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16 22:31최종 업데이트 22.12.16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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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강제동원)이나 위안부 문제에서 미국은 중재자처럼 보인다. 그런데 미국의 중재는 문제 해결을 위한 중재가 아니라 관계 파탄을 막는 중재다. 이는 식민지배 해결을 억제하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실상 일본에 편향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양상은 동해 표기나 독도 영유권과 관련해서도 나타난다. 중앙정보부(CIA)가 현지 시각 지난 6일 업그레이드한 동아시아 지도에서도 그런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12월 6일 업데이트된 CIA 월드 팩트북 홈페이지에 게시된 지도를 보면,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돼 있다. 한국의 서쪽 바다는 황해, 남쪽 바다는 동중국해로 돼 있다. 삼면이 바다인 한국이 온통 외국 바다 명칭들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 CIA 월드팩트북

 

업그레이드 CIA 지도에 표기된 일본해와 리앙쿠르

민간단체 반크를 비롯한 한국인들은 CIA 지도에 표기된 일본해를 동해로 바꿔달라고 촉구해왔다. 하지만, CIA는 이 표기를 그대로 유지하는 지도를 내놓았다. CIA 월드 팩트북 홈페이지에 게시된 지도를 보면,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돼 있다. 한국의 서쪽 바다는 황해, 남쪽 바다는 동중국해로 돼 있다. 삼면이 바다인 한국이 온통 외국 바다 명칭들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3·1운동이 벌어진 1919년에 개최된 국제수로회의를 계기로 일본해 표현이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하지만, 2020년 11월에 국제수로기구(IHO)가 바다 명칭을 번호로 표기하는 방안에 합의했기 때문에, 미국이 일본 눈치를 덜 보고 명칭 변경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도 미국은 성의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두 나라 사이에 놓인 바다의 명칭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양국간 어업 협상이나 어민들의 기싸움이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양국관계 전반이 음으로 양으로 영향을 받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도 미국은 일본에 편향된 태도를 시정하지 않고 있다.

미국의 핵심적인 세계전략 중 하나는 한·일 양국을 앞세워 북한과 중국·러시아를 견제하는 것이다. 식민지배 문제로 등을 돌린 두 나라를 앞세워 세계전략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한·일 간의 감정 대립을 잘 알 수밖에 없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로 한미일 협력체제를 추구해온 미국이 동해 명칭이 두 나라 사이에서 얼마나 민감한지를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일관되게 일본해 명칭을 고수하고 있으니, 한·일 간의 공정한 중재자가 될 수 있는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CIA 지도 속의 일본해 표기 바로 밑에 리앙쿠르암(리앙쿠르 록스, Liancourt Rocks)이라는 표기가 있다. 언뜻 보면 중립적인 표현 같지만, 여기에 얽힌 역사를 살펴보면 이 역시 공정한 용어가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지난 6월 동북아역사재단이 발행하는 <영토해양연구> 제23호에 수록된 유미림 한아문화연구소장의 논문 '리앙쿠르 록스 명칭의 전승과 잔존의 역사적 배경'에 정리된 바에 따르면, 리앙쿠르 표현이 사용되기 전에 서양인들이 사용했던 이름이 있었다. 1787년에 동해를 항행한 프랑스 부솔호의 탑승자인 천문학자 다줄레는 독도를 중국어 발음인 챵찬(Tchiang-chan)으로 표기한 지도를 갖고 있었다.

리앙쿠르라는 이름이 나온 계기는 조선 헌종 때인 1849년에 있었다. 이해 1월 독도의 존재를 확인한 프랑스 포경선의 명칭이 이 섬의 서양 이름이 됐다. 한국에서는 이 명칭이 익숙하지 않지만 일본은 다르다. 일본은 19세기에도 이 표현을 사용했고 20세기 들어서도 한동안 그랬다. 위 논문에 이런 대목들이 있다.
 
