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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자주독립 정신을 계승하고 독립운동의 의의를 선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순수 민간단체 '시민모임 독립'은 일본 근대의 뿌리를 살펴보기 위해 1월 13일부터 17일까지 규슈(九州) 지역을 다녀왔다. 규슈는 일본 열도 서쪽에 자리한 섬으로,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가까워서 우리와 역사적 인연이 깊은 곳이다. 아울러 일본 근대화의 초석을 다진 메이지(明治) 유신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이글은 이번 여정에 동행한 기자가 규슈지역 여러 곳을 돌아보고 느낀 점을 정리한 것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탐방기를 소개할 예정이다. [기자말]
하기(萩)는 야마구치현(山口縣) 북부에 있는 인구 4만 5천 명의 작은 도시다. 삼 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두 개의 강줄기가 도시를 가로질러 동해로 흘러 들어간다. 관광지도 아닌 이 소도시를 해마다 1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여기가 메이지 유신의 발원지 중 한 곳이며 일본 우익사상의 정신적 스승으로 칭송되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고향이다.

유적지가 많아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 5종이나 된다. 에도시대 말기, 쇼인이 설립한 사숙 쇼카손주쿠(松下村塾)도 그중 하나다. 한글로 작성된 안내문에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일찍이 이곳에서 공학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했고 여기서 공부한 학생들이 일본 근대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쇼인이 가르친 건 공학이 아니라 제국주의 세계관이다. 그는 봉건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이 지배하는 국가를 세워 일본이 아시아를 지배해야 한다는 주장을 설파했다. 그의 정치이념은 천황 아래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일군만민론(一君萬民論), 평범한 백성들이 궐기해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초망굴기론(草莽崛起論)으로 요약할 수 있다. 신분 타파와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강조하는, 당시로선 매우 혁명적인 발상이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그가 집필한 유수록(幽囚錄)에는 '일본이 중국과 조선을 정복해 국체를 단단히 했다면 서구 열강에 굴종하는 치욕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일본이 외세의 위협에서 벗어나려면 하루빨리 조선을 공격해 공물을 바치게 하고 대만과 만주를 포함한 대제국을 건설해야 한다'라는 주장이 담겨 있다. 다른 나라를 침략해 식민지로 만들고 그로부터 이득을 얻으려는, 전형적인 제국주의 세계관이다.

봉건 막부는 썩었으니 천황을 중심으로 강력한 왕권 국가를 수립해야 한다. 서구열강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면 강력한 무력을 키워야 한다. 한반도를 넘어 대륙을 향해 나가야 한다. 구체제를 타파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자는 그의 주장은 피 끓는 나이의 청년들에게 강렬한 울림으로 들렸을 것이다. '일타 강사'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을 얻고자 젊은 무사들이 그의 집으로 모인 이유다.

요시다 쇼인의 집으로 모여든 젊은 무사들
  
요시다 쇼인이 사숙을 만들고 운영한 내용이 적혀 있다.
▲ 일본 하기시, 쇼카손주쿠 앞에 설치된 안내판  요시다 쇼인이 사숙을 만들고 운영한 내용이 적혀 있다.
ⓒ 문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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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1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이곳을 거쳐 간 학생이 90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들 대다수가 하급 무사 출신이다. 한국인에게 사무라이(侍)의 이미지는 칼을 차고 다니는 무사로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은 단순한 칼잡이가 아니라 향교와 사숙 등 크고 작은 교육기관에서 유학을 공부한 지식인(士)으로 봐야 한다. 신분 질서가 빠르게 해체되면서 이들은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고,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칼 대신 책을 잡았다.

에도 시대의 이념적 토대는 중국에서 건너온 주자학(朱子學)이었다. 성리학적 이상사회는 수직적 상하 관계에 입각해 있었고, 이는 출신과 서열을 중시하는 중세 일본 사회에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가 발달하고 전통적인 위계질서가 흔들리면서 새로운 학문과 이념들이 속속 등장한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일본 고유의 유학이 발흥, 진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토(水戸)에서 시작된 국학이 대표적이다.

쇼인이 일본의 시각에서 맹자를 풀이한 것도, 고전의 힘을 빌려 정한론과 제국주의 이념을 구체화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뿌리는 유학(儒學)이고, 변화의 씨앗은 서구열강이 일본 열도를 침범하기 훨씬 이전부터 낡은 체제의 땅 밑에서 싹을 틔우고 있었던 셈이다. 그 토대 위에서 칼 찬 사대부, 책 읽는 사무라이들이 600년 이상 지속된 봉건 막부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대의 막을 열었다.

서당 안에 그에게 정신적 세례를 받은 인물들 사진이 붙어 있다. 유신 3걸 중 한 명인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일본 군국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조선 병참의 일등 공신 이토 히로부미, 초대 조선 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일본에선 메이지 유신을 이끈 영웅으로 추앙받을지 모르지만, 우리에겐 한반도를 침략한 원흉들일 뿐이다.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

쇼인은 약관 29살의 나이에 반역죄로 막부 정권에 의해 참수당한다. 하급 무사 출신인 그가 당대의 사무라이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모르지만, 20대의 어린 청년이 벽촌의 작은 서당에서 불과 1년 사이에 유신의 지도자 다수를 길러냈다는 해석은 과도해 보인다. 진실이 무엇이건, 극우 제국주의 이념을 설파하던 자리가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는 사실 앞에 슬픔과 분노가 느껴진다.

