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08 15:02최종 업데이트 22.12.08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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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9일(현지시간) 카타르 알레이얀의 아흐마드 빈 알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B조 3차전 웨일스와 잉글랜드 경기에서 잉글랜드의 마커스 래시퍼드가 세 번째 골을 넣은 후 기뻐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22 국제축구연맹(FIFA) 카타르 월드컵 잉글랜드 축구 대표팀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한 명 있다. 2021년 출판된 그의 첫 작품 <너는 챔피언>(You are a champion)은 20만 권 넘게 팔렸다. 올해는 <조찬 클럽 모험>(The Breakfast club Adventures)을 비롯해 세 권을 출간했다.

그는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 공격수이자 카타르 월드컵에서 현재까지 세 골을 기록 중인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 마커스 래시퍼드다. 지난해 6월에는 자신의 이름을 넣은 마커스 래시퍼드 북클럽까지 발족했다.


평범치 않은 이 선수의 행보에 공은 있었지만 빵과 책이 없던 유년 시절의 기억이 있다. 래시퍼드는 엘리트 선수 코스를 밟았다. 1997년 맨체스터에서 태어나 형과 집주변에서 공차며 놀다 다섯 살 때 지역 클럽에 입단하고 9살에 맨유 유소년 구단에 들어갔다. 16세 이하 대표팀에 발탁된 2012년 이후 대표팀에서 활약했고 2015년 18살 때부터 프리미어리그에서 뛰었다.

동시에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 최저 임금으로 5형제를 혼자 키웠던 어머니는 쉬지 않고 세가지의 일을 했지만 먹을 건 항상 부족했다. 책이 있을 자리가 없었다.   

가난했던 엘리트 축구 선수에게 2019년 말은 전환점이었다. 허리 부상으로 맨유 훈련에 참가할 수 없게 된 래시퍼드는 이웃 돕기에 나섰다. 어머니가 과거 크리스마스 때 푸드 뱅크에 줄 섰던 일을 기억하며 연말에 필요한 물건을 상자에 넣어 집 없는 이들에게 전달했다. 항상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빡빡한 축구 훈련 일정에 기회가 없었다며 부상을 기회로 삼았다.

몇 달 후인 2020년 상반기 코로나 봉쇄로 축구 경기가 취소되고 학교도 문을 닫자 무료 급식을 받는 아이들을 떠올렸다. 그는 저소득층 아동에게 무료 급식이 갖는 중요성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밥을
 

2021년 4월 7일 맨체스터에서 무료 식사를 지원하는 자선 단체인 페어쉐어는 보도자료를 통해 마커스 래시퍼드를 비롯한 여러 지원을 받아 1년 동안 1억 2850만 끼에 해당하는 음식을 나눌 수 있었다고 밝혔다. ⓒ 페어쉐어


래시퍼드는 맨체스터에서 무료 식사를 지원하는 자선 단체 페어쉐어를 찾아갔다. 처음에는 돈만 기부할 계획이었으나 그곳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좀 더 참여하기로 했다. 틈나는대로 직접 배달도 하고 모금 활동을 전개해 2000만 파운드(322억 원)를 모았다. 덕분에 매주 93만 개의 도시락을 배달했던 단체는 그 수를 200만 개까지 늘릴 수 있었다.

아동 빈곤 문제에 발을 들여놓게 된 래시퍼드의 다음 고민은 급식이 끊기는 여름 방학이었다. 코로나 봉쇄로 경제적 타격을 가장 크게 입는 사람들은 저소득층이었다. 래시퍼드는 방학 동안 무료 급식 연장을 요청하는 운동을 시작했으나 당시 보리스 존슨 내각은 거절했다. 래시퍼드는 6월 초 영국 하원 앞으로 공개 편지를 썼다.

"엄마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제도는 나 같은 가족이 성공할 수 있도록 만들어 있지 않다. 내 가족은 무료 급식과 조찬 클럽, 그리고 이웃들의 친절에 의존했다. 푸드 뱅크나 급식소는 내게 낯선 곳이 아니다. 나는 매년 크리스마스 저녁을 얻기 위해 노던 무어에 갔던 걸 선명히 기억한다."

생생한 경험에 기반한 3장짜리 편지는 강렬했다. 보수당 의원들도 고개를 끄덕였고 결국 존슨 내각도 입장을 선회해 여름 방학에도 저소득층 아동 무료 급식을 제공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해 10월 존슨 내각은 저소득층 아동 보조를 연장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도 래시퍼드는 다시 한번 목소리를 냈다. 시민 사회의 압박에 결국 보리스 존슨 총리는 11월 7일 래시퍼드에게 전화를 걸어 2020년 크리스마스 방학, 2021년 부활절 방학과 여름 방학까지 연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정부를 두 번이나 돌려세운 래시퍼드를 두고 당시 영국 사회는 '래시퍼드 2 - 존슨 0'으로 표현했다.

