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구의 신화' 유재학 울산 현대모비스 총감독이 정든 코트와 아름다운 작별을 고했다. 3월 24일 현대모비스 구단은 홈구장인 울산 동천체육관에서 안양 KGC인삼공사와 경기( 94-89)를 승리한 이후, 2004년부터 팀을 이끌어온 유재학 총감독을 위한 은퇴식을 개최했다. KBL에서 '감독 은퇴식'을 연 건 유재학 감독이 최초다.
 
은퇴식이 시작되자 유 감독이 코트 중앙에 섰고 현대모비스 선수단이 그 뒤로 도열했다. 곧이어 전광판 화면에는 유 감독을 위한 헌정 영상이 공개했다. 유 감독의 현역 시절 농구대잔치에서의 활약, 프로 무대에서 감독으로 일군 영광의 순간들이 소개됐다.

구단은 특별제작한 기념 트로피와 꽃다발을 전달했다. 영상에서는 선수와 팬들이 함께 만든 릴레이 영상으로 '이젠 안녕'을 노래하며 유재학 감독과의 작별을 기렸다. 내내 차분한 모습을 유지하던 유 감독도 잠시 표정이 상기되며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너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24일 울산 동천체육관에서 열린 현대모비스 유재학 총감독의 은퇴식에서 유 감독이 헌정 영상을 시청한 후 손뼉을 치고 있다.

24일 울산 동천체육관에서 열린 현대모비스 유재학 총감독의 은퇴식에서 유 감독이 헌정 영상을 시청한 후 손뼉을 치고 있다. ⓒ 연합뉴스

 
유 감독은 팬들에게 전하는 고별사에서 "제 농구 인생 50년인데 현대모비스와 함께 19년을 보냈다. 너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감사드린다"고 인사하며 "후배들을 보니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현대모비스가 다시 우승권에 오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앞으로도 많은 사랑과 응원을 부탁드린다"는 덕담을 남겼다.
 
유재학 감독은 한국농구 역사상 지도자로서는 사실상 GOAT(역대 최고)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그의 농구인생이 그 자체로 곧 한국농구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 감독은 경복고와 연세대를 나와 실업 기아에서 선수 생활을 보내며 당대 최고의 포인트가드 중 한 명으로 주목받았으나 고질적인 무릎부상으로 불과 2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일찍 현역 생활을 마감해야 했다. 하지만 이른 은퇴는 그에게 좀 더 일찍 '준비된 지도자'로서 제 2의 농구인생을 열어주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1993년 모교인 연세대 코치에 부임하며 지도자의 길에 입문한 유 감독은 최희암 감독을 보좌하는 코치로서 연세대의 농구대잔치 사상 첫 대학팀 우승이라는 신화를 이뤄냈다. 1996년에는 연세대학교를 연고 학교로 하여 새로 창단된 실업 대우증권 농구단의 창단 코치로 들어갔다.
 
1997년 프로 출범 원년, 대우 제우스 코치로 프로 지도자 경력을 시작한 유 감독은 약 2시즌의 감독 수업을 거쳐 1998-99시즌 성적 부진으로 사임한 최종규 전 감독의 뒤를 이어 감독대행, 이듬해에는 정식 감독으로 임명되며 본격적인 감독 경력을 시작했다. 당시 유 감독의 나이는 불과 만 34세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은 KBL 역사상 최연소 감독이었다.
 
유 감독은 인천 대우가 신세기와 SK 빅스를 거쳐 전자랜드로 모기업이 바뀐 2004년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 시기에는 최고 성적이 4강에 그쳤고 우승은 한번도 차지하지 못했지만 떠오르는 젊은 차세대 감독으로서 능력을 증명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계약만료 이후 당시 KBL 감독 최고 대우(2억 3천만)를 받고 울산 모비스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울산 모비스는 유재학 감독이 처음 부임할때만 해도 전신 기아 엔터프라이즈 시절의 영광을 잃고 하위권을 전전하던 팀이었다. 유 감독은 부임 2년차인 2005-06시즌 양동근과 크리스 윌리엄스를 중심으로 리빌딩에 성공하며 약체라는 예상을 깨고 일약 정규시즌 1위-챔피언결정전 진출이라는 이변을 연출해낸다. 이듬해인 2006-07시즌에는 2년 연속 정규시즌 우승과 함께 챔피언결정전에서 절친 추일승 감독의 부산 KTF(현 KT)와 7차전까지 가는 대접전 끝에 마침내 꿈에 그리던 첫 통합우승을 거머쥐게 된다. 유재학 감독의 나이 44세였다.
 
