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23 21:56최종 업데이트 22.12.23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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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받아 들면 그때부터는 자꾸만 무엇에 종용당하는 기분이다. ⓒ 게티이미지


지난여름에는 아침을 수영장에서 시작했다. 정해놓은 분량의 원고를 오전 중에 완성하려면 뇌에 혈류가 돌아야 하고 그러자면 호흡이 빨라지는, 이른바 유산소운동이 필요했다.

50분 남짓 수영하고 나면 천연 도파민과 극심한 허기가 부상으로 주어졌다. 그렇게 한 차례 기운을 빼고 숱한 단어와 상념까지 몸에서 빠져나가면 허리가 휘는 것 같았다. '자동차였다면 주유등이 켜지고도 남을 텐데.' 그대로 책상에 엎드렸다. 저절로 눈이 감기고 세상에서 제일 배고픈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눈을 뜨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점심시간을 맞은 인근의 직장인 인파에 섞였다. -국, -탕, -밥, 돈가스, 중화요리로 끝나는 간판의 행렬이 끝없이 반복되는 우울한 식당가에서 그들은 삼삼오오 목적지를 찾아서 재빨리 흩어졌다. '빨리, 무난하게, 합리적으로 한 끼를 때우라'는 사인이 사람들을 잡아끌었다.

배는 고프나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고 반쯤은 포기한 채 한 곳을 골라 안으로 들어갔다. 친절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데, 운이 나쁜 날에는 적개심마저 느껴지는 표정으로 손님을 맞는 사장님 혹은 종업원과 맞닥뜨리곤 했다. 아마 그들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을 거다.

언젠가 서비스업 종사자의 고충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들도 처음엔 활달한 친절을 아끼지 않고 베풀었으나 소위 '진상 손님' 때문에 거듭해서 마음을 다쳤다. 그런 이후 서비스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두렵고 점점 퉁명스러운 표정과 말투를 방어막으로 삼다가 그게 설정값이 됐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대중식당은 현대인의 삐뚤어진 사회성이 불러온 악순환을 그대로 체험하는 장소 같다. 진상 손님으로 인한 성마른 서비스와 성마른 서비스가 부르는 진상 손님의 돌고 도는 악순환. 맛은 차치하고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자리에 앉기 전부터 오가는 메마른 정서와 퉁명스러움에서 읽히는 상처가 싫다. 

그렇게 냉대와 모멸을 견디면서 음식을 받아 들면 그때부터는 자꾸만 무엇에 종용당하는 기분이다. 즉각 느껴지는 맛, 빠른 만족, 빠른 배부름, 빠른 계산…. 나도 모르게 쫓기듯 밥 먹고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면 그저 동력을 잃지 않을 정도로만 연료가 필요했을 뿐인 처지가 서글퍼졌다. 

잠깐의 요기

아침 저녁이 우리말인 것과 다르게 점심(點心)은 한자어를 쓴다. 보통 '마음에 점을 찍듯 조금 먹는 끼니'라고 해석된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선조들은 아침과 저녁만 먹었다고 한다.

아침을 먹고 저녁까지 기다리자면 배가 아주 고팠을 텐데 점심을 건너뛴 이유는 단 하나, 먹을 게 없어서였다. 중국은 사정이 조금 나았는지 아침과 저녁 사이에 점심으로 요기라도 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전쟁 중에도 밥때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남송 시대 한세충이라는 명장의 아내 양홍옥이 굶주린 군사들을 위해 딤섬을 만들었다는 일화가 기록되어 전해진다. 그러니까 '딤섬'이라 불리는 음식은 이름 그대로 잠깐의 요기, 즉 점심을 의미한다.

중국식 만두인 샤오룽바오가 대표적인 딤섬이다. 또 완탕, 춘권, 심지어 에그타르트도 딤섬에 속한다. 하나같이 작은데 따뜻하고 확실하게 맛있다. 한 입만 베어 물어도 얼마든지 마음을 덥힐 수 있다.

그러나 재료를 구하기 어려운 전쟁 중에 장군의 아내가 겨우 만들어온 딤섬은 적어도 너무 적었다. 실망하는 군사들을 보면서 장군은 잠시 민망해하다가 되레 큰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이보게들, 이걸로 심장에 조그만 불씨를 지펴서 기운 차리시게!"

그러니까 점심의 진짜 의미는 '마음에 점을 찍는다'보다 '마음에 불을 붙인다'에 더 가깝다. 점심은 마음에 불을 붙일 불쏘시개이자 연료라고 할 수 있다.

영혼 없는 음식과 마주하면 심장에 불이 붙긴커녕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다. 내 고집도 만만찮아서 이 정도에 만족하라고 종용하는 음식에는 한 번도 만족한 적이 없다. 위를 채워도 사라지지 않는 이 근본적인 허기를 남들은 어떻게 감당하는 걸까. 
 

점심은 마음에 불을 붙일 불쏘시개이자 연료라고 할 수 있다. ⓒ 게티이미지


허기, 욕망, 불씨

그러다가 문득 시원찮은 불쏘시개나 연료 따위가 아니라 '이 마음이 불량인가'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한때 평생의 연인인 줄 알았던 남자와 하루에도 서너 번씩 불을 붙였다.

서울 광화문, 시청, 을지로의 좁은 골목길, 일본 후쿠오카, 오사카, 고베의 그 많은 식당, 카페, 술집을 헤집고 다니며 거리를 배회했다. 나는 소설을 쓰겠다고 벌이를 중단했고 그는 이제 막 유학에서 돌아온 빈털터리였는데 우리에게 돈이 없다는 사실조차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정말 돈이 없다는 깨달음, 계속 날아오는 인생의 독촉장도 무서웠지만 그보다 무서운 건 서로의 마음이었다. 단순한 허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위로 오르고 싶은 욕망, 영원히 내 이름으로 살고 싶은 욕망. 헌신은 너무 어려웠고 각자의 욕망대로 살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모습은 결국 욕망이 추구하는 형상을 갖추게 된다는 걸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당나라의 덕산은 금강경에 통달한, 이름 높은 승려였다. 호남성에 사는 고승에게 법거량(깨달음을 두고 치열하게 공방하는 일)을 청할 요량으로 걸망 하나 둘러매고 길을 나섰다. 도중에 배고픔에 굶주린 덕산은 바로 옆에서 풍기는 빈대떡 냄새를 맡고 마음이 동했다. 빈대떡을 팔던 노파가 물었다.

"뒤에 짊어진 건 뭡니까?"
"금강경이라는 경전일세."

노파는 덕산에게 자신이 묻는 말에 대답만 잘하면 빈대떡을 공짜로 주겠다고 했다. 덕산은 금강경이라면 어느 구절을 묻더라도 자신 있었다. 

"스님, 금강경에 이런 구절이 있지요. 과거의 마음도 현재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덕산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그러면 그대는 어느 마음에 점(點)을 할 것이요?"

식어가는 밥을 앞에 두고 지금 마음에 들어찬 게 허기인지, 욕망인지, 아니면 얼마쯤은 살아있는 불씨인지 헤아려 본다. 과거의 마음도, 현재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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