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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왼쪽부터 홍난파(작곡가), 안익태(작곡가), 장면(전 국무총리), 정일권(전 국무총리)
 왼쪽부터 홍난파(작곡가), 안익태(작곡가), 장면(전 국무총리), 정일권(전 국무총리)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친일파로 기록된 홍난파·안익태·장면·정일권 등이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친일진상규명위)에서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분류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대통령직속 위원회가 '친일파 청산'에 미온적인 정부의 눈치를 살피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등 뜨거운 논쟁이 일 것으로 보인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일인명사전>에는 이름이 올랐지만, 친일진상규명위에서는 친일파로 평가되지 않았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어 복수의 친일진상규명위 고위 관계자들을 통해 12일 확인한 결과, 박 전 대통령 이외에도 다수의 역사적 인물들에 대해 민간연구소와 국가 기관이 다른 평가를 내린 것으로 나타났다.

<친일인명사전> 오른 홍난파·안익태·최승희 등 친일규명위에선 빠져

김기창(화가), 김동인(소설가), 김동환(시인), 김성수(동아일보 창업주), 김활란(전 이화여대 총장), 노기남(전 천주교 대주교), 모윤숙(시인), 방응모(전 조선일보 사장), 백낙준(전 연세대 총장), 백선엽(군인), 서정주(시인), 신상묵(신기남 전 의원 부친), 안익태(작곡가), 유진오(전 고려대 총장), 유치진(극작가) 이병도(역사학자), 이원수(아동문학가), 장면(전 국무총리), 장우성(동양화가. 전 서울대 미대 교수) 정일권(전 국무총리·국회의장), 최승희(무용가), 현상윤(고려대 초대 총장), 현제명(작곡가), 홍난파(작곡가) 등 총 24명.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주요 유명 인사들이다. 이 가운데 김기창, 김동인, 김동환, 김성수, 김활란, 노기남, 모윤숙, 방응모, 백낙준, 백선엽, 서정주, 유진오, 유치진, 현제명 등 14명은 친일진상규명위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도 오른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신상묵, 안익태, 이병도, 이원수, 장면, 장우성, 정일권, 홍난파 등 총 8명은 애초부터 친일진상규명위의 조사대상자에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또 최승희, 현상윤 두 명은 조사는 진행했으나 친일 행위자로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위의 유명 인사 총 24명 중 약 절반에 가까운 10명에 대해 국가 기관과 민간연구소가 다른 평가를 내린 셈이다. 

친일진상규명위의 명단에서 빠진 안익태, 장면, 정일권, 최승희, 현상윤, 홍난파 등에 대한 <친일인명사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일제 시절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사들의 행적을 담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8일 오후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서 열렸다. 시민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만주군 혈서지원'을 증명하는 일본어신문인 <만주신문(滿洲新聞)> 기사가 실린 '친일인명사전'의 한 부분을 읽고 있다.
 일제 시절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사들의 행적을 담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지난 8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서 열렸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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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
1942년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경축하는 '만주국 춘전곡'을 의뢰받아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큰 관현악과 혼성합창을 위한 교향적 환상곡 '만주'"를 완성.

장면
1940년 7월 동대문경찰서에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서 국방 헌금을 냄. 1941년 8월 7일 종교계의 총동원을 논의하는 종교계 시국간담회에 노기남과 함께 천주교 대표로 참석. 1943년 6월 16일 동성상업학교 교유와 생도들로부터 모금한 항공기 구입비 130여 원을 동대문경찰서에 냈다. 1944년 9월 국민동원총진회 중앙위원을 맡았다.

정일권
1935년 5월 광명중학교의 영어교사 장내원의 권유와 교련 교관의 추천을 받아 만주국 초급장교 양성기관은 중앙육군훈련처에서 기초 군사훈련을 받은 후 정식과정 이수. 1941년 신징(新京)에 있는 만주국 총사령부 고급부관실에서 근무하면서 3월 헌병주위로 승진. 이듬해 모교인 광명중학교를 방문해 후배들에게 만주국 군관으로 입대할 것을 권유. 만주군 헌병 상위로 진급한 후 간도헌병대 대장으로 근무.

