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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와 강준만.

한 사람은 역사학자이고 또 한 사람은 언론학자이다. 두 사람 모두 틀어박혀 글쓰기로 유명한 글쟁이들이다. 이이화가 구수한 입담으로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한다면, 강준만은 좀체 모임 같은데서 그의 얼굴을 보기가 어렵다. 이건 두 사람의 큰 차이점이다.

▲ 강준만 교수
ⓒ 인물과 사상사 제공
그런데 두 사람에게 분명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모두 올해 수 년간에 걸친 집필 끝에 '통사' 시리즈를 출간했다는 사실이다. 이이화는 지난 94년 집필을 시작한지 10년만에 지난 5월 <한국사 이야기>(한길사 펴냄) 22권을 완간했다.

또 강준만은 지난 2002년부터 집필을 시작한지 만 2년만에 원고지 2만장 규모의 <한국 현대사 산책>(인물과 사상사 펴냄) 15권을 최근 완간했다. 그러나 이런 통계는 외형적인 것에 불과하다.

진짜 두 사람의 공통점은 바로 '역사 대중화'와 '사료이용의 열린자세'라고 할 수 있다. 그간 기존 대부분의 역사서는 너무 무겁고 재미없다는 평을 들어왔다. 그러나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나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은 모두 재밌고 적절히 가볍다. 그래서 눈높이가 일반 독자들과 맞다.

대부분의 역사 관련 글(단행본, 논문, 아티클 등)들은 일반인들이 듣도보도 못한, 자기들만이 아는 사료들을 들먹이며 전문가 티를 내는게 보통이다. 서술도 지나치게 현학적인 편이다. 그러나 역사가 그렇게 외지고 대중과 동떨어져 있는 건 아니다. 바로 그런 점을 두 사람은 보란듯이 실증하고 있다.

이이화는 지난 5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어떤 사람들은 정사(正史)만을 사료로 이용해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문집·야담집·설화·소설 같은 것도 사료가 된다고 생각되면 광범위하게 이용했다. 실제로 정사가 다 정확한 것만도 아니다. 역사는 역사가의 손에서 빚어지는 것이고 사료는 있는 그대로만을 보여줄 뿐이다. 역사가는 음식을 만드는 조리사와 같다. 나는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야사(野史)도 참고용 사료로 활용했다."

강준만도 이 점 비슷했다.

"제가 새로 발굴한 내용은 없습니다. '발굴'은 더할 나위없이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전 지금 우리 사회에 정작 필요한 건 ‘대중화’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박정희에 대한 자료가 모자라서 이른바 ‘박정희 신드롬’이 기승을 부리는 것이겠습니까? 저는 다른 분들이 거의 거들떠보지 않는 자료들을 활용했다는 데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소설에서 시(詩)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특히 고은 시인의 '만인보', 리영희 선생의 체험담을 많이 활용했지요."

강 교수 이메일 인터뷰 '후기'

연구실로 찾아가서 떼(?)를 쓰면 몰라도 좀체 인터뷰 하기가 쉽지 않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강 교수다. <한국 현대사 산책> 완간 소식을 듣고 강 교수 동생이자 이 책을 펴낸 '인물과 사상사' 대표인 강준우 사장을 윽박질러(?) 얻어낸 것이 이메일 인터뷰였다.

개인적인 친분도 좀 있겠다 싶어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어제(11일) 저녁 10시경 이메일로 질문지를 디밀었다. 그런데 아침에 열어보니 벌써 답장이 도착해 있는게 아닌가. 강 교수의 속필과 필력을 감안한다고 해도 15항목에 달하는 질문에 답하기란 그리 녹록치 않았을텐데 말이다. 적절히 여유까지 보였다.

"솔직하게, 그러나 좀 재미있게, 답변드릴까 합니다. 괜찮겠지요?"

