싸웠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쟁취했습니다. 클레어 화이트 노래 가사처럼, 죽음에 맞서 싸웠고, 자신의 삶에서 이긴 여성인 것이죠.
살아있는 롤모델
우리는 궁금했습니다. WEF 성격차지수 1위 국가에서 Unn은 어떤 의미일까.
아이슬란드 역사학자를 만나 물어봤습니다. 락그헤이두르 크리스탸운스도띠르(Ragnheiður Kristjansdottir),
아이슬란드 대학 교수인 그는 마침 2020년 <선거하는 여자들>(Konur sem kjosa : Aldarsaga)이란 책을 내놨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에 대해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결정해왔고 그에 따라 여성 권리가 상승했다"면서 "그래서 여성들의 삶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가 담겨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아주 오래 전 바이킹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Unn, 그에 대해 락그헤이두르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사적 자료를 보면 강한 여성이었던 건 틀림없습니다. 과거 여성들에게는 일종의 롤모델일 수 있었을 것 같아요. 현재도 아이슬란드에서 잘 알려져 있는 영웅인 것도 맞고요. 그래도 우리에게는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 (vigdis Finnbogadottir, 민주적으로 선출된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1980년 8월부터 1996년 8월까지 재임)가 더 와 닿습니다. 우리의 첫 여성 대통령이고, 지금 많은 여성들의 롤모델이기도 하죠."
그랬습니다. 굳이 9세기까지 가지 않아도 됐습니다. 아이슬란드에는 현존하는 여성 영웅들이, 그 서사가 너무 많았습니다.
비그디스 전 대통령은 16년 동안 재임했고, 91세인 지금 '살아있는 전설'입니다. 그녀는 재임하는 동안 "남자가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여성도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설파했습니다. 아이슬란드 사상 첫 동성애자 여성 총리였던 요한나 시귀르다르도티르(Johanna Sigurdardottir, 2009년 2월부터 2013년 5월까지 재임)도 빼놓을 수 없죠. 그때 연립정부에서 여성 장관 숫자가 크게 증가했고 남녀 내각 비율이 동일해졌습니다. 요한나 전 총리는 성매매 금지, 스트립 클럽 전면 금지, 이사회 내 40% 여성 의무화 등을 거침없이 추진했습니다. 여성의 권리를 위해 혹은 '여성은 할 수 없어'와 싸워낸 결과입니다.
여성과 여성이 함께 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슬란드에는 1975년 10월 24일 '데이 오프(Women's day off, 모든 여성들의 월차 투쟁)'에 참여했던 여성들이 존재합니다. 당시 아이슬란드 여성의 90%가 함께 했다고 하니, 지금 20~30대 여성들의 엄마가 역사적인 싸움의 당사자였던 셈이죠. 그래서 우리가 만난 여성들 중에서는 자신의 롤모델로 '엄마'를 꼽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의 페미니즘은 어머니로부터 시작됐습니다. 내 엄마는 싱글맘으로 나와 내 여동생을 키웠고 강인한 여성이기 때문이죠."
(틴나 에이크 라켈다르도띠르 Tinna Eik Rakelardottir, 페미니스트 워킹 투어 운영자)
"1975년 '데이 오프'에 참여한, 나를 페미니스트로 키운 나의 어머니도 당연히 롤모델입니다."
(토르힐두르 순나 아이바르도띠르 Þorhildur Sunna Ævarsdottir, 아이슬란드 해적당 의원)
아이슬란드 여성들에게는 '특별한 피'가 흐르는 걸까요?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스우파(스트릿 우먼 파이터, 최근 주목받고 있는 경연 프로그램 이름)'인 걸까요? 그래서 세계에서 성별 격차가 가장 적은 나라(2009년~2021년, 세계경제포럼) 혹은, 세계에서 여성들이 가장 살기 좋은 나라(2016년, 이코노미스트)가 된 걸까요? 그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스우파’ 언니들, 아이슬란드를 구하다 20대 한국 여성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미래를 준비하는데 있어 어떤 허들이 있습니까?' 164명이 357개의 허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목소리를 품고, 오마이뉴스 X 시사인 X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는 '여성들이 가장 살기 좋은 나라'라는 아이슬란드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아이슬란드 사람 33명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우리가 다다른 결론은 하나입니다. '여성이 멈추면 세상이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