유재학 감독은 2021-22시즌을 끝으로 지휘봉을 내려놓기까지 통산 6차례 정규리그 우승 및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2013년부터는 프로농구 역사상 유일무이한 쓰리핏(3년 연속 챔프전 우승)을 달성하기도 했다.
 
감독 통산 1257경기를 지휘했고 724승을 거두며 두 부문 모두 프로농구 사령탑 역대 최다 기록을 수립했다. 또한 2004년부터 2022년까지 무려 19년을 현대모비스에서만 재임하며 역대 프로농구 단일팀 최장수 사령탑 기록도 세웠다. 지난 시즌에는 대학 후배인 조동현 감독에게 지휘봉을 물려주고 총감독으로 물러났다.

또한 유 감독은 KBL만이 아닌 국제무대에서도 빛났다.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은메달, 2103년 FIBA 아시아컵 3위, 2014년 농구월드컵 본선진출을 이끌었고, 2014년 홈에서 열린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는 한국에 12년 만의 금메달을 안기며 국가대표팀에서도 역대 최고의 감독으로 기억됐다.
 
프로 원년부터 코치 시절을 포함하여 총감독으로 물러나기까지 무려 25년간 단 한 순간도 코트를 비우지 않고 개근했다. 30대의 패기넘치던 청년 감독이, 이제 어느덧 백발이 성성하여 60대 환갑을 바라보는 백전노장이 된 모습은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유 감독은 농구 전술에 해박하고 경기 중 임기응변이 뛰어나 '만 가지 수'를 가졌다는 의미로 '만수(萬手)'라는 별명을 얻었다. 다채로운 팀수비 전술의 발전, 효율적인 샐러리캡 활용, 선수 육성과 리빌딩 등 '유재학 리더십'은 KBL의 발전과 스타일 확립에 있어서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감독으로서 성공 비결
 
무엇보다 유재학 감독이 최장수 감독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비결은,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함에 있다. 유 감독은 엄격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강성 이미지 때문에 보수적인 원칙주의자나 수비농구를 중시하는 감독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정작 유 감독은 오히려 KBL 역대 어느 감독보다도 시대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해 온 감독이었다. 전자랜드 시절부터 현대모비스 초창기까지는 미완의 유망주들과 한물간 식스맨들을 조합했다. 장단점이 뚜렷하고 불완전한 선수구성을 팀워크로 재구성하는 '벌떼농구'를 선보였다.

선수구성에 따라 최소득점 1위의 수비농구와 정석적인 인사이드 농구에서부터, 최다득점 1위를 자랑하는 화끈한 공격농구와 현대적인 스페이닝 농구까지 두루 선보인 바 있다. 선수 발굴에 있어서도 학연-지연-이름값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실력과 가능성만 보고 기회를 주는 실험을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유재학 감독도 마냥 완벽하기만 했던 인물은 아니었다. 팬들이 지켜보는 프로농구 경기도 중 선수를 질책하는 과정에서 입에 테이프를 붙일 것을 강요하거나 꿀밤을 먹이는 등 권위적이고 구시대적인 훈육 방식의 잔재로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찰스 로드-로드 벤슨 등 개성강한 외국인 선수들은 유 감독과 성격적인 불화로 갈등을 빚다가 퇴출되기도 했다. 말년으로 갈수록 선수 혹사 문제나 실패한 전술에 대한 고집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다만 이런 문제점은 KBL에서 꼭 유 감독만의 사례라고 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유 감독의 지휘 아래서 전성기를 맞이하거나, 유 감독을 떠난 이후에도 그의 지도력에 대한 굳건한 신뢰와 존경심을 드러낸 사례가 더 많았다.
 
유 감독은 은퇴식을 통하여 현대모비스와 아름답게 작별했지만, 이것이 곧 '농구 감독으로서의 완전한 은퇴'를 의미하는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건강문제로 현대모비스 감독직에서 물러났던 유 감독은 현재 1년 정도 휴식을 취하면서 몸상태가 많이 회복된 것으로 알려졌다. 유 감독은 당장 특별한 계획은 없다면서도 "감독이라는 자리는 팀에서 불러줘야 하는 것"이라며 향후 다른 팀의 지휘봉을 잡을 일말의 가능성은 열어뒀다.
 
유 감독과 동갑인 전창진 전주 KCC 감독이나, 추일승 국가대표팀 감독은 여전히 현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NBA(미 프로농구)에서도 그렉 포포비치(샌안토니오)-닥 리버스(필라델피아) 등 유재학 감독보다 나이가 많은 이들도 왕성하게 현역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프로무대에서 '감독 유재학'을 언젠가 다시 보게되는 것도 불가능한 상상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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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학 현대모비스 GOAT 은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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