틀에 박힌 모범답안식 답변이라기보다 마치 마주앉아 얘기하듯 술술 풀어낸 게 오히려 대면인터뷰보다 이 방식을 취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서너 번 만나본 경험에 비춰볼 때 강 교수는 큰 덩치에 비해 수줍음이 많은 편이다. 그런 품성이 '성실함'과 결합되면서 초인적인 작업을 해내는 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다. 인터뷰에 응해주신데 대해 감사드린다.
이 대목에서 강준만은 '역사 대중화'를 거론하고 나온다. 흔히 대중화라면 통속적이고 상업성만을 강조한 '싸구려'를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도,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도, 그리고 강준만이 '모범사례'로 든 한홍구의 <대한민국사>도 모두 싸구려가 아니다.

강준만은 "현대사 '산책'을 하면서 매우 유익하고 재미있는 학술 서적과 논문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 저자들 중 몇 분이라도 ‘현대사 대중화’ 작업에 나서준다면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중의 하나인 ‘역사의 빈혈’ 현상을 꽤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그리고는 이른바 '역사학자'라는 부류의 사람들이 역사 대중화작업에 나서지 않는 이유를 "그거 해봐야 학계 내부에서 좋은 소리 듣기 힘들다는 것 잘 아시잖습니까?"라며 우리 학계의 허위의식를 비꼬았다. 역사학계로선 아픈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이러다 역사학계가 설자리를 잃는 건 아닌지.

역사학자 강만길(상지대 총장)은 20세기의 우리 역사를 '한(恨)의 역사'라고 규정한 바 있다. 망국과 식민지배, 그리고 어느날 꿈처럼 다가온 해방과 뒤이은 국토분단, 동족상잔, 독재 등등...

언론학자 강준만의 시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시대와 주체를 달리하면서도 기득권세력 아래에서 신음한 민중들의 고단한 삶에 대해 따스한 시선을 아끼지 않고 있다. 특히 박정희가 정치권력의 주체로 부상한 60년대를 '기회주의'로 규정한 시각은 대단히 탁견 같아 보인다. 언론이라는 프리즘을 통한 시각이 부각된 점도 다른 역사서에서 볼 수 없는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 강준만이 펴낸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
ⓒ 오마이뉴스 남소연

다음은 강 교수와의 이메일 인터뷰 전문이다.

-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 완간을 축하드립니다. 우선 역사학자가 아닌 언론학자가 '통사' 집필에 나서기는 이례적인 일인데 특별한 집필 계기라도 있으신가요?
"언론학도가 아니라면, ‘한국현대사 산책’에 언론 이야기가 그렇게 많이 들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언론과 다른 미디어 관련 부분만 따로 떼내어도 책 두세 권 분량은 될 겁니다. 그런데 잘 아시겠지만, 언론만 따로 분리시킨 언론사는 사람들이 읽으려 들지 않습니다. 언론사 과목을 수강하는 학생들이나 시험용으로 읽겠지요. 제가 이번에 총색인을 만들었는데, ‘조선일보’ 부분만 다음과 같이 나오더군요.

[조선일보] : 모스크바 삼상회의 왜곡보도 40-1-140~142, 미 군정의 지원 40-1-152, 김구 노선과의 결별 40-2-68, 국가보안법 비판 40-2-185, 맥아더 숭배 50-1-235, 사라질 뻔한 제호 50-2-219~221, 쿠데타 지지 60-2-31~33, 이승만 국장(國葬) 비판 60-3-48, 이승복 사건 60-3-230~231, 코리아나호텔 특혜 60-3-248~250, 3선개헌 홍보 60-3-331, 학생들의 비판 70-1-125, 박정희와의 유착 70-1-248~253, 기자 32명 해직 70-2-212~216, 민주화운동 비난 70-3-28~30, 박정희 미화 70-3-311, 스포츠 민족주의 80-1-25~26, 신군부 지지 80-1-59, 5.18 왜곡보도 80-1-172~173, 국보위 찬양 80-1-198, 전두환 찬양 80-1-229~237, 태평성대 80-1-287~295, 민족지 논쟁 80-2-249~254, 권인숙 비난 80-3-39, 보도지침 침묵 80-3-53, 스포츠민족주의 80-3-75~76, 김일성 사망 오보사건 80-3-109~113, 전두환 찬양 80-3-141~142, 전두환과의 유착 80-3-174~175, 지역감정 선동 80-3-241~244, 5공의 최대 수혜자 80-3-260~263, 언론청문회 80-3-315~316, 전두환 장학생 80-4-15~19, 문익환 왜곡보도 80-4-66~67, 조평사태 80-4-74~89, 서경원 사건 왜곡보도 80-4-137 조선투위(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70-2-222~226, 70-3-99~100, 193~195, 80-1-88~90, 80-4-85~86

