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6월부터 2011년 <오마이뉴스> 지역투어 '시민기자 1박2일'이 시작됐습니다. 이번 투어에서는 기존 '찾아가는 편집국' '기사 합평회' 등에 더해 '시민-상근 공동 지역뉴스 파노라마' 기획도 펼쳐집니다. 이 기획을 통해 지역 문화와 맛집, 그리고 '핫 이슈'까지 시민기자와 상근기자가 지역의 희로애락을 자세히 보여드립니다. 어느덧 여섯 번째, 이번엔 부산경남입니다. [편집자말]
노무현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
ⓒ 청와대

관련사진보기


"노무현 복수만 확실하게 해 준다면, 그게 누구든 솔직히 난 그 사람을 찍고 싶은 심정입니다."

학계에서 이름이 높은 어느 명문대학의 교수가 사석에서 다음 대선이 화제에 오르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정관계와는 아무런 연고도 없고 평소 학교에서 묵묵히 연구에만 전념하던 분이라 적어도 사심에서 나온 말은 아닌 듯싶다.

내 주변에는 MB 정권 하에서 부정비리혐의로 조사를 받은 정연주 전 KBS 사장, 한명숙 전 총리,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 등 딱 그 만큼만이라도 차기 정권에서 MB정권의 부정비리를 파헤쳐줬으면 하는 동료 과학자들이 적지 않다. 정량적인 분석과 보편적인 자연법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최소한의 정량적인 공정함과 법집행의 보편성에 상대적으로 민감하기 때문이다.

총선과 대선은 원래 당대 정권에 대한 심판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 심판이 유권자들의 '복수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심판의 강도는 더욱 강해질 것이 분명하다.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이른바 'MB 심판론'이 여느 선거 때의 정권 심판론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총선에서 여권이 크게 참패한다면 상대적으로 대선에서는 심판과 복수의 의미가 퇴색될 가능성도 있다. 그 결과 여권 표는 대선에서 결집하고 야권 표는 상대적으로 이완될 여지가 많아진다. 따라서 심판과 복수는 내년 정국에서 양날의 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노무현, 그는 판타지를 실현한 정치인이었다

집권 때 큰 인정을 못 받았을 뿐더러 생애조차 비극적으로 마감한 노무현이었지만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는 사람이 사후에 오히려 훨씬 많아졌으니 그는 무덤에서나마 가장 행복한 정치인이 아닐까 싶다. 지금 주위를 둘러보면 여야와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노무현만한 정치인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노무현은 말하자면 동화 속의 영웅 같은, 동화적인 판타지를 현실에서 실현한 정치인이었다. 청문회에서 고개 뻣뻣한 독재자를 향해 명패를 집어던지고 지역주의를 깨겠다며 바보같이 계속 낙마하는 모습을 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저런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하는 생각을 해 봤을 것이다. 비겁한 삶을 가르쳐야 했던 600년의 역사를 바꾸자고 했을 때는 나처럼 그에게 표를 주지 않았던 사람조차도 마치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동화를 동경하는 이유는 그것이 도저히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들이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정치인생은 동화 속의 이야기를 현실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그의 비극적인 죽음은 새로운 신화를 만들었다. 차기 대선에서도 여전히 노무현의 그림자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신화가 된 동화'가 역설적이게도 MB 치하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으레 자기 감성이 투여된 슬픈 동화와 신화적 스토리를 소중하게 여긴다. 노무현 지지층의 결집력과 충성도가 높은 것은 이 때문이다.

범야권에서는 노무현의 동화 같은 스토리가 다음 대선에서도 재현되기를 암암리에 기대하는 듯하다. 그러나 사분오열되고 지리멸렬한 야권이 박근혜라는 강력한 대세론에 맞서 문재인이든 안철수든 2002년의 노무현 역할을 해 줄 누군가를 찾아 추대하면 대역전 드라마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는 망상에 가깝다(예컨대 안철수의 지지율이 내년 12월 투표일까지 지속될 것인지는 굉장히 불투명하다). 현실정치에서 노무현 같은 인물은 지극히 드물다. 게다가 '2002년 노무현 모델'은 이미 낡은 것이 되었다.

우리는 2002년 대선 뿐만 아니라 그 뒤의 노무현 정권 5년을 지켜보면서 새로운 세력과 치밀한 개혁 프로그램이 물리적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후보 한 사람만으로는 명백한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10년이 지나서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설령 그 어떤 '슈퍼울트라' 후보가 나와서 당선된다 하더라도 노무현이 부딪혔던 것보다 훨씬 더 큰 한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다행히 선거는 이길지 모르나, 역사를 바꾸지는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물과 함께(선거에서 후보의 중요성은 나도 인정한다) 세력과 시스템의 문제도 대단히 심각한 수준에서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세력과 어떤 시스템과 어떤 개혁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할까?

