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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목사
 김도현 목사
ⓒ 김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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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보강 : 6일 오전 11시 27분]

김도현 목사는 한국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가 1992년 스위스 국가교회의 한국담당 목사로 가게 됐다. 1993년 스위스에 살고 있던 한 한국계 입양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진다. 입양인은 스물 셋, 꽃다운 나이에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한 일이었다.

그는 스무 살 무렵에 이미 스위스에 살고 있는 여러 나라에서 온 입양인들의 삶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편집하고 출판을 했고, 스위스 국영방송에서 진행한 인터뷰 영상을 남겨두었다. 거기에는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삶의 고단함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이 충격적인 비극을 통해 김 목사는 "해외입양의 아름다움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 인종이 다른 국가 간 입양의 민낯을 그곳에서 보았"다고 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그는 스위스에 살고 있던 한국계 입양인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애환을 함께 하며,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분리와 상실"의 상흔을 품고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조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그때 만난 해외입양인 가운데 세 명이 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을 경험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영국 버밍엄대학교에서 <국제 간 아동입양과 한국의 친생모>란 논문을 썼다. 지난 2004년 귀국해 지금까지 서울 청운동 해외입양인 게스트하우스 <뿌리의집> 대표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올해 7월 <뿌리의집>은 청운동 생활을 마감하고 이사를 간다. 어떤 사연일까? 다음은 지난해 12월 29일부터 1월 3일까지 김도현 목사와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뿌리의집'이 다시 바톤을 이어받아 달릴 수 있길"

- 해외입양인센터 '뿌리의집'이 청운동 시대를 마감하고 이사를 나가야 한다는 소식 들었다. 처음에 어떤 사연으로 청운동 '뿌리의집'에서 사역을 시작했는지?

"해외입양인의 모국 방문을 조력하는, 비영리 게스트하우스 '뿌리의집'은 김길자 이사장(전 경인여자대학교 총장)이 사가(私家)를 무상으로 내어 놓고 2003년 7월에 개소했다. 모국을 방문하는 해외입양인들에게 환대의 공간을 마련한 것이었다.

20년 전 영국 버밍엄 대학교에서 해외입양과 한국의 친생모에 관한 논문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김길자 이사장이 연락을 해오셨다. 좋은 뜻으로 '뿌리의집'을 열었는데, 해외입양인들에 대한 이해도가 모자라,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한국으로 돌아와 좀 도와 줄 수 있겠느냐고 하셨다.

스위스국가교회의 목사로 일하는 동안, 베른과 제네바의 교민교회 목회와 병행해서 스위스에 살고 있던 한국계 입양인들과 애환을 함께 했고, 입양 관련 논문 작업도 거의 마무리가 되고 있어서 한국으로 돌아와 '뿌리의집' 일을 잠깐 돕기로 했다. 2004년 2월에 '뿌리의집'으로 들어왔는데, 결국 해외입양을 주제로 하는 삶 20년을 살았다."

- '뿌리의집'이 왜 이사를 나가야 하는지?

"앞에서 말한 김길자 이사장의 사가를 무상임대의 형식으로 사용한 지 올해 7월이면 20년이 된다. 서울 시내 한 복판이지만 호젓한 청운동에 자리 잡은 '뿌리의집' 20년은 충분히 감사하고 충분히 아름다웠다. 20년 동안 무상사용을 금전으로 환원하면 월세로만으로도 기십 억에 이른다. 그러나 사랑과 환대의 깊은 마음을 어찌 돈으로만 환산할 수 있으랴.

김길자 이사장 가족이 사적 소유를 사회적 선용에 내어 놓은 일은 20년으로 충분하다. 20년 사이 가족들의 삶에 변화가 있어, '뿌리의집'이 이사를 나가기로 했다. '뿌리의집'의 지속가능성은 시험대에 올랐지만, 또 다른 분들이 김길자 이사장이 바톤을 이어받아 달려주시기를 바라며, 이사 준비를 하고 있다. 아직 재원이 마련된 것도, 이사 갈 곳이 정해진 것도 아니다."

- 이사 나갈 재원 마련을 위해서, "'뿌리의집' 자선 전시회·유명애 화가 기증전"을 1월 4일부터 10일까지 압구정동 로이갤러리에 여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전시회를 여는 취지와 주요내용을 소개하면?

"앞에서 말한 대로, 올해 7월까지 '뿌리의집'은 청운동 게스트하우스를 떠나야 하고, 새로운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청운동 게스트하우스의 가장 중요한 유산 중에 하나가 해외입양인들이 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환대의 집이었다는 점이다. 비록 더 이상 숙박을 제공하지는 못해도, 환대의 공간은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다.

입양인들이 자주 모여 토론회도 열고, 입양 관련 다양한 모임들(시낭송회, 입양관련 도서 출판 관련 독서회, 음악회, 영화 상영회, 디너 모임)을 열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이 공간 뒤편에 자그마한 사무실이 있어서, 그동안 뿌리의집이 시민단체로서 해외입양 의제를 한국사회에 제시해온 일을 계속하고자 한다.

유명애 화가의 기증전은 바로 이러한 공간을 마련하는 기금으로 사용되게 될 것이다. 유명애 화가의 작품들은 우리의 일상의 삶을 따뜻하고 밝고 행복하게 해주는 영감(spirit)이 깃든 아름다운 작품들이다. 많은 분들이 전시회에 오셔서 작품도 감상하고, 혹 몇몇 분들은 작품을 구입해서 생활하시는 공간에 걸어두시면, 잔잔한 행복과 기쁨을 일상으로 초대하는 일이 되시리라고 확신한다. 이는 뿌리의집 공간 마련에 힘을 보태고, 우리 사회에서 해외입양의 그늘을 거두어내는 데 기여할 것이다."
 