- 이번 기획물의 서명이 '한국 현대사 산책'으로 돼 있습니다. 반세기동안의 우리 현대사를 '산책'하면서 무엇을 구경하였고, 또 무엇을 느끼셨는지 그 인상기를 간단히 소개해 주십시오.
"요컨대, 제 책은 넓은 의미의 한국언론사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거지요. '산책'을 하면서 사실 제가 많은 걸 배웠습니다. 그간 저는 나름대로 한국현대사를 꽤 안다고 자부해 왔었는데, 이번 산책을 하면서 제가 잘 몰랐던 게 너무 많았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산책을 하면서 내내 한가지 생각했던 건 일반인들이 접근하긴 어렵지만 이 분야에 매우 유익하고 재미있는 학술 서적과 논문들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저자들중 몇 분이라도 ‘현대사 대중화’ 작업에 나서준다면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중의 하나인 ‘역사의 빈혈’ 현상을 꽤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요. 베스트셀러가 된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 같은 좋은 책들이 다양한 주제와 관점으로 좀더 많이 출간된다면 한국사회의 현안을 다루는 논쟁의 질적 수준도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잘 아시겠지만, 역사학자들은 결코 ‘대중화’ 작업에 나서지 않을 겁니다. 그거 해봐야 학계 내부에서 좋은 소리 듣기 힘들다는 것 잘 아시잖습니까?"

- 이번 저서는 방대한 자료와 나름의 평가를 곁들인 노작으로 평가할만하나 자체 발굴자료보다는 대부분 타인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한 것이 대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번 집필과정에서 새로 발굴한 내용들이 있다면 어떤 것들인지 소개해 주십시오.
"제가 새로 발굴한 내용은 없습니다. 그러나 전 그것에 대해 전혀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생각합니다. ‘발굴’은 더할나위없이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전 지금 우리 사회에 정작 필요한 건 ‘대중화’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박정희에 대한 자료가 모자라서 이른바 ‘박정희 신드롬’이 기승을 부리는 것이겠습니까? 저는 다른 분들이 거의 거들떠보지 않는 자료들을 활용했다는 데에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소설에서 시(詩)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특히 고은 시인의 '만인보', 리영희 선생의 체험담을 많이 활용했지요. 총색인을 체크해 봤더니, 이렇게 많이 나오더군요.

[고은] 40-1-76, 245, 249~250, 40-2-165, 197, 231, 50-1-27, 57~58, 64~66, 242, 252~253, 50-2-131~132, 230, 243~244, 328, 50-3-16, 124, 146, 149~150, 70-1-49~50, 187, 70-2-26, 165~166, 170, 70-3-91, 97, 227, 235, 80-1-116, 118, 203, 80-2-26, 80-4-20

[리영희] 40-2-175, 247~248, 313, 50-1-190~191, 203~204, 211, 220, 50-2-280, 50-3-128, 268~269, 60-1-157~158, 169, 60-2-88, 90~92, 170~171, 200~202, 329~330, 60-3-56~57, 173~174, 70-1-190, 70-2-26~27, 57, 64~66, 278~279, 70-3-90~94, 80-1-116, 80-2-149~150, 80-3-267, 80-4-67~68"


- 기존에 출간된 '현대사 100장면' '현대사 뒷얘기' 등의 단행본을 좀더 확장한 형태라는 지적을 받을만도 한데 이러한 책들과의 형식상, 내용상 차별성은 무엇입니까?
"'현대사 100장면' '현대사 뒷얘기' 등도 꽤 활용했지요. 제 책이 이 책들과 다른 건 해방에서부터 80년대가 끝나는 날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돼 있고, 중요한 사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다루었고, 논쟁적인 사안에 대해 각기 다른 다양한 견해들을 다 소개하였다는 것이겠죠."

