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2>의 서은우(김향기 분)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2>의 서은우(김향기 분) ⓒ tvN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2>의 서은우(김향기 분)는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열녀의 길을 걸으라는 요구를 뿌리치고 계수의원에서 의사의 길을 걷는다. 사대부가의 딸인 그는 이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두 가지 대우를 받는다.
 
우선, 사대부가의 일원이기 때문에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계수의원 원장인 계지한(김상경 분)은 젊은 동료인 유세풍한테는 이따금 함부로 대할 때도 있지만, 유세풍을 보조하는 서은우한테는 그렇게 대하지 못한다. 여성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양반댁 아씨이기 때문이다.
 
서은우가 그런 대우만 받는 것은 아니다. 그는 정반대의 대우도 감수하고 있다. 조용히 수절 과부의 길을 걷지 않고 집 밖으로 나와 의원 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세상의 손가락질을 당한다. 양반가 사람들은 그를 정중하게 예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면박을 준다.
 
드라마 속 서은우가 당대의 성윤리에서 벗어난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드라마 속 양반들은 수절 규범을 어긴 과부인양 그를 취급한다. 서은우는 '열녀가 되라'는 사회적 압력하에 놓였던 조선시대 여성들의 처지를 반영한다.
 
여성의 수절에 대한 요구는 고려시대에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 음력으로 태종 6년 6월 9일자(양력 1406년 6월 24일자) <태종실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날짜 실록에는 지금의 검찰총장인 대사헌 허응이 '사대부가의 정실부인이 세 번 혼인하면 고려시대처럼 <자녀안(恣女案)>에 등재해 제재를 가하자'고 건의해 재가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삼혼'하는 부인들을 '부도덕 여성 명단' 혹은 '방자한 여성 명단'에 기록하고 불이익을 주자는 건의가 태종 이방원의 윤허를 받았던 것이다.
 
고려시대에 했던 것처럼 <자녀안>에 등재하자고 건의한 것을 보면, 사대부가나 그에 상응하는 가문의 여성이 세 번 결혼하면 법적 제약을 가하는 일이 고려시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수절에 대한 요구가 조선시대보다 약했다. 여성의 세 번째 혼인은 몰라도 두 번째 혼인은 제한을 받지 않았다.
 
이 점은 그 어느 가문보다 체면과 위신을 중시한 고려 왕실의 결혼에서도 확인된다. 제6대 성종의 부인인 문덕왕후 유씨의 사례가 이를 보여준다.
 
과거제 시행으로 유명한 제4대 광종의 딸인 문덕왕후 유씨는 아버지의 성이 아닌 할머니의 성을 따라 유씨가 됐다. 그는 사촌인 성종과 결혼하기 전에 혼인을 한 경력이 있었다. <고려사> 성종 후비(后妃) 열전은 "처음에는 홍덕원군에게 갔다가 나중에 성종과 짝을 이뤘다"고 말한다. 또 다른 사촌인 홍덕원군 왕규와 결혼했다가 그 뒤 성종과 재혼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중전이 왕후로도 불리고 왕비로도 불렸다. 하지만, <고려사> 후비 열전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후(后)만 임금의 정실부인이고 비(妃)는 첩인 후궁이었다.
 
문덕왕후는 '비'가 아니라 '후'였다. 여성의 재혼이 흠집이 되고 여성의 수절에 대한 요구가 조선시대처럼 강했다면, 재혼녀가 중전이 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열녀가 되라'는 요구가 고려시대까지는 그리 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시대가 가고, 서은우 같은 여성들이 냉대를 받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치가 조선 성종 때인 1485년부터 시행된 <경국대전>이다.
 
이 법전의 예전(禮典) 편은 "범죄를 저질러 영구히 임용되지 못하게 된 자, 부정부패를 범한 관리의 아들, 재혼하거나 행실이 부도덕한 여인의 아들과 손자, 서얼 자손은 생원·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한다"라고 규정했다. 재혼녀의 아들과 손자는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재혼 자체를 금한 규정은 아니다. 하지만 재혼녀의 아들과 손자가 과거 응시를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자기 본인에 대한 제약보다 실질적으로 더 강력한 제약이 될 수도 있었다.
 
<경국대전> 규정은 '열녀가 되라'는 요구를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는 과거시험과 무관한 일반 대중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평민층 여성들의 재혼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은 여성의 재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천민층에도 존재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속에서도 적지 않은 여성들이 자기 길을 선택했다. 이 점은 열녀들이 표창을 받고 정려문이 세워지는 등의 요란스러운 분위기에서도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수절에 대한 요구가 철저히 관철됐다면, 국가와 사회 지도층이 그렇게 요란을 떨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금기를 대놓고 어기지는 못해도 편법 등으로 피해나가는 사례가 많았기에, 그런 표창 등이 필요했으리라고 볼 수 있다.
 
수절에 대한 요구가 엄격히 지켜지지 않았다는 점은 보쌈 풍습에서도 나타난다. 보쌈 피해자 중에는 남편을 사별한 여성들도 많았다. 이들에 대한 보쌉은 '과부 업어가기'로도 불렸다. 이 풍습은 실질적인 재혼 방식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보쌈 당할 여성 본인이 사전에 공모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1972년에 이화여대 출판부가 펴낸 최숙경·하현강의 <한국 여성사>는 이를 "변칙적인 재혼 풍속"으로 규정했다. 그런 뒤 "설사 관에서 이 사실을 안다 하더라도 묵인하였으며, 따라서 법적인 문제로 확대되지 않았다"라고 설명한다.
 
수절에 대한 요구에 순응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한국 여성사>에 소개된 어느 재상 가문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 이야기 속의 여성은 남편을 잃은 뒤 새로운 남성을 만나지는 않았지만, 수절과 재혼 금지가 얼마나 힘든지를 온몸으로 증명했다.
 
"옛날 어떤 재상가에 과부 딸이 살고 있었다"로 시작하는 이 일화 속의 재상은 매일 밤마다 집안을 순시한 뒤 잠에 든다. 어느 날 밤, 그는 홀로 사는 딸의 방에 등불이 켜 있고 "도란도란 속삭이는 말소리"가 들리는 것을 확인했다. 의아하게 여겨 방안을 몰래 들여다본 그는 "희한한 광경"을 목격하게 됐다.
 
"딸이 남복(男服)을 베개에 입혀 신랑처럼 꾸미고 마주앉아 정답게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윽고 불을 끄고 함께 잠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이 재상은 딸의 행복을 위해 왕조의 금기를 몰래 위반하기로 결심했다. "재상은 이 광경을 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몰래 딸을 재혼시켜 먼 지방에 가서 살게 하며 종적을 끊게 하였다"라고 <한국 여성사>는 말한다.

수절 요구가 잘 지켜지지 않았다는 점은 실학자 박지원의 풍자소설인 <호질>에도 반영돼 있다. 이 소설에는 동리자라는 수절 과부가 등장한다. 그는 천자와 제후들의 칭송을 받는 '모범적 여성'이다. 그런데 그의 아들 다섯은 아버지가 다 제각각이다.
 
'열녀가 되라'는 요구가 처음부터 과도했다는 점은 조선왕조의 규율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경국대전>이 재혼 자체를 금하지 못하고 아들의 과거 응시를 제약하는 우회적 방식을 선택한 것은 그런 요구가 애당초 비현실적임을 조선왕조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유세풍 2 열녀 수절 보쌈 여성 재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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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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