유명애 화가
 유명애 화가
ⓒ 유명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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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애 화가는 누구이고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온 분인지?

"유명애 화가와 친분을 가꾸며 산 지가 열다섯 해를 넘고 있다. 내가 깊이 존경하는 분이시다. 남편 권태환 교수님은 서울대학교에서 사회학 교수를 하신 후 거의 20년 전에 은퇴하셨다. 유명애 화가도 어느덧 팔십을 내다보시는 원로 수채화가이시다.

부군이 서울대학교에 봉직하던 동안 봉천동에서 살면서 골목학교를 열고 아이들을 키우는 한편 화가로서도 왕성히 활동하셨다. 기독인으로서도 화가들과 함께 선교지를 방문하고, 그 지역의 어린이들에게 미술교육을 펼치고, 그들의 작품으로 전시회를 개최해주며, 선교사들의 사회적 지평을 열어주는 데 일조하시곤 하셨다.

은퇴 무렵, 두 분은 은퇴 후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숙고하신 끝에, 강원도 춘천 부근 김유정 문학관 뒤편, 금병산 기슭에 집을 지어 이주하셨다. 밭을 일구고 그림을 그리며 사셨다. 크게 지어진 집을 예예동산이라 이름 하시고, 전 세계에 흩어진 선교사들이 귀국하면 와서 편하게 비용을 내지 않고 머무시도록 하셨다. 18년 전에 시작하신 일인데, 그동안 다녀가신 선교사님들이 일만여 명에 이르신다고 하신다.

또, 금병산 기슭에 이주하신 후 거의 10년 동안은 그 부근 마을의 청소년들을 모아 그림교실을 열었다. 대부분이 취약가정의 아이들이었고, 무료였지만, 아이들을 정성스럽게 사랑하고 가르쳤고, 아이들의 자긍심을 일깨우는 차원에서 미술대회에 출전시켜 수상케 하는 일들도 여러 차례 있었다.

일흔이 넘었을 무렵,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중단하고, 춘천에서 전시를 위한 갤러리를 열고 지역 미술인들을 위한 무료 전시회를 열고 있다. 전시회를 여는 미술인들의 형편을 생각해 섬기는 교회의 도움을 받아 전시회 도록 제작을 해드리고 있기도 하다. 수많은 기부 전시회를 열었고, 장애인단체를 비롯한 많은 시민단체들을 돕고 계시기도 하다.

기부 전시회는 수익금의 일부는 작가에게, 나머지 일부는 기부 받는 단체에 귀속되지만, 유명애 화가는 전액 기부의 방식으로 기부전시회들을 열어 왔다. 이번에 여는 전시회도 전액 기부의 방식으로 열게 되었다. 말 그대로 유명애 화가는 물 흐르듯 사랑을 실천하시는 화가이시다. 노자의 말을 빌리면,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삶을 사시는 분이시다."

- 마지막으로 해외입양 문제에 왜 우리 정부와 사회구성원들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설명해주신다면? 

"해외입양은 한국 근대사에 깊은 상흔을 남긴 사건이다. 우리나라 스스로가 자국 아동에게 모국에서 성장할 기회를 빼앗은 사건이다. 물론 6·25 동란의 재난을 수습하던 과정에서 있었던 긴급구호시기의 입양까지 통틀어 비난할 수는 없지만, 산업화 시대의 대규모 아동 해외 송출에 대해 동의하기는 어렵다. 1980년대 10년 동안에는 아이 100명 당 한 아이를 송출했고, 연간 7000명에서 9000명에 이르는 아이들이 사실상 해외 위탁부모의 주소지로 떠나야 했다.

대부분의 아동들이 위탁부모들에 의해 입양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다른 가정이나 시설아동으로 전락하거나, 혹은 입양부모의 집에서 내쫓김을 당하고,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한 채로 살다가, 천애고아의 신분으로 다시 한국으로 추방되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 산업화 시대의 입양, 특히 1980년대의 해외입양은 사실상 국가의 사회정화(social purification) 정책과 입양기관의 산업화라는 쌍둥이 마차가 조직적으로 우리사회의 취약계층의 아동을 분리하고 송출한 시스템이었다.

한국이 해외입양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은 해외입양인을 향한 우리의 마음가짐을 바꾸어 먹는 일일 뿐만 아니라, 이 이 땅에 태어난 아동들에 대해서, 어른들로서 못할 짓을 했던, 우리의 모진 모습을 깨닫고, 우리 안에 아동들을 향한 부드러운 마음과 부드러운 살을 회복하는 일이다. 모국으로 돌아오는 해외입양인들을 환대하는 일을 통해 과거를 진정성 있게 수습하는 일에 나서야 하고, 이 땅에 도착하는 아동들에 대한 양육 거부에 다름 아니었던 해외입양을 극복해야 한다."

- 이번 전시회를 위해 갤러리 전시공간 역시 기부받으셨다고 하셨는데, 참 귀한 일인 것 같다.

"맞다. 강남구 압구정동에 있는 로이갤러리(압구정로 42길 24-6)가 사회공헌 사업의 일환으로 갤러리를 무상으로 제공해줬다. 사적 소유를 공적 가치를 위해 내어주신 로이갤러리에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표하고 싶다.

로이갤러리 양정승 대표는 '개관 이후 참신한 기획과 신진 작가 발굴 등 신진 갤러리의 역할에 대해 고민해온 로이갤러리가 뿌리의집과 함께 자선전시회에 참여하게 됐다'며 '기획전시와 작가 발굴로 문화산업 발전에 기여하고, 해외 입양인들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공헌 사업도 꾸준히 펼치겠다'라고 말해 주셨다."
 
자선 전시회 포스터
 자선 전시회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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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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