- 현대사의 주역으로 할동한 유력 정치인 등의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인용한 사례가 적지 않아 보입니다. 사실을 기록한 양심적인 것도 많지만 반면 사실 왜곡이나 미화로 가득찬 것들도 많습니다. 이러한 기록물에 대해 어느 정도 신뢰하며 크로스체킹 같은 작업도 병행하시는지요?
"맞습니다. 제 책은 현대사의 주역으로 활동한 인물들의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아주 많이 인용하였습니다. 생생한 느낌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료들이 안고 있는 함정(사실 왜곡, 미화, 착각에 의한 오류, 편견 등등)은 ‘거리두기’와 다른 견해를 동시에 제시하는 방식으로 다 피해 갔다고 생각합니다. 제 책엔 어떤 사안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들을 동시에 제시한 대목들이 아주 많습니다."

- 해방 이후 우리 역사는 독재와 쿠데타를 반복해 가면서 어두운 역사를 많이 기록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는 조금씩 진보를 거듭해왔는데 우리 현대사에서 밝은 면이 있다면 어떤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까?
"우리 현대사에서의 밝은 면이라면, 뭐니뭐니 해도 민중의 ‘잡초같은 질긴 생명력’이겠죠. 이른바 ‘역사의 역설’도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전쟁의 역설’도 그런 경우 아니겠습니까? 제가 별도로 정리한 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전쟁의 역설

6.25 전쟁은 악마의 저주로 간주되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사망자, 부상자, 실종자를 포함한 인명 손실은 3백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10분의 1이나 되었으며, 1천만명이 가족과 헤어졌고 5백만 명은 난민이 된, 필설로 다할 수 없는 끔찍한 비극을 낳은 그 전쟁이 영원히 악마의 저주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이 악마의 저주란 말인가?

박명림은 그런 곤혹스러움을 비켜가기 위해 ‘분단의 역설’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건 곧 ‘한국전쟁의 역설’이기도 하다. 박명림은 분단의 역설 중 가장 크고 비밀스런 역설은 그것이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역설일 것이라고 말한다. 전쟁 자체는 혹심하게 파괴적이었지만 그 전쟁이 남긴 질서는 경쟁적, 다른 말로 하여 건설적이었다는 배반성을 던져 주었다는 것이다.

박명림은 50-60년대의 북한의 건설과 60-70년대의 남한의 건설도 중요시되어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남북한간의 불꽃튀는 경쟁과 냉전의 한반도에의 자력적(磁力的) 집중은 두 국가와 분단질서를 안정시키는 기능을 수행하였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두 한국 모두 정권 수준에서는 불안과 격동이 있었으나 국가는 매우 안정적이었으며, 그러한 안정을 기반으로 두 한국은 각각 빠르게 경제와 정치, 군사 모두에서 약소국가에서 중위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브루스 커밍스는 차마 자기 입으론 말하지 못하겠다는 듯, 다른 학자의 견해를 빌려 ‘한국전쟁의 역설’에 대해 말한다. “웬일인지 다른 나라 사람들한테는 일어나지 않거나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이런 경제성장의 몇몇 원인들을 한 학자는 다음과 같은 데서 찾는다. 한국이 성장한 것은 정확히 자본가계급이 부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예컨대 라틴아메리카에서는 토착 자본가계급들이 성장을 계속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가 그냥 빼앗기만 한 것은 아니고 준 것-다른 무엇보다 ‘식민지시대로부터 물려받은 강력한 국가’-도 있다는 것이다.”

정진상은 ‘한국전쟁 축적구조’를 역설한다. 한국전쟁이 전근대적 계급관계를 깨끗이 청소한 것은, 혁명이 과거의 유산을 쓸어버리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으며, 그걸 한마디로 표현하면 ‘자본의 천국’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전쟁은 시민전쟁이면서 동시에 시민혁명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형성된 계급구조는 냉전체제 위에 구축된 20세기 후반 세계자본주의의 질서하에서 자본축적에 지극히 유리한 무대였다는 것이다.