아이들에게 책을
 

마커스 래시퍼드가 칼 앙카와 함께 출간한 <너는 챔피언> ⓒ 맥밀란


2020년 말 래시퍼드의 관심은 아동 독서로 확대되었다. 38만 명의 어린이에게 책이 한 권도 없다는 2019년 영국문해력재단의 통계가 책이 없던 그의 어린 시절 기억을 건드린 것이다. 래시퍼드는 자신의 성장 과정이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2021년 3월 칼 앙카와 함께 <너는 챔피언>을 출판했다. 그리고 그해 6월 책 없는 어린이에게 책을 주는 북클럽을 결성한 래시퍼드는 이렇게 설명한다.

"오랫동안 독서의 즐거움은 책을 살 수 있는 경제적 능력에 따라 결정되었다. 여기서 제외되는 어린이들은 많은 경우 무료 급식을 받거나 조찬 클럽을 이용한다. 이들은 때때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논픽션이든 소설이든 누구보다 책이 필요하다."

맥밀란 출판사와 컨설팅 회사 KPMG가 후원하는 이 북클럽은 1년에 두 권을 선정해 2만 5000권씩 5만 권을 기부한다. 래시퍼드는 책 선정에 있어 계층, 인종, 종교, 젠더를 다양하게 대표했는가를 보겠다고 했다.

이 역시 래시퍼드의 독서 경험에 기인한다. 17살이 되어서야 스스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그는 책을 읽지 않았던 이유로 책보다 밥이 먼저였던 가정 형편도 있지만 "내 세계는 동화 속 세계와 거리가 멀었다"고 했다. 책의 등장인물 중 자기가 공감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책을 읽고 자신을 위해 쓰여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책을 주고 싶다고 했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세 권이 선정되었다. 가장 최근에 선정한 <조찬 클럽 모험 : 울타리 너머의 괴물>은 래시퍼드가 알렉스 팔라세-코야와 같이 공저로 이름을 올린 소설이다.

래시퍼드에 따르면 어렸을 때 저소득층 아동으로 갔던 조찬 클럽이 안식처였다고 한다. 그는 이 조찬 클럽이 "하루를 밝게 시작할 에너지를 주는 곳", "평생의 우정이 형성된 곳"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친구들과 꿈을 이야기하고 모험을 계획한 것은 자기 인생 최고 기억 중 하나라며 소설 속에서 자기가 경험했던 연대와 통합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시련의 2021년
 

영국 맨체스터 위팅턴에 내걸린 마커스 래시퍼드의 벽화가 유로 2020 결승전 승부차기 실축으로 훼손되자 그를 지지하는 이들이 응원 메시지를 붙이고 있다. ⓒ 플리커


저소득층 어린이에게 밥과 책을 주고자 한 래시퍼드의 활동은 큰 박수를 받았다. 2021년 윌리엄 왕세자로부터 영국에서 세 번째로 높은 대영제국훈장(Most Excellent Order of the British Empire)을 받았다. <타임>은 그를 차세대를 이끌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고 한 그라피티 작가는 래시퍼드 얼굴을 맨체스터 위팅턴의 거리에 벽화로 그렸다.

하지만 축구 선수로서 위기의 순간이 왔다. 2021년 여름 래시퍼드 어깨에 문제가 생겼으나 영국 대표로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 2020에 참가하기 위해 치료를 미뤘다. 결승까지 올라가 이탈리아와 맞붙었지만 연장전에서 승부를 내지 못했다. 래시퍼드를 포함한 대표팀의 젊은 피들이 승부차기에 나섰지만 실패하면서 준우승에 그쳤다.

이후 인종차별 언어폭력이 이들에게 쏟아졌고 맨체스터의 래시퍼드 벽화는 훼손되었다. 아동 독서나 무료 급식 같은 사회 운동은 집어치우고 축구나 열심히 하라는 비난도 쏟아졌다.

물론 래시퍼드를 보호하는 여론도 팽팽했다. 인종주의 공격과 벽화를 훼손시킨 것에 대해 분노한 시민들이 4만 파운드(6400만 원)를 벽화 수리 기금으로 마련해 전달했다. 래시퍼드는 자선 단체 페어쉐어에 기부했고 벽화의 원작자가 벽화를 다시 고쳤다.    

래시퍼드는 이후 심리적 위축과 부상 후유증으로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맨유에서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에 가려졌고 2022년 3월 국가 간 친선 경기를 위한 대표팀 소집에서 제외되었다.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가레스 사우스게이트 감독은 '객관적' 판단이라고 했다.  

이번 카타르 월드컵에서 사우스게이트 감독은 래시퍼드를 선발이 아닌 후반 교체 선수로 기용하고 있다. 하지만 짧은 출전 시간에도 래시퍼드는 세 골을 기록했고 감독은 "지난여름과는 완전히 다른 버전의 선수"라고 평했다.

오는 10일 월드컵 8강전에서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맞붙는다. 빵과 책으로 지난 2년간 저소득층 아동에게 큰 힘을 보탠 래시퍼드가 이번엔 공으로 환히 웃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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