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일본에서 출생했으나 끝내 귀화를 거부하고 경계인으로 살며 제주도의 자연과 문화, 역사를 탐구했다.
▲ 생전의 유동룡 일본에서 출생했으나 끝내 귀화를 거부하고 경계인으로 살며 제주도의 자연과 문화, 역사를 탐구했다.
ⓒ 유동룡 미술관(이타미 준 뮤지엄) 제공

관련사진보기

 
 
모든 것에는 나름의 언어가 있다. 종이면 종이, 나무면 나무, 돌이면 돌, 모두들 말을 한다. 풍토에 적합한 조형물은 억지를 부려서는 안 된다. 살아있는 조형이란 그 풍토에서 빚어져 나온 것이라야 하므로 풍토의 정수를 찾아낼 필요가 있다.

요즘은 매끈매끈하고 반짝반짝하는 건축이 많으니 철저하게 무겁게 가보려 한다. 어떻게 하면 더 원초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가능하면 현대적이고 또 철학적일 수 있을까.

나는 풍토, 경치, 지역의 문맥 속에서 어떻게 본질을 뽑아 건축에 스며들게 할지를 생각한다.
 
풍토와 조화, 철학과 본질의 추구를 자신의 건축물에 구현하고자 평생을 바친 사람. 재일동포지만 귀화를 거부하고, 제주를 끔찍이도 사랑한 세계적인 건축가 고 유동룡(1937∼2011, 이타미 준)이 남긴 말이다. 전국적으로 특히, 아름다운 제주도의 자연이 난개발로 파괴돼 가고 있는 지금, 건축가 유동룡이 남긴 작품들에 감동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다.

국내외에 산재한 그의 작품 중에서도 포도호텔과 방주교회, 수(水)·풍(風)·석(石) 박물관, 두손 미술관, 핀크스 골프 클럽하우스 등 제주야말로 그의 대표작이 모인 '이타미 준 건축박물관'이라고 해도 좋겠다.

프랑스 예술문화 훈장 슈발리에 및 레지옹 도뇌르 훈장, 김수근 건축상,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 일본 최고의 건축상인 무라노 도고상 등을 수상한 세계적인 건축가라는 설명은 사실 군더더기 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제주에 와서 그의 작품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타미 준으로 널리 알려진 유동룡이 얼마나 위대한 건축가인가를 당장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동룡의 건축작품에 매료됐던 나에게 그의 작품세계를 전시하는 유동룡 미술관이 12월 6일 제주도에서 개관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더욱이 내가 즐겨 찾는 한림읍 저지리 예술인마을에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잔뜩 기대감을 품고 찾았다. 둥그렇게 곡선이 돋보이는 외관, 자연스럽게 입구로 끌어들이는 진입로, 2층으로 된 미술관은 외관부터가 이타미 준의 작품을 닮았다.
  
제주시 한림읍 저지리 예술인마을에 2022년 12월 6일 개관했다.
▲ 유동룡(이타미 준) 미술관 제주시 한림읍 저지리 예술인마을에 2022년 12월 6일 개관했다.
ⓒ 황의봉

관련사진보기

 
바람의 건축가

유동룡 미술관이 기획한 첫 번째 전시의 제목은 '바람의 건축가 이타미 준'. 건축가이자 예술가로 활동하며 그는 늘 자연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이 쓴 에세이에 "바람이 들려주는 노래에 집중하면 어떤 형상이 살아난다"라고 썼다. 제주도에 수·풍·석 박물관을 설계할 당시, 한 인터뷰에서 "요즘 내 몸속으로 제주의 바람이 불어요. 제주 사람의 상처를 보듬어준 동글동글한 오름의 선이 집으로 살아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궤적이 그 안에 있어요"라고 했다.

그는 바람의 건축가였다. 바람에 녹아든 지역의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전시작품들은 유동룡이 바람의 노래에 화답하는 마음으로 만든 작품 위주로 선정됐다.

2층 전시실로 들어서면 1970년부터 2011년까지, 최초의 작품이었던 어머니의 집부터 제주도에 있는 포도호텔 방주교회 수·풍·석 박물관 그리고 제주 국제영어도시 기념탑까지 그의 대표작들을 사진과 모형, 드로잉으로 보여준다. 연필로 스케치한 매우 간단한 개념도가 수정되고 구체화하는 과정, 도면에 이어 입체적인 모형, 실제로 완성한 건축물의 사진까지 한꺼번에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했다.

사실 오름을 형상화했다는 포도호텔이나 구약성서에 나오는 방주를 연상케 하는 방주교회 같은 유동룡의 작품을 실물로 감상할 때는 그 신선한 발상과 자연 속에 녹아든 조형미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하며 시시각각 변하는 제주도 하늘의 다이내믹함을 표현한 건축물
▲ 방주교회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하며 시시각각 변하는 제주도 하늘의 다이내믹함을 표현한 건축물
ⓒ 황의봉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막상 그 건축물의 탄생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물은 의외로 난해했다. 건축 전공자가 아니라면 수많은 드로잉과 도면의 전개 과정이 복잡하게만 여겨질 수 있을 듯하다. 미술관이라고는 하지만 회화나 조각품을 전시한 곳이 아니고 '건축'을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4명의 서로 다른 매력을 지닌 목소리의 오디오 도슨트(전시물 해설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철학적이고 개념적인 유동룡의 언어를 대중적 언어로 각색하고 다양한 세대가 공감할 수 있도록 4명의 대중문화 아티스트와 협업한 것이다. 배우 문소리와 정우성이 한국어 도슨트를 맡고, 영어 도슨트도 준비돼 있다. 두 배우의 오디오 도슨트는 전시 현장에서뿐만 아니라 유동룡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언제든지 감상할 수 있으며, 네이버 바이브(VIBE) 앱에서도 무료로 들을 수 있다.