정성진은 한국자본주의의 성격은 세계 자본주의와의 연계 속에서, 특히 동아시아 지역구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일국적 시각에서 볼 때 한국전쟁이 한국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가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국제적 관점에서 볼 때 한국전쟁은 미국을 비롯한 전후 자본주의 부흥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고, 동아시아 냉전체제와 한.미.일 영구군비경제의 구도를 확립하여 한국자본주의의 고도축적의 원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채진은 전쟁 그 자체는 바람직하지 못한 괴물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 과정에서도 전통적인 사회질서의 변화, 신흥 자본주의의 대두, 고난을 타개하려는 의지, 국가안보를 위한 결의, 여성해방의 출발, 일부 북한 주민의 남하, 국제적 감각의 향상 등 다양한 긍정적 영향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한국전쟁의 역설 중 가장 곤혹스러운 역설은 흔히 ‘지옥’으로 묘사된 전쟁의 참상이 불러 일으킨 그 어떤 정신적 자세일 것이다. 정진상은 한국전쟁이 촉진시킨 생존경쟁, 물질만능주의, 개인주의, 경쟁과 같은 가치들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심층을 구성하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발생한 평준화의식과 상승이동의 기회균등화가 사회 발전에 기여했다는 뜻일 게다.

하긴 혼란으로 인해 하루 아침에 지위와 신세가 뒤바뀔 때에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너나 내가 다를 게 무엇이냐. 너는 어쩌다 출세를 했을 뿐이니 나도 운수만 따르면 출세하는 건 시간 문제다”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고, 이런 사고방식이 뜨거운 교육열로 이어지면서 긍정적으로 작용한 점도 있을 것이다."


-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한 60년대를 '기회주의'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해방후 1940년대부터 10년씩 잘라서 평한다면 각 시대별 키워드를 어떻게 보십니까?
"40년대 후반은 ‘한(恨)과 욕망의 폭발’ 그리고 그에 따른 타협없는 ‘분열과 대립’, 50년대는 ‘적대와 증오’ 그리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과 그것이 낳은 역설이라 할 탁월한 생존술, 60년대는 기회주의, 70년대는 ‘전태일과 경부고속도로’로 대변되는 인권의 무덤 위에 꽃피운 성장, 80년대는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으로 대변되는 70년대의 심화과정이겠지요. 종국엔 민주화투쟁의 승리로 귀결되긴 하지만 말입니다."

- 5.16에 이어 18년 뒤 다시 12.12 쿠데타가 발생했습니다. 반세기동안의 우리 현대사에서 이처럼 반복된 역사적 행태로는 어떤 것들을 들 수 있습니까? 그리고 역사의 반복은 우연입니까, 아니면 필연입니까?
"저는 역사의 반복은 ‘양과 정도의 문제’일 것이기에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긍정론과 부정론, 또 우연론과 필연론 모두 성립될 수 있는 해석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선 2004년의 한국사회에서 해방정국의 모습을 연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두 시대의 서로 전혀 다른 점에 주목하는 사람도 많지 않겠습니까?

제가 보기엔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 중의 하나는 ‘분열’입니다. 분열은 교과서적으로도 민주주의의 조건이요 과정인데다, 독재정권 치하에선 분열이야말로 민주화의 한 과정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분열주의를 옹호하고 있지요. 그런 옹호에 타당한 면도 있겠지만, 저는 한국사회가 분열에 익숙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이유들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7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불행한 역사적 유산이다. 외세의 입김에 휘둘린 구한말에서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미 군정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은 자치를 박탈당했다. 그 세월이 70년에 이른다. 내부 분열을 조정하는 경험의 기회를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외세의 분열주의 정책에 휘둘려 왔다.

둘째, 초강력 중앙집권제다. 중앙의 패권을 차지하는 세력이 모든 걸 다 먹는 ‘승자 독식 사회’에선 죽느냐 사느냐 하는 싸움이 융성할 수밖에 없었다.