'완전한 문명사회' 되지 못한 '야만'의 대한민국

이명박 대통령. 사진은 지난 8월 1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66주년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한 이 대통령이 경축사를 하는 장면.
 이명박 대통령. 사진은 지난 8월 1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66주년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한 이 대통령이 경축사를 하는 장면.
ⓒ 청와대

관련사진보기


심판과 복수는 정서적 밑거름이 될 수는 있으나 그 자체로 가치지향점이 될 수는 없다. 미래의 청사진이 없는 과거청산은 허무할 뿐이다. 최근 전 사회적으로 떠오른 이슈인 복지문제도 한계가 명백하다. 작년 지자체 선거에서 가장 훌륭한 복지정책을 들고 나왔던 심상정 후보가 'MB 심판' 때문에 후보를 사퇴했던 점은 시사하는 바가 무척 크다. 단순한 복지담론만으로는 유권자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국민들의 삶은 그 자체로 총체적이다. 말과 글로 정연하게 표현할 수도 없고 때론 명확하게 자각하지 못하더라도 정세는 총체적으로 국민들의 삶에 그대로 녹아 있다. 일례로 그 많은 복지공약들조차도 MB 치하에서는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사람에게는 백 가지 복지공약보다 확실한 반MB 한마디가 더욱 위력적일 것이다. 대선은 권력을 누구에게 넘길 것인가를 노골적으로 묻는 선거이다. 그 자체가 고도의 권력투쟁의 현장이고 민주주의의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전장이다.

지난 10·26 재보선과 이른바 안철수 현상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나는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다"라는 말은 보수·진보가 대단히 왜곡된 대립구도이며 이것이 한국사회의 문제를 정확하게 집어내지 못하고 있음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간단히 돌아보더라도 강대국에 대한 사대를 앞세우는 보수는 형용모순이고 권력과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보다 복지만 앞세우는 진보는 개량주의에 불과하다. 한국사회의 비극은 이들이 보수와 진보의 대부분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세는 총체적이고 개개인의 구체적인 삶에 특수한 형태로 굴절되어 반영된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미국 중심의 금융경제는 종말을 고했고 유럽발 경제위기도 해결책이 여전히 혼미하다. 재스민 혁명을 겪은 중동은 여태 경험하지 못한 전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있고 이 와중에도 중국은 우주 정거장을 쏘아 올렸다. 일본은 미국이 주도하는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참여를 선언했고 북한은 3대 세습을 마무리 지으려고 안간힘이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우리는 그 속에서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오세훈 전 서울시장. 사진은 지난 8월 21일 오 전 시장이 무상급식투표에 시장직을 걸겠다고 발표한 뒤 무릎을 꿇는 모습.
 오세훈 전 서울시장. 사진은 지난 8월 21일 오 전 시장이 무상급식투표에 시장직을 걸겠다고 발표한 뒤 무릎을 꿇는 모습.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이 모든 것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능력을 나는 '문명화'라고 생각한다. 문명의 사전적인 의미는 보다 나은 삶의 양태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과 그 주변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자각과 이해가 필수적이다. 이런 기준에서 보자면 한국사회는 아직 완전한 문명사회가 아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여전히 야만적인 사회란 말인가?"라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지난 4년 간의 MB 정권을 돌아보라고 말하고 싶다. 반대파를 없애고 자기 사람을 심기 위해 법과 원칙은 간단히 무시되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은 무시로 잡아갔고 권력은 그저 자기 잇속을 챙기는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어린이들이 마음 놓고 밥 먹기 위해서는 '그러다가 나라가 망한다'는 험한 소리와 주민투표까지도 감수해야만 했었다. 없는 사람들은 더 험한 경쟁에 내몰리며 인간 취급도 못 받고 급기야는 자살로 내몰렸다. 용산참사와 쌍용차 문제만 떠올려 보라. 문명사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다. 아차, 자기 집값 오를 욕심에 '도덕성보다 능력'을 선택한 우리의 야만성도 빼놓을 수 없다.