"일본은 1905년 이후에도 한동안 리앙쿠르 열암으로 부르거나 다케시마와 병기했다."
"일본은 <환영 수로지>에서 '리양코루트 열암'을 표제어로 삼았고, 이는 일본이 1905년 독도를 불법으로 편입하기 전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전 세계의 수로를 다룬 <환영(寰瀛) 수로지>가 편찬된 것은 1880년대다. 이때도 일본인들이 독도를 리앙쿠르암으로 표기했다는 사실은 이 표현이 일본인들에게 얼마나 익숙했겠는지를 보여준다.

리앙쿠르가 일본 대중들 사이에서도 사용됐다는 점은 전 독도재단 비상근이사인 정태상 독도연구포럼 대표의 <독도문제의 진실>에 소개된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1901년 일본의 신문·잡지에서 갑자기 '앙코'라는 섬이 동해에 등장한다. 그것도 지도에도 없는 새로운 섬을 발견했다는 것이다"라며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은 흑룡회"였다고 말한다.

극우단체 흑룡회가 발간한 1901년 3월호 기관지 <회보>에서 '앙코섬 발견'이 크게 보도됐다고 위 책은 설명한다. 이 앙코가 바로 리앙쿠르다. 극우단체의 대중 홍보에 '앙코' 표현이 활용됐으니, 당시 일본인들에게 다케시마보다 앙코가 더 익숙했으리라고 볼 수 있다.
  

독도. ⓒ 경상북도

 
한국에 대한 예의

한국인들은 독도의 영어 표현으로 Dokdo를 요구해왔다. 그런데도 미국이 리앙쿠르 표현을 고수하는 것은 중립적이지 않다. 위 유미림 논문에 따르면, 미 국무부는 Dokdo 표현을 미군정(1945~1948) 때부터 알고 있었다고 한다. 또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에 주미대사로 임명된 양유찬도 Dokdo 표현의 사용을 미국에 요구했다.

그런데도 미국이 리앙쿠르 표현을 고수한 것을 두고 위 논문은 "미국이 접할 수 있는 정보는 주로 일본 측이 제공하는 정보였으므로 명칭에서도 일본의 영향이 클 수밖에 없었다"라고 평한다.

한국이 독도를 지배하고 있으므로 Dokdo로 표기하든가 아니면 리앙쿠르 옆에 병기하든가 하는 것이 한국에 대한 예의다. 그렇지 않으면, 객관성이 희박해진 리앙쿠르를 대신하는 제3의 용어를 모색하든가 해야 하는데도 미국은 그런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편향성은 1948년 6월 8일과 1952년 9월 15일의 독도 폭격에서도 나타난다. 한국이 독도를 회복한 지 얼마 안 돼 아직 어수선하던 그 당시, 일본은 독도를 재강점할 목적으로 미국에 어필하고 있었다.

1952년 1월 28일에는 패망 이후 최초로 '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을 제기했고, 동년 7월 26일에는 '군용시설과 구역에 관한 협정'을 체결해 독도를 미군 훈련구역으로 편입시켰다. 독도를 다시 강점하는 전 단계로, 미군이 이곳을 차지하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그런 시기에 미국은 군용기를 파견해 독도에 폭탄을 투하하고 기관총 사격을 퍼부었다. 한국 어민들을 몰아내기 위한 이 군사작전은 인명 피해를 초래했다. 1948년 폭격의 경우, 당시 언론에서는 사망자가 9명이나 16명이라고 보도됐지만, 2015년 2월 6일자 <대구일보>에서는 200명으로 보도됐다.

미국이 한국인들의 정서를 배려하지 않는다는 점은 지난 9월 30일의 일에서도 드러난다. 이날 독도 인근에서 벌어진 한미일 연합군사훈련을 주도한 측은 미국이다. 독도와 관련된 한·일 대립을 미군정 시절부터 잘 알아 독도 폭격까지 한 적이 있는 미국이 하필이면 독도 인근에서 한·일 양국의 합동훈련 기회를 만들었다. 주한미국대사관이 한국인들의 반미 동향을 면밀히 체크하는 상황에서도 이렇게 한 것이다.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같은 식민지배 문제뿐 아니라 동해 표기나 독도 영유권과 관련해서도 미국은 공정한 중재자의 자세를 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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