셋째, 초강력 연고주의다. 연고에 의해 패거리가 형성되기 때문에 분열은 대화와 타협으로 극복하기 어렵다. 논쟁과 토론마저도 효용을 갖기 어렵다. 모든 게 패거리 논리에 의해 원초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넷째, 적대 전선의 형성이다. 해방정국의 이념갈등과 6.25, 그리고 독재정권으로 인해 상호 용납하기 어려운 적대관계가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다.

다섯째, 적대 전선의 형성이 주로 이기주의자들과 이타주의자들의 대결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기주의자들은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분열주의를 주요 책략으로 삼았다. 반면 이타주의자들은 자신의 강한 소신 하나로 일어섰기 때문에 독선과 오만으로 빠지기 쉽고, 이는 화합을 어렵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여섯째, 이념의 외부 수입이다. 한국의 현실에서 출발한 이념은 견해가 다른 세력들 사이에서도 상호 접점을 찾기가 비교적 쉬울 것이나, 한국에선 이념을 외국에서 수입해 왔기 때문에 여러 세력들 사이의 상호 접점을 찾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분열이 증폭되는 경향이 있다.

일곱째, ‘정치의 잉여 가치’의 과잉이다. 정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영향력 또는 이익이 너무 크기 때문에 정치집단의 헤게모니 쟁취를 위한 투쟁이 극렬하고, 이는 분열주의로 빠지게 된다."

- 해방후 미군정 이후 최근 이라크 파병까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은 대단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반세기를 관통하는 미국의 대한정책의 골자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반세기를 관통하는 미국의 대한정책의 골자는 이미 해방과 함께 결정되었다고 봅니다. 한국은 일본 분단의 대용품으로 이용된 것 아닙니까? 즉, 분단돼 마땅한 전범국가 일본이 분단된 게 아니라 지정학적인 이유 등으로 오히려 희생자인 한국이 분단되었다는 거죠. 분단 이후에도 남한은 일본을 지키기 위한 도구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죠. 조선일보의 정신나간 논객들은 미국이 일본과 친하고 대한민국과는 덜 친한 게 노무현 정부 때문이라고 헛소리를 늘어 놓습니다만, 그건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된 미국의 대한정책의 핵심인 것이지 한국정부가 어떻게 한다고 해서 달라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죠."

- 최근 친일청산 등 과거사 청산이 정치권을 중심으로 우리사회에서 큰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정치권이 제시한 내용을 포함해서 우리 현대사에서 청산해야할 과거사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지금 과거사 청산을 주장하는 개혁.진보진영과 ‘우리안의 파시즘’을 주장하는 '당대비평'류 지식계의 중간에 서 있습니다. 과거사 청산에 정략이 개입돼 있다 하더라도 그건 별로 중요치 않다는 시각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기회주의 혐오증’이라고 하는 저의 편견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순수하고 겸허한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놓고 극단적 견해가 엇갈립니다. 친일파-독재자에서부터 가난을 극복해준 민족의 지도자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잣대를 무엇으로 삼아야 하며, 그 결과 강 교수님께서는 박정희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계시는지요?
"저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 문제를 둘러싼 양 극단의 갈등은 우리가 치르지 않을 수 없는 ‘역사의 업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박정희 시대의 유산은 ‘기회비용’의 관점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즉, 박정희 시대가 무엇을 했거나 남겼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못하게 함으로써 빚어진 결과가 더 중요하다는 거지요. 그런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박정희 시대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게 문제죠.

박정희 시대가 못하게 했던 것중 가장 중요한 것은 분열주의를 민주적 과정을 통해 해소하는 훈련을 못하게 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 훈련의 기회는 박정희 시대와 뒤이은 전두환 시대에서까지 박탈됨으로써 한국인은 그 점에서 한 세대 이상 지체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 거죠.

반면 박정희 시대는 사실상 분열주의를 악화시킨 시대였지만, 겉으로는 그걸 완전히 통제하는 모습으로 비쳐졌습니다. 폭력에 의한 통제과정은 보여지지 않았으므로, 대중의 눈에 들어오는 건 지도자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는 일사불란(一絲不亂)이었을 겁니다. 실제로 박정희 예찬론자들은 주로 그 점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예찬론엔 ‘활력’이니 ‘다이내미즘’이니 ‘역동성’이니 하는 따위의 단어들이 난무하거든요.

