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소지섭, 강지환 주연의 <영화는 영화다>로 데뷔한 장훈 감독은 2010년 두 번째 영화 <의형제>를 통해 청룡영화상 최우수작품상과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감독상을 수상하며 일찌감치 뛰어난 연출력을 인정 받았다. 그리고 2017년 4번째 장편영화 <택시운전사>를 통해 대종상, 청룡영화상 최우수 작품상과 함께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파워와 작품성을 겸비한 감독으로 우뚝 섰다.

장훈 감독은 많은 감독들이 그렇듯 장편 영화를 연출하며 데뷔하기 전, 선배 감독 밑에서 연출부와 조감독으로 일하며 현장 경험을 쌓았다. 장훈 감독이 연출을 배웠던 선배는 바로 고 김기덕 감독이었다. 김기덕 감독은 지난 2018년 미투 운동의 가해자로 지목 받으며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지만 장훈 감독을 비롯해 <풍산개>의 전재홍 감독, <아이 캔 스피크>의 김현석 감독 등 많은 후배 영화감독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김기덕 감독의 제자 중에는 <해안선>의 연출부로 영화에 입문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사마리아> 등에서 조감독을 맡았던 장철수 감독도 있었다. 2006년 단편영화 <천국의 에스컬레이터>를 만들며 주목 받기 시작한 장철수 감독은 2010년 단 7억 원의 제작비로 만든 저예산 영화 한 편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미 개봉 전부터 칸 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청됐던 서영희 주연의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이었다.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개봉 전부터 칸 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청됐다.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개봉 전부터 칸 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청됐다. ⓒ 스폰지이엔티

 
고생스럽고 박복한 캐릭터 전문배우

대학시절 TV 재연프로그램과 연극을 통해 연기를 시작한 서영희는 2002년 박찬옥 감독의 <질투는 나의 힘>에 출연하며 영화에 데뷔했다. 2003년 곽재용 감독의 <클래식>에서는 손예진이 연기한 1960년대 여고생 주희의 절친 나희 역을 맡아 유쾌한 매력을 발산했고 2004년에는 동명의 연극을 영화화한 코미디영화 <라이어>에 출연했다. 

무난하게 커리어를 시작한 서영희는 2000년대 중반부터 고생길을 걷기 시작한다. <마파도>에서는 160억 원에 당첨된 복권종이를 들고 고향섬으로 숨어든 장끝순을 연기했고 실질적인 첫 주연작이었던 2006년 <스승의 은혜>에서는 피투성이가 된 흰색 원피스를 입고 포스터를 찍었다. 서영희는 2007년에 개봉했던 조선시대 궁궐을 배경으로 한 호러영화 <궁녀>에서도 역시 죽음을 면치 못했다.

2008년에 개봉한 영화 <추격자>에서는 '4885' 지영민(하정우 분)에게서 도망 나와 슈퍼에 숨어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관객들의 탄식을 불러 일으킨 개미슈퍼 아주머니의 오지랖 때문에 아까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덕만의 양어머니 소화를 연기했던 드라마 <선덕여왕>까지 죽음을 피하지 못했던 서영희는 2010년 데뷔 후 처음으로 영화의 단독 주인공을 맡았다. 장철수 감독의 장편 데뷔작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었다.

서영희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에서 고통스런 인생을 살아가는 김복남을 연기했다. 서영희가 몸을 사리지 않는 엄청난 열연을 펼친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개봉 전 칸 영화제에서 상영되며 주목을 받았다. 국내 극장가에서도 30개 상영관에서 개봉했다가 스크린이 123개까지 늘어나면서 전국 16만 관객으로 선전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을 통해 국내외 크고 작은 10여 개의 영화제에서 연기상을 수상한 서영희는 2015년과 2018년 코믹 스릴러 <탐정> 시리즈에 출연하며 연기변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2018년 <여곡성>에서 다시 귀신에 빙의해 사망하는 역할을 맡았고 작년 <공기살인>에서는 가습기살균제의 피해자 역을 맡기도 했다. 비록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지만 서영희는 여러 캐릭터를 두루 소화할 수 있는 훌륭한 배우다.

평생 학대 받은 여성이 저지른 피의 복수
 
 딸을 위해 온갖 학대를 참고 견디던 복남은 딸의 죽음 이후 이성을 잃고 피의 복수를 시작한다.

