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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종사 해탈문. 산 밑에서 해탈문까지 오르는 길이 매우 높고 가파르다. ⓒ 성낙선
 
서울에 오래 살다 보니, 수도권에 웬만한 곳은 거의 다 가 본 것 같다. 자동차를 타고 어디 가까운 곳에 잠깐 다녀올 곳이 없나 하고 찾아보면 마땅한 데가 없다. 여행지라고 알려진 곳은 거개가 다 한두 번은 다녀온 곳들이다. 더 이상 새로운 곳은 없어 보인다. 그러다 보면 결국 가본 곳을 또 가거나, 아니면 '별점'이 낮은 곳을 그냥 속는 셈 치고 다녀오거나 하는 수밖에...

그런데 간혹 여기에 이런 게 있었나 싶은 곳들도 있다. 이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던 여행지들이 볼거리나 놀거리 등에서 몇 가지 특이점이 강조돼 사람들 눈에 띄기 시작한 곳들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도로 사정이 나아지고 전철역이 새로 생기면서 접근성이 좋아진 것도 사람들의 발길을 끄는 요소 중에 하나로 작용한다. 남양주시에 있는 '수종사'도 그런 곳 중 하나다.

수종사는 애초 이번 여행의 목적지가 아니었다. 양평에 있는 유명산으로 등산을 가는 길에 잠시 들러갈 만한 곳을 찾다가 수종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알고 보니, 수종사는 사람들에게 꽤 많이 알려진 절이었다. 그동안 수종사를 모르고 살았던 게 의아할 정도로 유명했다. 수종사가 왜 그렇게 유명해진 걸까?
 
수종사 은행나무. 수령 500년. 그 너머로 멀리 두물머리가 내려다 보인다. 이날은 미세먼지가 심해 시야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 성낙선

그러니까 이번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유명산이었다. 수종사에 들렀다가 그날 밤 유명산 밑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다음 날 아침 가볍게 산에 오를 생각이었다. 그런데 날씨가 문제였다. 그날 밤을 자고 일어나 아침에 창밖을 내다보니, 사방이 온통 짙은 안개에 갇혀 있었다. 게다가 안개 사이로 비까지 내리면서 길이란 길이 모두 눈 녹은 물로 질척였다. 그 바람에 등산은 깨끗이 포기해야만 했다.

결국 유명산 밑에서 여행 계획을 다시 짤 수밖에 없었다. 기왕에 이렇게 된 거 수종사를 다녀온 걸 인연으로, 양평에 있는 절들을 몇 군데 돌아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먼저 용문산 밑에 있는 절, '사나사'가 떠올랐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용문산 하면 뒤따라 생각나는 절, '용문사'가 추가됐다. 이렇게 해서 이날 예정에 없던 사찰 여행이 시작됐다.
 
안개가 짙게 깔린 양평 사나사의 적막한 풍경. ⓒ 성낙선
 
수종사

수종사는 남양주시 운길산 산 중턱에 있는 절이다. 해발 400여 미터, 꽤 높은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다. 운길산 높이가 606미터니까, 산 정상까지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수종사를 찾는 사람들 중에 등산객들이 꽤 눈에 띈다. 산 정상까지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들렀다 가는 것이다.

절이 높은 위치에 있다 보니, 그곳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남다르다. 수종사에서 산 아래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하나가 되는 두물머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곳에서 보면, 두물머리가 왜 두물머리인지 확연히 알 수 있다. 요즘 수종사를 유명하게 만든 건 바로 이 풍경 때문이다. 그렇다고 수종사가 그냥 경치만 아름다운 절은 아니다.
 
조선시대 석탑인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사진 맨 오른쪽)과 정혜옹주 사리를 모신 수종사 사리탑(맨 왼쪽). ⓒ 성낙선

수종사는 유서가 깊은 절이다. 창건 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절에 태종의 딸인 정혜옹주의 부도가 있고, 또 세조와 관련이 있는 창건설화가 전해져 오는 걸로 보아 창건 연대가 1400년대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추측된다. 절은 왜소해 보이지만, 절이 간직한 역사는 결코 그렇지 않다. 이곳의 팔각오층석탑에서는 조선 전기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불상이 모두 30여 구가 발견됐다.

절 마당 한쪽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수령이 500년이다. 그 은행나무 밑에 서 있으려니, 절이 나무를 품은 건지 나무가 절을 품은 건지 모를 만큼 마음이 넉넉해지는 느낌이다. 수종사는 우리나라 차 문화를 지켜온 곳으로도 유명하다. 우리나라 다도를 정립한 초의선사가 수종사에 머무르던 정약용을 찾아와 함께 차를 마시곤 했다고 한다. 수종사가 경내에 무료 찻집을 운영하는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수종사까지 올라가는 길이 꽤 까다롭다. 시멘트 길이 끝까지 올라가지만, 상당히 좁고 가파르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 수 있다. 교행이 어렵다. 절이 높은 위치에 있다 보니, 그 길을 굳이 차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다. 모험을 해볼 생각이 아니라면, 차는 산길로 접어들기 전에 마을 어딘가 공터에 세워두고 올라가는 게 속이 편하다. 물론 가파른 산길을 두 발로 걸어 오르는 게 힘들긴 하다.
 