반면 폭력에 의한 통제가 불가능하게 된 민주정권 이후 나타난 모습은 혼란스러운 분열과 갈등이었죠. 이 경우의 분열과 갈등은 그 모든 과정이 언론에 의해 미주알고주알 보도되었고, 그것도 과장왜곡보도가 난무했습니다. 분열과 갈등을 민주적 과정을 통해 해결하는 훈련도 한 적이 없었으므로 그건 추악하기 이를 데 없었지요. 이런 분열과 갈등의 행진은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될 것이며, 그때까진 ‘박정희 향수’도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즉, ‘박정희 향수’는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면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역사의 업보’일 수 있다는 겁니다."

- 70년대에 성장기를 보낸 분으로서 70년대의 명과 암을 '경부고속도로와 전태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17대 총선에서 원내에 진입한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개원에 앞서 전태일 열사 묘소를 참배했습니다. 진보정당의 앞날을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죄송합니다만, 진보정당의 앞날을 평가할 만한 안목이 제겐 없습니다."

- 현대사 속에서 한국언론은 저항과 굴종의 역사를 같이 가지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른바 조중동으로 불리는 '빅3'가 한국사회 발전에 기여한 측면과 그 반대로 저해한 측면을 든다면 어떤 사례가 있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조중동이 한국사회 발전에 기여한 측면은 '힘이 최고다'는 법칙을 한국인들의 뇌리에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었다는 것입니다. 조중동의 가장 큰 특징은 뭐니뭐니 해도 자기성찰의 가치를 경멸하는 후안무치(厚顔無恥)와 ‘힘의 논리’에 대한 신봉 아니겠습니까? 그게 무슨 기여냐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힘이 최고다'를 믿지 않는 한국인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절대 다수의 한국인이 믿는 가치관이라면 존중해줘야겠죠.

조중동이 한국사회 발전을 저해한 측면으론 그들이 ‘분열주의의 화신’이라는 거죠. 그들에게 일말의 애국심이라도 있었다면 노무현정부를 비판하더라도 좀더 진지하고 성실하고 겸허한 자세로 임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사회를 질식시키기 일보 직전인, 지금과 같은 최악의 ‘편 가르기’ 문화의 원조이자 원동력은 바로 조중동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입만 열면 ‘편 가르기’ 문화를 비판해대고 있으니, ‘적반하장(賊反荷杖)의 화신’이기도 하지요."

- 이승만을 두고 '예수나 석가와 같은 성자' '세기의 태양' 등으로 찬양한 어용곡필 지식인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장준하는 4.19 직전 <사상계>를 통해 이를 질타한 바도 있습니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에서 우리 지식인들이 어느 정도 제역할을 했다고 보십니까? 또 만약 제역할을 못했다면 그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한국 현대사에서 지식인이 해온 역할엔 명암(明暗)이 있겠지요. 주로 어느 쪽을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극단으로 달라질 수 있겠기에 한마디로 싸잡아 이야기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만 한국 특유의 ‘이중문화’는 지적할 수 있겠지요. 지식인의 역할이나 위상에 이중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건 ‘정치경제’와 ‘문화’의 분리에서 나오는 이중성입니다. 문화적으론 아직도 여전한 숭문주의 전통 때문인지 지식인에 대한 기대수준이 높은데 비해, 그들의 ‘제도적 종속성’은 심각하다는 겁니다.

