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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는 지난 20일, 1950년 여름 한국전쟁 당시 수천명 민간인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의 유해발굴 결과에 대한 현장설명회를 가졌다.

 

'경산 코발트광산 민간인학살사건'은 무려 3500여 명에 이르는 민간인들이 경산시 평산동 폐코발트광산과 인근 대원골에서 국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학살당한 후 폐광산 갱도 내부에 집단매장된 사건이다.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학살이 벌어졌다. 희생자는 당시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 2500여 명과 예비검속된 대구·경북 국민보도연맹원 1000여 명 등이다.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보도연맹원들은 대부분 좌익사상이나 반국가 활동과는 무관한 단순 가담자나 부역자였으며, 직업도 농민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당시 보도연맹원들은 이승만 정부의 예비검속조치에 따라 자발적으로 경찰서에 가거나 집에서 연행되어 경찰서 유치장·담배창고·수리조합 창고 등에 구금되어 있다가 광산으로 끌려가 학살당했다고 한다. 

 

또한 코발트광산에서 집단학살당한 대구형무소 수감자들은 대부분 미결수였으며 국가보안법 위반이나 포고령 위반 등 정치범이 많았다고 한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해 지난 7월 8일부터 유해발굴을 진행해왔는데 이번 현장설명회에는 올해 발굴된 160여 구 이상의 유해와 2001년과 2005년 발굴된 80여 구의 유해가 함께 공개되었다.

 

특히 올해 수평갱도에서 발굴된 160여구의 유해는 수직갱도에 매장된 유해의 일부가 수평갱도 한 쪽으로 쏟아져 나온 것이어서 이보다 훨씬 많은 수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경산 코발트광산은 1930년대 후반 일제에 의해 개발된 군사용 광산으로 2차 대전 종전 직전 폐광되어 방치되어 오다가 1950년 대규모의 민간인학살이 벌어진 지역.

 

당시 포승줄에 묶인 채 수십 대의 군용트럭으로 실려온 사람들은 수직갱도 입구에 나란히 세워진 뒤 총살되거나 산 채로 수장되었다.

 

또한, 일부는 도끼 같은 예리한 흉기로 가격당하거나 기름에 불태워지는 등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대구·경북지역의 경우 1960년 4·19 직후 유족회가 결성되어 활동했다. 그러나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유족회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강제해산 시킨 바 있다. 당시 유족회 간부들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유족들은 2000년 경산 코발트광산 유족회를 다시 결성하고 매년 위령제를 봉행하고 학살지 보존과 진상규명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이번 유해발굴을 진행해온 경남대 박물관팀은 수평갱도 1호에서 40여 구, 2호에서 120여 구 등 모두 160여 구의 유해를 찾아냈는데 이 중에는 총상을 입은 두개골과 골반, 금을 씌운 치아, 손톱 등이 포함됐다.

 

또 직접적 학살의 증거로 보이는 총알과 탄피를 비롯해 신발·단추·칫솔·허리띠 등 각종 유품도 함께 나왔으며, 특히 2호 수평갱도에서는 '朴奉羽(박봉우)'라는 이름의 목제 도장과 도장집이 발굴돼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를 확보했다.

 

이번에 발굴된 단추와 옷가지 등 유류품을 통해 볼 때 당시 학살당한 사람들은 대구형무소 수감자 뿐만이 아니라 민간인도 다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단추의 형태로 보아 여성과 어린아이들도 포함됐을 것으로 보인다고 진실화해위는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경산 코발트광산 이외에도 올해 전남 구례 봉성산·대전 산내 골령골·충북 청원 분터골 지역의 집단학살 유해매장지에 대한 발굴을 진행한 바 있으며, 수습된 유해는 충북대 박물관으로 옮겨 유해의 사망시점, 성별 구분 등 기본 정보를 알 수 있는 감식과정을 거치게 된다.

 

 


태그:#민간인학살, #한국전쟁, #제노사이드, #위령제, #보도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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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마타 공작소> 대표감독으로 독립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오토마타, 만화, 그림에세이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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