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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릴 때마다 걸었습니다” 표지
 “흔들릴 때마다 걸었습니다” 표지
ⓒ 이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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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에 관한 책이니 당연히 건강에 관한 책인 줄 알았다. "계절마다 바뀌는 풍경이며,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건강한 미소며 물소리, 바람소리, 그리고 들꽃들의 농염한 자태는 또 얼마나 매혹적이던가.(75~76쪽)"와 같이 '건강'이라는 말이 몇 번 나오기는 하지만, 건강과는 거리가 먼 내용들이다. 하긴 건강을 위해 걸었다면 이런 책이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출판사에서 달았을 법한 '마음 근육을 키우는 법'이라는 부제는 책을 읽다 보면 괜한 제목으로 보인다.

기자가 이 책에 빠지게 된 것은 "한 권의 시집을 도반 삼아 걷는다고 상상해 보라(머리말)"라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걷는 곳마다 고전이 따라붙는다. 고전에 대한 사유가 그대로 걷는 길에 녹아 있다. 걷는 길에 대한 사유 자체가 인문학인데 고전 독서에 대한 성찰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으니 그야말로 여행서가 아니라 길 인문학서라 할만하다.

4월 29일 광화문 기자 사무실에서 작가를 만났다. 책을 읽고 만났지만, 책 속에서 언급한 책들을 다 읽은 것은 아니어서 선뜻 서평을 쓰기 어려웠다. 덕분에 저자가 언급한 책 가운데 읽지 않은 책도 찾아보고 저자가 언급한 북한산의 의상 능선도 지인들과 걸어보니 비로소 책이 내 책이 되었다.

그 길만의 특별함을 발견합니다
 
세종국어문화원에서 기자와 대담을 나누고 있는 박대영 저자
 세종국어문화원에서 기자와 대담을 나누고 있는 박대영 저자
ⓒ 김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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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걷기를 언제부터 열심히 하게 되었나요?
"제가 14년 전쯤에 <길, 매력을 팔다>라는 다큐멘터리(SBS)를 제작한 적이 있습니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가 걷기 열풍이 불기 시작할 즈음이었고, 제주도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이 열리고, 잇달아 전국 곳곳에서 둘레길이 조성되기 시작했더랬습니다.

그 당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우리나라에도 좋은 길이 많구나,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길을 걷기 시작했지요. 그렇게 많은 길을 걸으면서 걸음들이 쌓이고 생각들이 쌓이면서 길 뒤편에 무언가 남겨지는 게 있었습니다. 그 느낌들이 모여 어느 순간 책이 된 거죠."

- 요즘 인문학이라는 말을 붙이는 게 유행이긴 하지만 이 책이 고전을 결부해 놓아서인지 그야말로 길 인문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걸으실 때마다 생각거리 책을 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걷고 나서 쓰면서 정리한 것인지요?
"길을 걷다 보면 길마다 그 길만의 특별한 무엇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그 길의 풍경일 수도 있고, 스스로 깨닫는 어떤 느낌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길 위에서 떠오른 생각들은 불현듯 조르바를, 어린왕자를, 신영복을 떠올리고, 또 만나게 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길 위에서 만나는, 또 깨닫는 인문학의 요소가 가미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책 첫 장에 나오는 의상 능선을 걸을 때, 둘레길을 주로 걷던 저에게 의상능선이라는 산들의 순례는 나름 힘든 코스였습니다. 어차피 내려가야 할 산을 왜 기를 쓰며 올라야 하나, 하는 푸념이 저절로 쏟아졌습니다. 그렇게 투덜대다가 굴러떨어질 것이 뻔한 바위를 산 위로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의 '무용하고 희망 없는 형벌'을 떠올리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저 스스로 읽고 싶은 책을 들고 걸으러 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 책 구절들이 걷는 길 위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치 그 책이 그 길을 위해 존재한다는 착각이 들었어요.
"제가 길을 걸으며, 그렇게 길이 쌓이고 생각이 쌓여 책이 될 때 깨닫는 바는 '아! 길이 인문학이구나', 하는 감탄이었습니다. 처음의 이 길을 걸었던 오래전의 누군가를 생각하고, 오늘 이 길을 걷는 나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노라면 그들의 생각과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인문학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길은 중국의 사상가인 노신이 말했듯, 세상에 길이란 없는 것이고, 사람이 다니면서 걸음이 쌓이고 그 흔적들이 모여 길이 되는 것처럼, 결국 길은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고 이야기다, 그래서 인문학인 거죠. 그리고 길과 책의 조화가 있는데요.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길을 걷다 보면 불현듯 떠오르는 책의 주인공이 있을 때도 있고,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을 보면서 상선약수(上善若水) 같은 경구를 떠올릴 때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 그런 느낌들이 책을 정하는 것이죠. 그래서 아마도 길과 책이 나름의 조화를 이루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 걷는 것 자체가 삶일 수도 있고 우리를 비워내는 작업일 수도 있습니다, 길을 걸으면서 비움의 과정을 거치는데 '걷기와 인문 독서' 이랬을 때 뭔가 비움과 채움 이런 생각도 하게 됐거든요.
"어쩌면 삶은 '견디고 버티면서' 나아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요. 그런 의미에서 길을 걷는다는 것 역시 얼마간의 몸의 수고로움을 견디며, 또 감당하며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몸이 힘들 때 사실 아무 생각이 나질 않거든요. 길을 걸으며 무언가를 생각한다? 실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몸이 힘들기 때문이죠. 그래서 목적지만 애타게 그리며 나아가지요.

