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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11일 오후 1시 42분]

"아니, 젊은 애 인생 망칠 일 있어요?"

몇 해 전의 일이다. 수능에서 만점을 받은 어느 고3 수험생과 점심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철이 일찍 들었고 눈에는 총기가 가득했다. 더욱이 고향 부산에 대한 애착도 상당했다. 수능시험에서 만점을 받았기에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로의 진학은 떼어 놓은 당상.

그와 그의 부모는 서울대 경영학과에 진학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그러지 말고 부산대학교에 입학원서를 넣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같이 식사하던 일행들이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느냐"며 쏘아붙였다.

뜻밖의 제안에 그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능 만점자가 지방대학에 가는 것이 과연 인생을 망치는 일인지는 지금도 납득 되지 않는다. 이 일이 있고 얼마 뒤 그는 '예정대로' 서울대 교문을 밟았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은 서울을 향한 우리의 열등의식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보여준다. 국어사전에는 '서울로 간다'는 뜻의 '상경(上京)' '귀경((歸京)'은 있으나, '지방으로 간다'는 단어는 없다. 서울 이외를 뭉뚱그려 '지방'이라 부르는 데서도 깊은 차별이 배어 있다.

하얀 얼굴과 외모, 복장, 말투 하나하나까지 귀티가 묻어나는 서울서 내려 온 윤 초시네 증손녀와 순박한 시골 소년의 만남을 다룬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묘사되듯 서울은 늘 세련되고 앞서가며 지방은 늘 어리숙하고 투박하다는 식의 이분법이 우리 사회를 지배해왔다.
 
서울대 정문
 서울대 정문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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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대한 뿌리 깊은 동경은 어쩌면 지역 토산물 가운데 최상품을 나랏님에게 바치던 옛 진상 문화에서 연유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최고의 진상품은 다름 아닌 사람이었을 터이다.

통신과 교통의 발전이 서울과 지방의 경계를 낮추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순진하다 못해 사기극에 가까웠다. 물리적 거리가 좁혀지자 서울은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지방의 양분을 빨아들이며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할 만큼 비대해졌다. 쭉정이가 된 지방에 더는 백약이 무효할 지경이다.

수능 만점자에게 지방대 진학을 권유한 필자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 수능 만점이라는 그 놀랍고 특별한 재능은 서울에 발을 들이는 순간 크립토나이트 앞에 선 슈퍼맨처럼 평범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는 부산도 아닌 그저 경상도에서 온 어느 유학생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니 수능 만점자에게 지방대 진학을 권유한 본질은 경계를 뛰어넘는 리더가 되어 서울과 지방의 벽을 허물어 달라는 당부였다(물론 현실은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내 의도를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몰랐을 것이고 알았다고 한들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 칼럼은 필자가 5~6년 전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지난 1월 부산의 한 지역신문 칼럼으로 쓴 글이다. 

그때 만난 그 수능만점자가 어느 대학에 진학할지는 오롯이 자신의 판단이고 자신의 몫임을 모르지 않는다. 필자는 그의 결정에 영향을 줄 만한 관계도 되지 못할 뿐더러 그럴 의도도 없었다. 다만 주제넘은 조언일지라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선택지' 하나를 던졌을 뿐이고, 이미 쓴 대로 그 자리에서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우리가 누리는 수많은 변화와 문명의 진보는 너무도 당연한 것들을 당연시 여기지 않은 작은 외침과 시도들이 쌓이면서 비롯되었다. 수능 만점자가 서울대에 가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는 당연한 일이나, 이것을 당연시 여기지 말아달라는 권유였을 뿐이다.

사회적 격차는 동서고금 어디에나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에 있어 서울과 지방의 격차는 위험 수준에 이르렀다. 세계지도를 놓고 보면 서울과 지방은 그저 한낱 점에 불과할 만큼 가깝지만, 우리에게 그 간극과 서열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장벽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내 말은 서울대학교에 진학해 서울에 뿌리 내려 개인의 꿈을 이루는 것도 소중하지만, 수능만점이라는 그 특별한 재능을 우리 사회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데 활용해달라는 당부였다. 서울 대신 지방을 선택하라는 조언은 단순히 서울이냐 지방이냐의 문제에 얽매이지 말고, 그 너머에 펼쳐질 장대한 비전을 봐달라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서울이 아닌 지방에 남아야 그 비전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서울과 지방이 조화를 이루는 큰 그림을 그리려면 수많은 점과 선이 필요한데 수능만점자의 붓질이라면 밑그림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몽상에 불과하지만, 수능 만점자가 지방에 남는 것이 대단한 이슈가 되지 않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 잘못일 수는 없다.

* 독자 의견에 해당 기사 원문이 지난 1월 부산의 한 지역 신문 오피니언 란에 실린 글이라는 지적이 있어 확인 후 기사를 수정·보강하였습니다. 

태그:#수능, #수능 만점, #지방대학, #수능만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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