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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 왕 1139 채, 빌라의 신 3493 채, 빌라 왕자 413 채. 거대 전세사기가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깨끗한 등기부, 공인중개사의 추천을 믿고 전세를 계약한 보통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보증금을 날리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하거나 대출금 변제를 위해 몸부림처야 하는 신세가 됐습니다. 치밀한 수법의 전세사기 개미지옥은 왜 생겼는지, 피해자의 목소리를 통해 연속 보도합니다. [편집자말]
배소현 전세사기피해자모임 대표.
 배소현 전세사기피해자모임 대표.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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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3시까지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연락이 와요. 저 또한 전세사기를 당해서 그 마음을 알기 때문에, 연락받을 수 있을 때까지 받아요. 여기에 이사 준비도 겹쳐서 하루에 3~4시간만 자고 있는데, 힘들더라고요. 다 끝나면 한번 앓아누울 것 같아요."

배소현씨는 하루 수십 통의 전화를 받는다. 여기에 더해 카카오톡 단체대화방 알림도 종일 울린다.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기자들의 연락도 많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허그) 쪽과는 '핫라인'으로 연결돼있다.

불과 3개월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배씨는 평범한 헤어 디자이너다. '근생'(근린생활시설)이라는 말도 몰랐다. 지난해 10월 집주인(임대인) '빌라왕' 김대성씨가 죽자 모든 게 바뀌었다. 전세사기피해자모임 대표로서 보도전문채널 생중계 인터뷰에 출연하고, 원희룡 국토해양부장관을 향해 대책을 따져 묻기도 했다.

1월 25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기자가 "생업이 바빠, 이런 일에 나서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라고 하자, 배씨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꼭 얘기해야 하는 성격이라 그렇게 됐다"고 답했다. 

전세사기 조심했는데도, 당했다

배소현씨 역시 '빌라왕' 김대성씨 전세사기 피해자다. 그는 2020년 10월 신혼집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을 비롯해 인천 부평구, 경기 부천·안양시 등지의 집 수십 채를 둘러봤다. 결국 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에 전세보증금 2억 5400만 원의 신축 빌라를 택했다. 배씨 부부는 당시 전세사기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꼼꼼하게 살펴보고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남편이 화곡동 세 모녀 전세사기 사건을 깊게 살펴봤어요. 당시 '배 째라' 식의 소액 전세사기가 많았을 때였어요. 등기부등본을 떼보고, HUG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보증) 가입 가능 여부를 물어봤어요. 그때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한 거죠. 계약서 쓴 날, 배고픈데도 확정일자를 받으러 (주민센터로) 달려갔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곧 집주인이 바뀌었다. '빌라왕' 김대성씨였다. 보증 가입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배씨 부부가 직접 HUG를 찾아가 보증에 가입하기로 했다. 그때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HUG가 김씨를 대신해 임차인에게 전세보증금을 대위변제를 한 적이 있는데, 이 금액을 아직 김씨로부터 회수하지 못한 상태였어요. 그래서 보증에 가입할 수 없었어요. 이후 다행히 김씨가 돈을 완납했는데, 그때는 또 '악성 임대인'으로 분류됐어요. 또 보증 가입을 거절당했죠. '보증 가입 못하면 진짜 큰일 나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은행을 통해 HUG 보증 가입이 가능했다. 그는 "(김씨가) 악성 임대인이라는 걸 알게 된 후로 빨리 탈출하려고 집을 내놓았다"면서 "곧 김씨의 세금체납 때문에 세무서에서 전셋집을 압류한 사실을 알게 됐다. 다만 보증에 가입돼 있으니, 마음을 놓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12세대 가운데 8세대 집주인이 전세사기꾼
 
경기도 수원 장안구 파장동에 위치한 다세대주택 정○베스트. 이곳 12가구 가운데 8가구가 전세사기 피해를 당했다.
 경기도 수원 장안구 파장동에 위치한 다세대주택 정○베스트. 이곳 12가구 가운데 8가구가 전세사기 피해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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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전세 계약 만기 직전, 집주인 '빌라왕' 김씨가 숨졌다. 상속 문제가 얽히면서 HUG의 전세보증금 반환 절차가 복잡해졌다. 수백만 원의 돈을 들여야 했다. 이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배씨가 살고 있는 빌라가 전세사기꾼들의 먹잇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곳 빌라에는 12세대가 있는데, 이 가운데 8세대의 집주인이 유명 전세사기꾼이었다. 배씨 전셋집을 포함해 5세대의 집주인은 '빌라 왕' 김씨 소유였고, 3세대는 '빌라의 신' 일당 소유였다. 모두 신혼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배씨는 빌라 사람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8세대 가운데, 5세대는 보증에 가입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한 신혼부부는 직접 매입을 통해 전세보증금보다 비싼 가격에 집을 떠안았다. 아파트 청약에 당첨됐는데 그 계약까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더 큰 문제는 아직 두 세대는 전세보증금을 받을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배씨 역시 전세보증금을 돌려받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남편은 시간을 내기 어려워 배씨가 나섰다. 빌라 왕 전세사기 피해자 네이버 카페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HUG에 찾아갔다.