대학은 지식인의 방패인 동시에 질곡입니다. 예컨대, 조잡한 예이긴 합니다만, 연세대 교수가 조선일보 비판하고 고려대 교수가 동아일보 비판하는 게 가능한 일입니까? 한국의 지식계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지나치게 서구지향적이고 추상적인 거대담론 위주로 나아가는 건 지식인들의 정치경제적 기반이 행사하는 통제력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반세기 동안의 우리 현대사를 돌이켜 보면 대사건의 연속이었습니다. 혹자는 우리 근대 백년은 서양의 천년에 맞먹을만큼 다사다난했다고 했습니다. 그간의 갈등과 혼돈, 그리고 변화무쌍은 선진화로 가는 성장통으로 보십니까? 아니면 우리민족의 독특한 민족성에서 기인한다고 보십니까?
"그간의 갈등과 혼돈, 그리고 변화무쌍은 선진화로 가는 성장통인가, 아니면 우리 민족의 독특한 민족성에서 기인하는 건가? 저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앞으로 우리가 하기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민족성’이란 개념은 누적된 역사와 구조의 파생물에 불과한 것이지만, 일단 무시할 수 없는 규모와 강도로 그것이 형성되면 역사의 진로와 구조의 변화 가능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요. 유감스러운 사실이지만, 역사조차도 ‘결과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최종 결과에 의해 과거가 규정당할 수 있다는 거죠. 노무현 정부도 최종 결과에 따라 2004년의 오늘도 재해석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요즘 집착하는 화두는 ‘분열’입니다. 완전하게 통제하진 못했겠지만, 저는 책을 쓰면서 내내 선악(善惡) 또는 흑백(黑白) 이분법에 대해 저항하고자 했습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모진 시련을 당한 세력이 중간파였습니다. 좌우를 막론하고 ‘중간파 죽이기’에 혈안이 돼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독재정권 시절 ‘중간파’라고 주장했던 일명 사쿠라들이 중간파의 이미지를 더 버려놓았지요. 그러나 저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건 중간파라고 생각합니다."

- 끝으로 이번에 펴낸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던지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독자들에게 던지고 싶은 단 하나의 메시지가 있다면 제발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소홀히 하지 말자는 겁니다. '동양심리학'이라는 책을 보았더니, '대학'에서는 이를 혈구지도(絜矩之道)로 설명했다는군요. 혈은 ‘헤아린다’는 뜻이며 구는 ‘잣대’를 뜻한다고 합니다. '대학'엔 이렇게 써 있다고 합니다.

“군자는 혈구지도를 지닌다. 윗사람에게서 싫다고 느꼈던 것을 아랫사람에게 시키지 않으며, 아랫사람에게서 싫다고 느꼈던 것을 가지고 윗사람을 섬기지 않으며, 앞사람에게서 싫다고 느꼈던 것을 가지고 뒷사람을 이끌지 않으며, 뒷사람에게서 싫다고 느꼈던 것을 가지고 앞사람을 따라하지 않으며, 오른쪽 사람에게서 싫다고 느꼈던 것을 왼쪽 사람에게 건네지 않는다.”

반세기 한국 현대사의 굴곡 원고지 2만장에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 어떤 내용 담았나

▲ 강준만이 펴낸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
ⓒ오마이뉴스 남소연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모두 15권으로, 원고지 분량으로 2만 장이 넘는 방대한 규모다. 1945년부터 1989년까지 45년의 우리 현대사를 촘촘히 담아낸 '통사'로, 정치 경제 사회는 물론 대중문화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이를 위해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방대한 주석에 당시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 ‘자세히 읽기’ 코너 등을 통해 입체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저자는 이를 위해 10여 년에 걸쳐 자료수집을 했고, 1만여 개의 주제별 파일을 정리했다. 또 지난 2002년 11월 '1970년대편'을 출간한 이후 집필 기간만도 무려 2년이 넘게 걸렸다.

한편 이번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단순히 과거 사건의 나열에만 그치지 않고 저자 나름의 강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즉 “한(恨)과 욕망의 폭발”(1940년대), “극단의 시대”(1950년대), “‘기회주의 공화국’의 탄생”(1960년대), “수출의 국가종교화”(1970년대),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1980년대) 등.

저자는 각 시기별 키워드를 통해 그 시대를 지배했던 정서와 구조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 속에서 수많은 사건과 주제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다. 특히 저자는 한국 현대사가 ‘인간’을 배제했던 역사라고 간파하며 ‘인간’의 복원,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이념과 세대의 새로운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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