문명화는 지독한 사대주의를 타파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역사상 그 어느 나라가 자기 군사권을 돈이 덜 든다는 이유로 남에게 넘겨준 적이 있는가. 대통령은 "뼛속까지 친일·친미"인데다 자기 연설문마저 외국회사에 맡겨버리고, 고위 관료들은 한국보다 미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 행태를 바로잡지 않고서 우리가 문명국가임을 자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한민국,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을 거세당하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한 미국장교는 일제 식민지가 한국에 남긴 가장 큰 폐해는 한국 장교들이 스스로 전쟁을 치를 사고능력을 거세당한 것이라고 한 적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해방은 했으나 독립하지 못했다"는 김용옥의 일갈은 매우 적확한 지적이다. 자신과 세상을 스스로 바라보고 판단하고 이해할 능력이 제거된 식민지배의 폐해는 군사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과학자인 나로서는 현대 '과학문명'의 시대에 자립적인 기초과학역량이 부재한 것도 가장 큰 야만의 징표로 여긴다. 예컨대 이웃나라에 전대미문의 원전사고가 있었는데도 방사성 물질이 어떻게 퍼져나가는지를 우리는 남의 나라 기상청을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

흔히 기초과학은 먼 훗날의 막연한 이익실현을 위한 방편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강한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과학문명의 시대에는 과학자체가 즉각적인 생존의 문제이다. 쓰나미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를 잘 이해하고 대처하는 능력은 수많은 생명과 재산을 구할 수 있다. 이처럼 '과학문명'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가 있어야만 군사력과 국방을 뛰어넘는 총체적인 국가안보에 대한 개념을 가질 수 있다.

한편 우리는 기초과학이란 어떤 편리한 물건의 핵심기술의 개발과 연결해서 생각한다. 그래서 정부가 정의하는 기초과학은 언제나 로열티를 받을 수 있는 원천기술과 거의 동의어이다. 그러나 기초과학은 원천기술을 만드는 것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편리한 기술'을 넘어, 편리함 그 자체가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탐색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아이폰이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편리함을 극대화한 때문이라기보다 '새로운 편리함'을 발굴해 낸 것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인간이 편리함을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외부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이는가 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탐구했기 때문에 아이폰이라는 걸작이 나올 수 있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기술과 교양(liberal arts)의 결합이 필요했다.

이것이 문명화된 사고방식이다. 남들이 정의해 놓은 '편리함'의 테두리 속에서 아무리 기술개발에 매진해 봐야 짝퉁밖에 만들지 못한다. 한국에서 절대로 아이폰이 나올 수 없는 이유는 여전히 우리가 기초과학에 대해 야만적인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야만에서 깨어난 시민들의 문명화를 조직하는 힘

지난 2008년 광우병위험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및 재협상 촉구 촛불문화제 현장.
 지난 2008년 광우병위험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및 재협상 촉구 촛불문화제 현장.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오랜 세월동안 한국 정부의 국정지표는 '선진국' 진입이었다. 전두환도 선진조국 창조를 내세웠고 형식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진 뒤 특히 OECD 가입 뒤에는 본격적으로 선진국에 들어가는 것이 지상과제로 유포되었다. 하지만 선진국이란 무엇인가? 소득 3만 달러? 세계 7대 강국? 몇 개의 거시경제 지표를 달성하는 그런 선진국이 과연 우리가 그렇게 모든 것을 걸고 매진해야 할 가치가 있는 목표일까?

나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 지향점이 경제지표상의 허구적인 선진국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인간답게 보다 나은 수준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문명국가의 건설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도 아직도 사회 곳곳에 남아 있는 야만과의 단절, 야만을 강요하는 악습의 청산을 피할 길이 없다.

문명화의 출발은 우리와 우리 주변에 대한 자각, 그것도 집단적인 자각에서부터 시작된다. 게다가 한두 명의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 할지라도 그 모든 영역을 커버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므로 문명화는 필연적으로 시스템을 통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개개인의 역량에 크게 휘둘리지 않고 전체적인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면서 그 속의 개개인이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구조라야 그 문명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나는 그래서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노무현의 유언을 "야만에서 깨어난 시민들의 문명화를 조직하는 힘"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이다.

벌써부터 세간에는 안철수냐 박근혜냐, 혹은 문재인이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유력 후보들의 지지율은 마치 올림픽 메달 레이스마냥 시시각각으로 촌각을 다투어 보도된다. 하지만 지난 역사에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교훈을 얻었다면, 누군가는 시스템을 생각해야 하고 또 그것을 운용할 사람과 세력을 함께 고민해야만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문명국가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요건에 대해 이미 국민적인 합의가 존재한다면,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지는 조금 더 여유롭게 따져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야만이 득세하고 횡행하는 지금 우리의 수준은 여기에 한참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내년 대선에서 노무현의 신화가 된 동화를 꿈꾸는 자가 있다면, 2002년의 대선결과만 빼고서 아마도 모든 것을 다 바꿔야만 할 것이다.

'어게인 2002', 하지만 전혀 새로운 2012. 이제 꼭 13개월 남았다.

덧붙이는 글 | 이종필 기자의 트위터는 @ststnight입니다.



태그:#노무현, #2012, #대선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8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In Tenebris Lux 어둠 속에 빛이

이 기자의 최신기사윤석열 최악의 시나리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