"사람들과 전세사기 문제를 공론화할 방법에 대해 엄청 많이 이야기했었어요. 어떤 분은 국회의원들한테 메일을 하나하나씩 다 보내기로 했고, 저는 HUG를 찾아가기로 했어요. '핫라인'을 연결해달라고 해서, 피해자와 HUG가 소통할 수 있는 창구를 제가 마련하겠다고 한 거죠."

HUG에 방문했지만 큰 도움을 받지 못했다. 배씨는 "임대인이 사망한 경우,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하려면 상속대위등기를 해야 한다"면서 "HUG에 관련한 서비스가 있어 요청했더니, 못한다고 답했다"라고 밝혔다. "많은 피해자들이 앞으로 전세사기 사례가 더 많이 나올 텐데, 우리한테 이렇게 대응해도 되느냐고 했더니, 답변이 없었다"라고 덧붙였다.

HUG는 대표 한 명을 선임해달라고 했다. 나서는 이가 없자, 배씨가 나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엉엉 울었다. 그는 "막상 앞으로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에 대한 막막함도 있었고 부담감도 있었던 것 같다"라고 전했다.

이후 배씨는 보증 가입자뿐만 아니라 보증 미가입자 문제 해결에도 나서면서 더 바빠졌다. 현재 전세사기 피해자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에는 455명이 참여하고 있고, HUG 가입자 피해자 단체대화방에는 303명이 있다.

"전세사기, 그냥 누구나 당할 수 있다"

배씨는 지난해 12월 22일 전세보증금 피해 임차인 설명회 얘기를 꺼냈다.

"HUG에서 보증 가입 피해자한테 설명회를 한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냈어요. 피해자분들이 저한테 '대표님 혹시 알고 계시냐. 이거 뭐 어떻게 하는 거냐'라고 물어보더라고요. 스팸일 수 있으니까. 저도 몰랐던 일이라 허그에 연락했더니 국토부에서 내려온 거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관련 기사를 살펴보고 국토부 홈페이지를 뒤져 담당자 사무실번호로 전화했어요."

담당자가 없다는 얘기를 듣고 메모를 남겼다. 국토부에서 연락이 온 것은 이틀이 지난 후였다. 설명회 때는 더욱 실망감이 커졌다.

그는 "국토부와 HUG 관계자들이 하는 모든 말들은 피해자들이 이미 다 알고 있었던 내용이고, 새롭게 준비한 것 하나 없이 설명회를 개최했다는 사실에 너무 화가 났다"라고 말했다. 이미 경매 절차를 밟고 있는 피해자들이 많았는데, 국토부와 HUG는 이날 경매 절차 설명에 힘을 쏟았다. 

배씨는 원희룡 국토교통부장관을 두고 "구체적 대책이 없이 '그냥 다 해줄게요', '어떻게든 해줄게요' 하면서 저희를 어르고 달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면서 "내용도 모르면서 어떻게든 해결해 주겠다고 얘기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자신과 카톡을 하자면서, 저한테 명함 한 장 안 주고 갔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빌라 왕 김씨의 조세채권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씨의 63억 원 세금체납(정확히는 조세채권 법정일자) 후 그와 전세계약을 맺은 경우가 큰 문제다. 보증 가입을 할 수 없었고, 앞으로 공매 절차가 진행돼도 선순위 조세채권 탓에 전세보증금을 한 푼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배씨는 "앞으로 국토부뿐만 아니라 기획재정부 등 다른 기관과도 많은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는 많은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악성 댓글에 따른 2차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전세사기를 다룬 기사의 댓글창에는 '본인들이 잘 알아보지 않고 전세사기 당해놓고는 정부에 손 벌린다'는 내용의 댓글이 많이 올라온다.

배씨는 "그 사람들의 잘 모르고 하는 얘기가 지금 당장 진짜 길거리로 나앉게 되는 분들한테는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 말들인지를 전혀 모르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원희룡 장관이 전세사기를 예방하기 위해 등기부등본을 꼼꼼히 확인하고 보증보험 가입하라고 했는데, 저는 그런 거 다 했는데도 사기당했다"라고 지적했다.

"구옥 빌라 전세 들어갔다가 사기당한 분한테 얼마 전에 연락이 왔거든요. 입주한 지 이제 2주 됐어요. 집주인 연락이 안 된대요. 그러니까 지금도 계속 (전세사기가) 벌어지고 있어요. 전세 만기 후 집주인이 전세보증금을 돌려줄지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어요. 전세사기가 진짜 큰 사회적 문제예요. 재수 있고 없고가 아니라, 그냥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이에요."  
 
25일 촬영한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송죽동 일대 모습. 이곳에는 다세대 주택이 많아, 전세사기 사건이 빈번한 곳 가운데 하나다.
 25일 촬영한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송죽동 일대 모습. 이곳에는 다세대 주택이 많아, 전세사기 사건이 빈번한 곳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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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전세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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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법조팀 기자입니다. 제가 쓰는 한 문장 한 문장이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데에 필요한 소중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이나 페이스북 등으로 소통하고자 합니다.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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