딸을 위해 온갖 학대를 참고 견디던 복남은 딸의 죽음 이후 이성을 잃고 피의 복수를 시작한다. ⓒ 스폰지이엔티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외지인의 출입이 드문 외딴 섬이라는 폐쇄된 사회에 갇힌 여성 김복남에게 벌어지는 끔찍한 학대와 이를 지켜 보기만 하는 주변 인물들의 무관심을 그린 작품이다. 복남(서영희 분)이 당하고 있는 학대를 도와줄 수 있는 친구 해원(지성원 분)이 각박한 도시생활에 지쳐 친구가 있는 섬으로 찾아오지만 해원 역시 섬에서 벌어진 사건들의 방관자가 되는 길을 선택한다.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은 '여성의 복수극'이라는 점에서 지난 2005년에 개봉했던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와 비교되기도 했다. 하지만 금자씨(이영애 분)에게 복수의 대상이 백선생(최민식 분) 한 명으로 명확했던 것과 달리 복남은 섬에 있는 마을 구성원 전원에게 학대를 받았기 때문에 복수의 대상이 더욱 광범위하다. 심지어 영화 후반에는 유일한 '내 편'으로 생각했던 해원마저 복수의 대상이 된다.

사실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은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지 않은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로 잔인한 장면들이 대단히 많이 나온다. 특히 복남의 시동생 철종(배성우 분)을 참수하는 장면은 상당히 끔찍하다. 하지만 보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후반부부터 시작되는 복남의 피비린내 나는 복수장면을 놓친다면 장철수 감독이 영화를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도 같이 놓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누가 뭐래도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을 봐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김복남을 연기한 서영희의 열연에 있다. 서울 태생의 서영희는 영화를 위해 직접 사투리를 익히고 촬영마다 몇 시간에 걸친 분장을 통해 김복남으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특히 남편 만종(박정학 분)과의 액션장면에서는 신들린 분노연기로 관객들을 놀라게 했는데 만종의 몸을 낮으로 난도질한 후 죽은 만종의 시체에 된장을 바르는 연기는 단연 압권이었다.

영화의 배경은 폐쇄된 가상의 섬 무도이지만 실제로는 전라남도 여수에 위치한 금오도에서 촬영했다. 실제 스태프들과 배우들은 촬영기간 동안 여수와 금오도를 수시로 오갔는데 높은 파도로 인한 뱃멀미로 고생이 매우 심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금오도가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 외에도 전도연과 박해일 주연의 멜로영화 <인어공주>의 촬영지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전혀 다른 성격과 장르의 영화가 같은 장소에서 촬영된 것이다.

친구의 편이 되지 못한 또 한 명의 방관자
 
 딸의 죽음을 목격한 해원은 경찰 앞에서 목격자가 아닌 방관자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딸의 죽음을 목격한 해원은 경찰 앞에서 목격자가 아닌 방관자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 스폰지이엔티

 
남편과 마을사람들의 학대에 참다 못한 복남은 딸 연희(이지은 분)를 데리고 탈출을 시도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배를 태워주는 득수(오용 분)가 일부러 시간을 끌면서 만종에게 잡힌다. 이 과정에서 엄마를 구하려던 연희가 만종에게 밀려 넘어지는 과정에서 돌부리에 머리를 부딪혀 뇌진탕으로 즉사한다. 그리고 이 장면을 복남의 친구 해원이 목격하는데 해원은 조사를 나온 경찰에게 방에서 자느라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거짓진술을 한다.

해원은 이성을 잃은 복남이 마을사람들을 살해하며 폭주하자 복남을 피해 뭍으로 도망 왔지만 복남이 파출소까지 쫓아오면서 위기에 처했다. 결국 해원은 총에 맞고도 자신에게 위협을 가하려던 복남의 목을 부러진 리코더로 찌른다. 해원을 연기한 지성원은 2000년대 <신돈> <연개소문> <이산> <자명고> 등 사극에서 주로 활동했고 2021년에는 KBS 2TV 주말 드라마 <오케이 광자매>에 출연했다.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박정학은 남성 우월주의와 변질된 유교적 전통을 가지고 아내 복남을 학대하는 남편 만종 역을 맡았다. 만종은 어머니를 때리지 말라고 말리는 딸 연희를 죽게 하고도 자신이 친아버지가 아니라고 발뺌을 하면서 복남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인간 쓰레기다. 결국 복남에게 칼에 찔리고 낫으로 난도질을 당하면서 등장인물들 중에서 가장 처참하게 최후를 맞는다.  

1960년대부터 성우로 활동했던 백수련은 만종과 철종의 고모이자 복남의 시고모 동호 할매를 연기했다. 남편인 만종이 복남을 성과 폭력으로 학대했다면 동호 할매는 심한 노동을 통해 복남을 학대하는 존재다. 동호 할매는 "집 안엔 남자가 1명 쯤은 있어야 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고 이성을 잃은 복남에게 쫓기면서도 남자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등 대단히 남성의존적이면서도 마을 최고 어른의 위치를 유지하려는 모순된 인물이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장철수 감독 서영희 지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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