그렇게 몸의 고통을 견디며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생각들은 길 위에 떨궈지고 길을 걷는 두 발과 땀으로 범벅인 자신만 남고 나머지는 슬그머니 비워집니다. 그런데 걸음이 쌓이고, 그 걸음에 익숙해질 무렵 느닷없이 생각들이 밀려와 자신을 아프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고, 또 울고 난 후의 개운함 같은 맑은 마음이 가슴 가득 채워질 때가 있습니다. 걷는 여정 속에서 비움과 채움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지만 늘 이루어지는 순환작용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그 순환의 고리에 인문학적인 소양이 보태진다면 그 순환은 훨씬 더 풍성한 무엇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또 느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시시포스를 알고, 조르바를 알면 그들의 마음을 느끼고 배우면서 내 마음도 풍성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야말로 묵은 것을 비워내고 새로운 것을 채워 넣는 작업인 것처럼 말입니다."

집 밖으로 나와 걷기 시작하면 됩니다

- 그럼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여기에는 삶의 치유서 이런 부분들이 많은데요. 이제 저자로서 이 책을 어떻게 읽었으면 좋겠다. 뭐 이런 안내 같은 부분이 있을까요.
"제가 이 책을 쓰면서 원했던 바는 단 한 명의 독자라도 이 책을 읽고 남들이 말하는 어떤 세속적인 기준에서 보면 자신의 삶이 조금은 부족하고 가벼워 보일지라도 열심히 살았고, 또 살아간다는 존재 이유만으로도 나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제 책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작은 도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런 바람이 있었습니다. 마침 제 처의 친구가 지금 항암 투병 중인데 제 책을 선물을 드렸더니 며칠 전에 딸기 한 상자를 선물로 보내 왔더라고요. 너무 잘 읽고 있다고, 그리고 많은 위로가 된다고 하셔서 제가 고마웠고, 책을 쓴 보람을 느끼고, 또 행복해지기도 했습니다."

- 실제로도 많이 걷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럼 그런 걷기 프로들한테는 어떤 말씀을 하고 싶은지.
"우리는 흔히 산을 오를 때, 등산(登山)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등산이라는 단어에는 약간의 정복욕이 들어있지 않나 싶습니다. 어쩌면 산은, 길은 정복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우리 삶의 여정이면서 울타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끔은 하게 됩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등산이라는 표현 대신 입산(入山)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고 합니다. 산에 들어가는 거지요.

산을 발아래 두는 것이 아니라 산의 품 안으로 들어가 쉬고 단련하고 깨달음까지도 구할 수 있다는 의미가 들어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요즘 많은 분들이 걸으시고, 그런 이유로 잘 걷는 분들 참 많습니다. 그런데 경험도 중요하겠지만, 가끔은 입산의 마음, 산에 스며들어 산과 자연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또 스스로 성장하는 기회로 삼아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 제가 걷기를 많이 안 하고 있었는데 이 책이 계기가 돼서 많이 걷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게 독자로서의 가장 큰 소득인 거라는 생각이 들고요. 마음은 있는데 사실 막상 실천을 옮기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바쁜 탓도 있고.
"미국 국립공원의 아버지로 불리는 존 뮤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말하길, 걷기를 원한다면 '배낭을 메고 집 울타리를 뛰어넘기만 하면' 된다고 했답니다. 그렇게 배낭을 메고 울타리를 뛰어넘는 것,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길은 어디든 열려 있고, 온 세상을 품으며 걸을 수 있습니다. 문을 열고 나오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어려워서 주저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냥, 무작정 걷는다는 단순함을 실천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걷기를 싫어하는 독자들한테 한 말씀 좀, 걷기를 싫어하거나 아니면 걷기를 많이 못 해본 독자들한테 한 말씀 좀 부탁드립니다.
"일단 걷기는 진짜 가장 좋은 운동이고요. 굳이 철학적인 성찰이나 인문학, 아무 상관 없이 그냥 걷는 것은 그게 동네 골목길이 됐든 아니면 시간을 들여 먼 곳의 길을 걸으시든 그곳이 어디든 간에 운동으로서는 최고입니다. 그리고 걷다 보면 정호승 시인께서 말씀하셨듯이 '인생은 여행이고 여행은 걷기'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행을 하려거든 걸어라'라는 늘 유효한 명제라고 생각합니다.

여행은 곧 걷기이니 많이 걷는다는 것은 그곳이 어디든 풍성한 여행을 했다는 증표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걷다 보면 스스로 풍성해지고, 그 풍성해진 마음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로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걸으면서 위로하고 위로받으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걷다 보면 이런저런 성취들이 삶을 풍성하게도 여유롭게도 합니다. 느린 걸음 속으로 스며드는 자연을, 스스로를 느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그 방법은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된다는 것, 작은 용기 하나면 충분한 아주 쉬운 일이 걷기입니다."

인터뷰하고 나니 독서와 걷기가 공통점이 있는 듯했다. 핸드폰에 묻혀 살다 보니 독서도 책을 일단 펼치는 용기가 필요하고 걷기도 일단 나서는 용기가 필요하니까 말이다. 저자도 집을 나서는 작은 용기를 내내 강조했다. 걸음걸음을 그런 수고로움을 감당하겠다는 작은 용기, 그런 부분들이 쌓이고 쌓이면 나중에는 그냥 일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몸이 길이요 길이 몸이 되는 것 아닐까?

흔들릴 때마다 걸었습니다 - 굽이지고 흔들리는 인생길에서 마음근육을 키우는 법

박대영 (지은이), 이새(2023)


태그:#서평, #저자인터뷰, #박대영, #걷기, #고전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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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학과 세종학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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