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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저녁까지는 추위가 매섭더니 하룻밤 사이에 봄날이 됐다. 어제만 해도 렌터카의 앞 유리창에 얼음알갱이를 벗겨내느라 출발이 지체되었는데, 오늘은 성에조차 끼지 않았다. 날씨는 따뜻하고 하늘은 가을의 한 날처럼 높았다. 지리산 자락을 답사하는 데 안성맞춤일 듯싶었다.

어제는 대전과 대구라는 대도시에 인접한 골령골과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터를 답사했다. 찾는 이 아무도 없는 을씨년스러운 그곳에서 진상규명의 절실함과 시급함을 아이들과 공유했다. 이제 만시지탄일지언정 진상규명 후 정부에 의해 추모공원이 조성된 두 곳을 답사할 차례다.

'박정희'란 이름은 어디에 
 
거창군 신원면 주민 510명이 집단 살해된 박산골 학살터
 거창군 신원면 주민 510명이 집단 살해된 박산골 학살터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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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사건 추모공원에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거창은 우리나라에서 바다로부터의 거리가 가장 먼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심심산골이라 6.25 전쟁 전후 빨치산 활동의 주요 거점이 됐다. 거창을 비롯한 지리산 자락 곳곳에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것도 그래서다.

추모공원은 거창군 신원면 소재지에서 5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다. 719기의 묘비가 자리한 터 옆으로 위패 봉안각과 역사교육관 등이 세워져 있어 참배객을 맞는다. 추모탑과 광장, 주차장 등을 포함하면 규모가 상당하다. 걸어서 다 돌아보려면 족히 한두 시간은 필요하다.
 
산청 함양 사건 추모공원 입구의 추모탑. 거창 사건과 같은 시기에 벌어졌고, 학살을 자행한 부대도 동일하다.
 산청 함양 사건 추모공원 입구의 추모탑. 거창 사건과 같은 시기에 벌어졌고, 학살을 자행한 부대도 동일하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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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거창 사건의 진실에 다가서려면 추모공원보다 먼저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박산골 학살터와 탄량골 학살터, 거창 사건 희생자들이 한꺼번에 묻힌 옛 묘역 등을 참배한 뒤 추모공원에 찾아가는 동선이 맞춤한다. 신원면 소재지 전체가 학살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다.

주민 수백 명을 한데 모아놓고 무자비하게 학살한 현장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놀랍게도 마을 이름이 신원(神院)이라는 점마저 소름이 끼친다. 직역하면, '귀신들의 집'이라는 의미 아닌가. 1914년 주변 마을이 통합되면서 생겨난 이름이라지만, 수십 년 뒤의 일을 예언이라도 한 것처럼 공교롭다.

박산골에는 학살 당시 국군이 쏜 총탄 자국이 여러 바위에 그대로 남아있다. 시신은 차곡차곡 쌓여 불태워졌고, 훗날 누구의 유골인지 확인할 길이 없어 대강 남자와 여자, 아이들 것을 구분한 뒤 한데 묻었다. 그곳이 세 봉분만 덩그러니 남은 거창 사건의 옛 박산골 묘역이다.
 
5.16 군사 정변 직후 부서지고, 땅에 묻혔던 거창 박산골 묘역 위령비. 뒤쪽으로 남자묘와 여자묘, 소아묘가 있는데, 당시 유해를 훼손해 흙더미와 섞는 만행을 저질렀다.
 5.16 군사 정변 직후 부서지고, 땅에 묻혔던 거창 박산골 묘역 위령비. 뒤쪽으로 남자묘와 여자묘, 소아묘가 있는데, 당시 유해를 훼손해 흙더미와 섞는 만행을 저질렀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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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묘, 여자묘, 소아묘가 따로 조성된 박산골 묘역에는 거창 사건이 후대 어떻게 여겨졌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 있다. 부서지고, 넘어지고, 새겨진 글자조차 정으로 쪼아댄 위령비가 그것이다. 5.16 군사 정변 직후 정부는 거창 사건 희생자 유족회를 반국가단체로 낙인찍고 탄압했다.

위령비를 부수고 땅에 묻어버린 건 약과다. 정부는 각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갈아 흙더미와 섞어버렸다. 희생자의 유족들은 순식간에 빨갱이로 내몰리고 연좌제에 묶여 질곡의 삶을 견뎌야 했다. 통한의 삶을 그들이 비로소 입 밖으로 낼 수 있었던 건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있은 뒤다.

한 아이는 그곳에 세워진 안내판의 내용에 주목했다. 군사 독재정권의 무법적 행태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박정희라는 이름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5.16 군사쿠데타군'이라는 어색한 표현 대신 '박정희 정권'이라고 명시해야 옳다는 거다.

아이들은 박정희의 과오를 언급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다 보니 생겨난 우스꽝스러운 안내문이라고 해석했다. 적어도 이곳에선 지난 18대 대통령 선거 때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를 지지하지는 않았겠다는 한 아이의 말에 그냥 멋쩍게 웃었다. 다들 설마 하는 표정으로 맞장구쳤다.