양평 사나사 대적광전. 동안거 백일 기도 현수막이 걸려 있다. ⓒ 성낙선
 
사나사

사나사는 양평 용문산 서쪽 산기슭에 위치한 절이다. 그렇게 잘 알려진 절이 아니다. 사나사라는 절 이름도 '사나사계곡'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계곡이 깊고 아름답다. 용문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맑고 풍부해 여름철 더위를 피하기 좋다. 계곡을 찾는 사람에 비해 사나사를 찾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렇다고 사나사를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역사로 따지면 수종사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창건연대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9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문화재도 적지 않다. '원증국사탑', '원증국사석종비'와 함께 고려시대 유물인 '용천리 삼층석탑' 등이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양평 용천리 삼층석탑. 고려시대 탑이다. 그 뒤로 원증국사탑과 원증국사 석종비가 보인다. ⓒ 성낙선
 
역사가 오래된 절들이 대체로 그렇듯 사나사도 꽤 상처가 깊다. 창건 이후,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중건과 재건을 거듭했다. 1337년 보우가 140여 칸 규모로 중건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절을 1608년 재건했다. 1907년에는 의병들이 활동하는 근거지라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절이 전부 불타 없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대웅전 등을 재건한 게 1993년이다.

사나사는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등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의병이 들고일어났을 당시, 용문사, 상원사 등과 함께 양평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장소다. 용문산이 산세가 험하고 계곡이 깊어 의병들이 활동하기에 적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양평 사람들은 자신들이 참여했던 항일 운동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의병 활동뿐만 아니다. 절 근처에 '양평 3.1운동 항쟁사'와 함께 일제가 우리 국권을 침탈했던 시기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명단이 빼곡히 적힌 입간판을 세웠다.
 
사나사, 3.1운동 당시 양평 지역에서 진행된 항쟁사를 날짜별로 기록한 입간판. ⓒ 성낙선
 
안개가 자욱한 날 아침, 사나사가 깊은 침묵에 잠겨 있다. 사람 그림자를 볼 수 없다. 절 전체가 겨울 한철 동안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계곡을 흘러 내려가는 물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깃발을 흔들며 함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물가에 서서 한동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참선에 들어간 승려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절을 떠난다.
 
사나사 담장과 용문산을 오르는 등산로. 그 옆으로 사나사계곡이 보인다. ⓒ 성낙선
 
용문사 일주문. ⓒ 성낙선
 
용문사

용문사는 두물머리와 함께 양평을 대표하는 여행지로 꼽힌다. 워낙 유명한 여행지라 용문사에 안 가본 사람이 드물 정도다. 용문사 은행나무를 모르는 사람은 더욱더 드물다. 사진으로든 동영상으로든, 어떻게든 한 번쯤은 봤을 법하다. 아예 은행나무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용문사 은행나무다.

내 경우 1996에 개봉된 <은행나무 침대>라는 영화를 통해 용문사 은행나무를 처음 접했다. 그때는 영화 속 은행나무가 용문사에 실재하는 은행나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세상에 그렇게 거대한 은행나무는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몇 년 후 용문사에 갔다가 그 은행나무를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용문사 은행나무. 수령 1100여 년. 국내 은행나무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다. 노거수인데도 여전히 매년 350kg 정도의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 성낙선
 
그동안 용문사를 세 번 이상은 다녀간 것 같다. 그런데도 용문사는 갈 때마다 새롭다. 겨울에 찾아가는 용문사는 처음이라 느낌이 또 다르다. 겨울에 보는 은행나무도 처음이다. 여름이나 가을에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잎을 모두 떨군 채 하늘을 향해 사방으로 뻗어나간 가지가 강철처럼 단단해 보인다.

천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고단하거나 힘겨운 기색 없이 여전히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놀랍다. 그 기운을 내려받으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은행나무를 둘러싼 울타리에 소원을 비는 노란 쪽지들이 수도 없이 달려 있다. 이 은행나무는 1907년 정미의병과 한국전쟁 당시 용문사 전체가 불탈 때도 무사히 살아남았다.
 
양평금동여래입상. 양평 지역에서 발견된 보물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됐다. 삼국시대 유물로 국보 제186호다. ⓒ 성낙선

용문사 관광단지 안에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이 있다. 그 건물 안에 양평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작은 전시장이 있는데 이곳에서 양평에서 출토된 '국보' 한 점(복제품)과 마주한다. 어른 손바닥 크기의 '양평금동여래입상'이다. 오랜 역사가 무색하게, 양평에서 발견된 보물들 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건 이 금동여래입상 한 점뿐이다.

이 입상도 양평의 용문사에서 발견된 게 아니라 양평 신화리의 한 폐사지에서 우연히 발견됐다고 한다. 그 사이 무슨 험한 일을 당했는지, 손과 발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몸통은 온통 긁힌 흔적으로 성한 곳이 거의 없다. 그런데도 그 얼굴에 아직 기품이 남아 있다. 그 폐사지에서는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짐작만 할 뿐이다. 외적의 침탈과 전쟁통에 우리 곁에서 사라진 보물이 얼마인지 알 수 없다.

이번 여행은 비록 계획에 없던 것이기는 해도 꽤 의미가 있었다. 절 마당을 거니는 동안 마음이 평온해지는 걸 느꼈다. 발이 무겁다 싶을 땐 절집 툇마루에 걸터앉아 적당히 시간을 보냈다. 온 세상이 하루 종일 안개에 갇혀 있는데도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햇빛 한 점 비친 적이 없는 데도 마음이 저절로 밝아졌다. 사찰 여행은 확실히 눈과 입이 즐거운 여행이라기보다는 마음이 즐거운 여행이다. 마음이 주인이 되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용문사 미소전. 유쾌한 얼굴의 나한상들. ⓒ 성낙선
 
태그:#수종사, #사나사, #용문사, #양평금동여래입상, #정미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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