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요즘 글을 쓸 때 딜레마를 느낀다. 일상에 관한 글을 쓰다 보니 남편과 관련된 소재를 종종 다루는데 '시댁'과 '시가'라는 단어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사십 대 중반인 나는 '시댁'에 더 익숙한데 요즘은 '시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시댁'과 '처가(처갓집)'를 비롯해 '할머니', '외할머니' 등 성평등에 어긋나는 단어를 개선하기 위한 변화의 움직임이 일고 있고, 이로 인해 '시가'라는 단어가 점차 보편화되고 있다.

'시댁-처가댁'이 아니라 '시가-처가'를 사용하자는 이유는 아마도 처가댁이 '처가(아내의 본가)'에 '집'의 높임말인 '댁'이 추가로 붙은 중복된 표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타인과 대화 시 자기 집안(본인 또는 배우자 집안)을 높여서 부르지 않는 겸양 때문이기도 하리라.
 
Question Mark
 Question Mark
ⓒ pexels

관련사진보기

 
나 역시 며느리로 살아오면서 '도련님', '아가씨', '서방님' 같은 호칭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있어서 이런 변화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가'라는 단어를 사용하기가 망설여지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인, 바로 남편 때문이다.

남편은 배려심이 많아서 상대가 듣기에 기분 나쁜 말을 하지 않는다. 덕분에 지금껏 크게 싸우지 않고 지내왔다. 결혼 초부터 우리 집을 칭할 때 '처가'대신 꼬박꼬박 '장인어른, 장모님 댁'이라고 불렀고 결혼한 지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렇게 하고 있다. '처가'라는 두 음절 대신 '장인어른, 장모님 댁'이라는 여덟 음절을 발음하려면 꽤나 번거로울 텐데도 말이다.

오는 말이 고우니 가는 말이 곱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 역시 평소에 '시댁' 또는 '아버님, 어머님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런 언어습관 때문에 글을 쓸 때 '시가'와 '시댁'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된다. 다들 쓰는 말이지만 내가 사용하려니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이런 작은 변화조차 망설이는 내 모습을 보니 그동안 가부장적 가치관에 깊이 세뇌되어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하지만 요즘 정서가 성평등에 어긋나는 단어 사용을 지양하는 분위기이니 그 흐름에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단 '시가'와 '시댁' 뿐 아니라 '도련님', '아가씨', '서방님' 등 주부들의 성토를 자아내는 많은 단어들이 존재한다. 다행히 시부모님은 그 세대 분들에 비해 비교적 열린 사고방식을 갖고 계셔서 신혼 초, 내가 시누이에게 '아가씨'라고 하니 이름을 부르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누이가 결혼을 하니 그 남편을 호칭해야 하는데 '서방님'이라는 말이 도저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매번 "저기요" 하고 애매하게 부르다가 어느 날 그냥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너무 제멋대로인 건 아닐까, 하고 염려했는데 오히려 대화가 편해져서 더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

호칭에 관한 또 다른 일화가 떠오른다. 결혼한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무렵, 가족 집들이를 했다. 시부모님, 시외삼촌 내외분, 시이모님, 남편 사촌까지 대식구가 모이는 자리였다. 꼬맹이가 한 명 있길래 '누구지?' 싶어서(당시 시누이가 미혼이라 남편에게는 조카가 없었다) 남편을 쳐다보니 "H랑 얘랑 사촌이야"라고 시어머님이 말씀하셨다(H는 남편을 말한다). 알고 보니 어머님이 결혼을 일찍 하셨고, 시외삼촌분이 결혼을 늦게 하시면서 사촌 간에 터울이 많이 지게 된 것이었다.

꼬맹이지만 남편 사촌이니 말을 놓을 수 없었다. 당시 나는 결혼한 지 한 달 밖에 안 된, 군기가 바짝 든 새댁이었으니. 그 아이가 대하구이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더 먹을지 물어보려는데 차마 "도련님, 새우 더 드실래요?"라고 할 수는 없어서 "저어기... 새우 더 드실래... 아니... 갖다 줄까... 요?"라며 횡설수설했던 기억이 난다. 자꾸 높임말을 하는 나를 보고 꼬맹이는 눈이 동그래져서 '엄마, 이 아줌마 이상해'라는 표정으로 외숙모를 쳐다보았고 나와 그 아이 모두에게 어색한 상황이 연출되고 말았다.

만약 내가 아이에게 반말을 썼다면 어땠을까. 시어른들 입장에서는 아무리 아이지만 남편과 같은 항렬인데 동의도 구하지 않고 반말하는 것이 마뜩잖게 여겨지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서로 불편한 관계인 그 아이와 나는 그날 이후로 거의 볼 일이 없었다.

구시대적인 호칭은 가족을 더 멀어지게 만든다. 중요한 건 호칭이 아닌 마음이다. 혈연이 아닌 제도로 맺어진 가족인 만큼 서로를 향한 배려가 필요하고, 그런 노력을 통해 점차 가까워지면서 비로소 끈끈한 가족애가 형성될 수 있다.

관습적으로 사용해 오던 단어이니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전통과 관습이라는 미명 하에 어느 한쪽이 불쾌해질 수 있는 호칭의 사용을 고집한다면 가족 해체가 가속화되는 요즘, 서로 간의 관계는 더욱 멀어지고 말 것이다.

'시가와 처가(개인적으로는 '시댁과 처가댁'을 선호한다)', '~씨', '~님'이라는 상호 간의 동등한 호칭이 자리 잡혀서 여성이든 남성이든 어느 한쪽이 마음 상하는 일이 없게 되길, 그리고 지금처럼 '시가'와 '시댁'의 선택을 두고 갈등하는 일이 없게 되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 브런치와 블로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성평등, #호칭, #단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살아가는 이야기와 책 리뷰를 적는 브런치 작가입니다. 다정하게 마음을 어루만지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