그들 앞에서 이곳 거창이 지난 18대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가 압도적 표차로 야당 후보를 따돌린 지역이라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의식이 존재를 배반하는' 좋은 사례일 테지만, 자칫 아이들에게 정치의 환멸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어쩌면 오랜 세월 연좌제의 트라우마에 시달려온 이들의 본능적인 반응일 수도 있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진실이 밝혀지고 처벌 받았나요?' 의문을 품은 아이들
 
거창 사건 추모공원에서 생몰년원일이 동일한 묘비 앞을 한 아이가 떠나지 못하고 있다. 묘비의 주인은 태어나자마자 학살됐다는 뜻일 테다.
 거창 사건 추모공원에서 생몰년원일이 동일한 묘비 앞을 한 아이가 떠나지 못하고 있다. 묘비의 주인은 태어나자마자 학살됐다는 뜻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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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공원에 늘어선 묘비를 돌아보며 아이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719명의 희생자 중에 자신보다 어린 사람들이 태반이라는 점에서다. 서너 살배기 어린이도 부지기수고, 심지어 생몰년의 일자마저 동일한 경우도 있다며 혀를 내둘렀다. 곧,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했다는 뜻이다.

"저 어린이들이 어떻게 빨갱이일 수 있죠? 어떻게 빨치산과 내통했다고 단정할 수 있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화풀이하듯 마구잡이로 학살한 게 아니냐며 한목소리를 냈다. 답변 삼아, 그들에게 '빨갱이라서 죽인 게 아니라, 죽이고 나서 빨갱이로 만든 것'이라는 어느 역사학자의 말을 들려주었다. 검은 빗돌을 쓰다듬는 아이들의 손마다 분노의 핏줄이 서 있었다.

그들이 받은 충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곳을 나와 산청, 함양 사건 추모공원으로 가는 길가에 세워진 '거창 사건 합동 진상규명 조사단 방해 장소 표지석'의 내용을 읽고 이게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이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체 정부의 존재 이유가 뭐냐는 거다.
 
거창 사건 합동진상규명 조사단 방해 장소 표지석. 빨갱이로 변장한 국군이 매복해서 국회의원들에게 총격을 가한 장소에 세워졌다.
 거창 사건 합동진상규명 조사단 방해 장소 표지석. 빨갱이로 변장한 국군이 매복해서 국회의원들에게 총격을 가한 장소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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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지역의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조사단이 꾸려져 신원면 현장을 찾아가는 도중 괴한들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빨치산의 공격이라고 단정했지만, 실은 진상규명 활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우리 국군이 빨치산으로 변장해 저지른 소행이었음이 밝혀졌다.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왜곡하고 은폐하기 위한 이승만 정부의 천인공노할 만행이 드러난 것이다.

"진실이 밝혀진 뒤 관련자들은 엄벌을 받았나요?"

아이들로선 너무나 당연한 질문인데도, 그렇다고 답할 수 없어 난감했다. 당시 학살을 명령한 김종원 경남 계엄사령관과 실행한 오익경 제11연대장, 한동석 제3대대장 모두 무기에서 3년까지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곧 대통령 특사로 풀려나 되레 승승장구했다. 결국 엄벌은커녕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셈이 됐다.

그중에도 김종원의 생애는 아이들 앞에서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할 정도다. 일제 관동군 장교 출신의 악질 친일파로, 해방 후 이승만의 충복이 되어 민간인 학살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1948년 여순사건 당시 주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좌익 부역자라며 민간인을 일본도로 목을 내리쳐 죽인 장본인으로서, 온갖 만행에도 이승만 정부의 경찰 총수 자리까지 올랐다.

아이들의 일갈 '전국이 학살터였군요'

구절양장의 도로를 따라 지리산 자락을 한 시간 남짓 휘감아 오르면, 산청 함양 사건 추모공원에 닿는다. 고장의 이름만 달리할 뿐 거창 사건과 같은 시기에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가파른 비탈에 조성되었다는 것 말고는 거창 사건 추모공원과 형태와 분위기가 흡사하다.

이곳의 희생자들도 태반이 10대 아이들이다. 묘비에 적힌 이름으로 보아 가족과 친척이 몰살당한 경우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도 마을을 한꺼번에 도륙 낸 무차별 학살이 자행됐다는 뜻이다. 이웃한 두 고장에서 학살된 이들의 위패를 한데 모아놓았다는 게 거창 사건 추모공원과 다른 점이다.

"6.25 전쟁 전후 이곳 지리산 자락을 비롯해 전국 곳곳이 거대한 민간인 학살터였던 거군요."

한 아이가 이번 답사 여행을 매조지듯 말했다. 소감을 말한 거지만, 가감 없는 사실이다. 현재 조사와 발굴이 이뤄졌거나 진행 중인 곳들만도 수십 곳이니, 그의 말마따나 전국이 학살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과 북의 군인들이 서로 보복하듯 민간인을 살해했다는 증언과 기록으로 미루어, 지금까지 드러난 게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6.25 전쟁을 전황 위주로 다룬 역사 교과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전쟁을 승패의 관점에서 보면, 영문도 모른 채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죽음을 성찰할 여유가 없다는 깨달음을 공유했다. 6.25 전쟁을 좌우 이념이나 지배층의 시각에서 다루지 말고, 전란 속에 험한 삶을 산 민간인의 관점에서 기록되어야 한다는 한 아이의 지적에 무릎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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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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