일제 침략전쟁을 이끈 A급 전범들이 합사되어있는 야스쿠니(靖國) 신사 위패 1호가 요시다 쇼인이다. 많은 일본인이 이곳 하기 시를 찾아 그의 생가를 돌아보고 신사에 들러 참배한다. 그의 고향 후배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도 그중 한 명이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정복하는 건 당연하고 또 필연적이라는 믿음을 설파한 이에게 수상이 존경을 표하는 모습은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잘 알아도 요시다 쇼인을 아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우리나라 국정교과서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일본에서 쇼인을 다룬 책이 천 권 넘게 출간된 것과 사뭇 대조적이다. 그는 짧은 생애를 강렬하게 살아냄으로써 유신을 정초(定礎)한 인물로 역사에 남았다.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간 영웅의 일대기를 좋아하는 정서 때문일까. 일본인의 마음에 그는 여전히 신화로 남아있다.
 
규슈지역 어디에서나 한글로 된 안내판을 쉽게 접할 수 있다.
▲ 이토 히로부미 구택으로 가는 길 안내판 규슈지역 어디에서나 한글로 된 안내판을 쉽게 접할 수 있다.
ⓒ 문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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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카손주쿠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이토 히로부미가 살았던 고택과 별관이 있다. 30평 남짓한 단층집으로, 국가 사적으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고택 옆 작은 공터에 이토의 동상이 서 있다. 이등박문(伊藤博文).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익숙한 이름이다. 을사늑약 후 초대 총감이 되어 한반도 강점에 앞장선 장본인이다. 조건반사처럼, 대한국인 안중근의 얼굴이 떠오른다. 두 사람은 역사 속에 하나의 고리로 묶여 있다.

별관 입구에 하기를 빛낸 다섯 명의 청년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서 있다. 에도 말기, 영국으로 밀항해 런던대학에서 공부한 이력을 가진 5명의 하급 무사들. '조슈 파이브'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일본 조폐국 설립자인 엔도 긴스케(遠藤謹助), 일본 철도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 일본 공학의 대부 야마오 요조(山尾庸三), 초대 내각 외무대신을 지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초대 내각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가 그들이다.

조슈번(長州藩)은 야마구치현(縣)의 옛 이름이다. 메이지 초기, 폐번치현(廃藩置県,1871년)으로 번이 현으로 바뀌었다. 천황을 받들고 외세를 배격하자는 존황양이(尊皇攘夷) 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 중 하나가 조슈번이었다. 사쓰마번(현 가고시마현)과 동맹(1866년)을 맺고 왕정복고 쿠데타를 일으켜 260년간 유지되던 도쿠가와 막부를 쓰러뜨린 후, 유신 시대를 열어간 양대 축이다.
 
일본 최초의 기병대를 창설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 하기시, 다카스기 신사쿠 동상 일본 최초의 기병대를 창설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 문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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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에는 요시다 쇼인 사숙과 신사 외에도 일본 우익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유신 3걸로 활약한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의 생가, 기병대를 창설해 4천 명의 결사대로 도쿠가와 막부 10만 대군을 격파한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의 탄생지, 쇼인이 죽고 뒤를 이어 막부 타도 운동을 이어가다가 자결한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의 탄생지가 이곳에 있다. 모두가 쇼인의 제자들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성하마을(castle town)을 둘러봤다. 막부시대 고급 무사들이 살던 주택과 담장이 원형 그대로 보전되어있는 곳이다. 마당 정원에 노란 감귤이 달린 나무들이 눈에 많이 띈다. 메이지 유신으로 사무라이 계급이 몰락하자 생계를 위해 감귤나무를 많이 심었고 그 전통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하기는 제주도와 위도가 비슷하다. 하기 해안가에 밀려온 최초의 감귤 씨앗은 제주에서 온 것인지도 모른다. 
 
에도시대 말기부터 심기 시작했다고 한다.
▲ 하기시 성하마을 주택가의 감귤나무 에도시대 말기부터 심기 시작했다고 한다.
ⓒ 문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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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현은 일본에서 정치 1번지로 불린다. 초대 내각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 아베 신조의 외조부이며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노부스케의 친동생으로 박정희 정권과 단돈 5억 달러의 배상금으로 일제 강점의 역사를 청산한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이들에게서 정치적 유산을 물려받은 아베 신조 등 이 지역에서 배출한 총리만 9명에 이른다. 한반도 강제 병합의 주역 10명 중 8명이 야마구치현 출신이다.

자민당(自民黨)으로 대표되는 일본 보수 우익세력의 뿌리는 넓고 깊다. 도쿠가와 막부가 망한 시점(18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1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일본 정치 생태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여전히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라 우기고, 제국주의 시절에 있었던 과거사는 이미 청산되었다고 강변하고, 위안부는 정부의 강압 없이 자발적으로 성매매로 뛰어든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왜 일본은 반성하지 않는가. 2차 세계대전의 주범인 독일은 유대인 희생자 위령비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는데 같은 전범인 일본에서는 수상이 야스쿠니 신사를 당당하게 참배하는 일이 벌어지는가. 가해자임에도 피해자 흉내를 내는 이유는 뭘까. 일본 사회가 과거 조상들이 벌인 침략 행위에 대해 통렬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과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찾는 작업은 간단치 않다. 이유가 무엇이건, 이 비틀린 역사의식의 뿌리에는 자신들이 아시아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우월감과 위험하기 짝이 없는 국가주의적 세계관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멀리는 임진왜란부터 가깝게는 일제강점기의 역사가 증명해주듯, 일본의 극우 세력은 언제든 요시다 쇼인이 남긴 글을 지렛대로 군국주의의 망령을 다시 키우려 할지 모른다. 매의 눈으로 지켜볼 일이다. 

태그:#일본 근대의 뿌리를 찾아서, #야마구치현, #하기시, #요시다 쇼인, #시민모임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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