최승희
1942년 2월 중순부터 '싱가폴 함락'을 염두에 두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 조선군사보급협회가 조선총독부, 기계화국방협회 조선본부 등의 후원으로 '최승희 무용공연'을 개최하면서 수익금을 조선군사보급협회 운영기금으로 사용하기로 결정. 최승희는 "우리 무적 황군은 싱가폴을 공략 성공하고 있는 이때 저는 무용으로 그 기쁨을 축하하게 된 것으로 참으로 광영으로 생각합니다"라는 소감을 밝힘. 무용공연과 함께 1937년부터 1944년까지 국방헌금·황군위문금·독일 상이군인 위문금·조선문인협회 기부금·군사후원연맹 후원금·조선군 및 해군 위문금·조선군사보급협회 사업기금·문화장려비 등의 명목으로 약 7만 5000원 넘는 금액을 헌납했다.

현상윤
1939년 4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의 기구 정비 및 확대 과정에서 참사를 맡았고, 같은 해 11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의 일환으로 민중을 지도 교화해 일본정신의 고양과 국가 총력의 발휘를 구현, 강화시킨다는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유도연합회의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1944년 12월 12일 자 <매일신보>에 '승리는 정신력, 신취(神鷲)를 따르자 반도청년'이라는 글을 통해 "전국이 증대하여 갈수록 청년의 책임은 나날이 증대하여 간다. 대동아전쟁을 이기고 못 이기는 것은 그 책임이 우리 청장년들이 몸을 바쳐 국난을 담당함에 있다고 생각한다.(중략) 반도의 청년들아! 이 선배의 뒤를 따라서 몇 천 몇 만의 마쓰이와 가네하라가 나와 주기를 바란다"며 침략전쟁 승리를 위해 일본의 특공대로 전사한 이들을 따를 것을 강조.

홍난파
미국 유학 중 흥사단에 가입한 일로 1937년 6월 '동우회사건'으로 검거됨. 같은 해 11월 4일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 제출. 이 논문에 "민족운동을 표방한 단체에 가맹한 적이 있는 필자는, 그 동기 여하와 그 활동 유무를 막론하고 후회가 막급할 뿐 아니라, 민중의 조도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차제에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중략) 금후는 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본분을 다하고, 온건한 사상과 정당한 시대관찰로써 국가에 충성을 꾀하며, 민중에 대해서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것을 맹세하는 바이다"라고 씀.

또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진상규명위에게 모두 친일파로 평가받은 백낙준 전 연세대학교 명예총장은 1968년도 독립유공자 상훈심사회 위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드러났다. 친일파가 독립유공자를 심사한 셈이다. 또 그는 1970년 8월 국민훈장 무궁화상을 받았고, 1985년 사망후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묻혔다.

마찬가지로 두 기관에서 '친일파' 평가를 받은 군인 백선엽은 2008년 5월 대한민국 건국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된 바 있다.

역시 두 기관에 이름이 오른 한국화가 김기창에게는 2001년 1월 23일 사망 다음 날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고, 김활란 전 이화여대 총장에게는 1970년 2월 10일 사망 뒤 대한민국 일등수교훈장이 추서됐다. 시인 모윤숙에게도 1990년 6월 7일 사망 뒤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국가 기관과 민간연구소 친일 기준 차이는 불가피"

이처럼 같은 인물을 두고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규명위의 평가가 다른 것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 많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는 총 4389명이 등재됐으나, 친일규명위의 명단은 1천여명에 불과하다. 그만큼 대통령 직속 연구기관의 평가 기준이 엄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친일규명위의 활동 배경이 되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규정하고 있는 친일의 기준은 민족문제연구소의 평가 기준보다 엄격하고 구체적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을사늑약 등 일제의 국권 침탈에 협력한 자', '경부 이상 경찰 간부로 재직한 자', '친일작품·비평 활동을 지속적으로 자행한 자' 등을 친일파의 범주로 규정했다. 하지만 친일규명위는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는 부대를 공격하거나 공격을 명령한 행위', '독립운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의 간부로 활동을 주도한 행위' 등 직접적 '행위'를 친일의 잣대로 삼았다.

익명을 요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두 기관의 다른 연구 결과는 상반된 것이 아니라, 평가 기준에서 차이가 있었을 뿐"이라며 "이번 평가를 바탕으로 앞으로 국민들이 토론하고 고민하면서 역사 발전을 고민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친일규명위의 핵심 관계자도 "논란의 인물 중 우리 연구 결과에서 이름이 빠졌다고 해서 영원히 친일파가 아니라는 게 입증됐다고 보면 곤란하다"며 "새로운 사료와 증거가 나오면 역사는 새롭게 조명되고 평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친일규명위의 활동은 오는 30일 종료되며, 조사 결과는 오는 25일경 나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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