포도호텔의 도슨트 해설을 들어보자.
 
제주 오름을 동글동글한 선 그리고 넝쿨 모양의 포도에 빗대어 설계한 호텔, 전통 판소리의 흐름과 '담기다' '잠재하다' '해방' '열다' '닿다' '혼재하다'와 같은 언어를 공간적 개념으로 발전시킨 작품, 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공간을 배치하기 위해 지면을 따라 형성되는 마을처럼 방과 방을 연결하는 중앙 통로를 두었고 이를 따라 낮은 계단을 놓았다, 바람을 막기 위해 쌓은 돌 자른 벽돌이 섞인 벽 지붕의 형태 부정형의 흐름 등으로 자연발생적인 작은 마을을 형상화했다.
  
제주 오름의 둥근 선과 넝쿨 모양의 포도에 빗대어 설계했다.
▲ 포도호텔 제주 오름의 둥근 선과 넝쿨 모양의 포도에 빗대어 설계했다.
ⓒ 유동룡미술관 제공:사진 JOON CHOI

관련사진보기

 

다른 전시실에서 98인치 대형화면으로 보여주는 그의 대표적 작품 사진들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수·풍·석 미술관의 바람이 부는 날 풍경, 비가 오는 날의 정취는 유동룡이 왜 바람의 건축가인지를 잘 보여준다. 문득 '바람의 사진작가 김영갑'이 생각났다. 김영갑의 오름 사진에서 바람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듯이 유동룡의 작품에서도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을 나무 틈새로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나는 경계인"

유동룡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보면서 그가 건축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철학자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없이 하늘로 치솟는 초대형 건물의 전성시대에 그는 낮게 자연에 스며들었다. 이익 추구에 여념이 없는 자본의 욕망 대신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조응하며, 지역의 풍토와 역사를 고민하면서 건축을 풀어갔던 유동룡이었다.

한국인으로 일본에서 태어나 예명으로 살 수밖에 없던 시절, 그는 한국에 처음 올 때 이용했던 오사카 이타미 국제공항에서 이름을 따올 정도로 경계를 초월하고 싶어 했고, 마치 선언과도 같이 "나는 경계인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정신적 뿌리인 한국의 역사, 전통, 문화를 탐구하고 수집하며 고유성을 잃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고, 마침내 '이타미 준'이라는 독자적인 세계를 완성했다. 건축은 물론 서예 조각 회화 같은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그의 오리지널리티가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제주의 지형이 타원형에 가깝다는 것을 의식해 건물 중앙의 타원형 입체를 강조했다.
▲ 핑크스 골프클럽하우스 제주의 지형이 타원형에 가깝다는 것을 의식해 건물 중앙의 타원형 입체를 강조했다.
ⓒ 황의봉

관련사진보기

 
그래서일까. 미술관을 설계한 유동룡의 딸이자 건축가인 유이화는 '전시에서 영감을 받아 개인의 오리지널리티 회복을 돕는 복합문화공간'을 표방하고 나섰다. 세상의 흐름에 영합하지 않고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던 유동룡의 작품을 통해 이 시대에 절실하게 필요한 본질의 힘을 회복하도록 돕는 공간이 되고자 한다는 것이다.

"제주도 바닷가에 조그만 작업실을 짓고 파도처럼 가고 싶다"고 했다는 유동룡. 끝내 귀화를 거부하고 재일동포가 아닌 한국인으로 살기를 원했던 유동룡. 한국 이름보다는 이타미 준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경계인이라기보다는 세계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이제 평생의 작품을 선보일 미술관 개관으로 비로소 모국으로 온전히 돌아온 셈이다. 해마다 바뀔 기획전시를 통해 유동룡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또 무엇을 보여줄까.
  
바람의 건축가 이타미 준이라는 주제에 맞춰 대표적인 작품들의 스케치, 모형, 사진 등을 전시하고 있다.
▲ 유동룡 미술관 전시실 바람의 건축가 이타미 준이라는 주제에 맞춰 대표적인 작품들의 스케치, 모형, 사진 등을 전시하고 있다.
ⓒ 유동룡 미술관 (이타미 준 뮤지엄)제공

관련사진보기

 
유동룡 미술관은 한림읍 저지리 예술인마을 내 연면적 약 675㎡ 규모로 3개의 전시실과 라이브러리 교육실, 아트숍과 티 라운지가 있다. 미술관 입장료는 3만 2000원이며 시그니처 티 1잔 무료 혹은 기념품과 교환할 수 있는 티켓이 제공된다. 12월 한 달은 개관기념 20% 할인 이벤트를 진행하며, 제주도민은 추가로 20%를 할인해준다. 제주도 내 건축 전공 학생들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초등학생들을 위한 건축 수업도 열릴 예정이다. 2023년 1월부터는 12월 말 오픈 예정인 네이버 예매사이트에서 사전에 예약 및 예매한 후에만 입장할 수 있다.                       

태그:#유동룡 미술관, #이타미 준, #포도호텔, #방주교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18년 봄 제주로 이주했다.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제주현대사의 아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