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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소년들, 동요를 발표하다
 
1925년 봄 울산 출신의 서덕출(1906~1940)의 '봄편지'가 <어린이>에 실렸다. 윤석중은 나라를 잃은 일제하의 많은 어린이와 어른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 넣어 준 시로 평가했다. 이 동요는 북간도에 있던 윤극영에 의해 작곡돼 1927년 <어린이>  4월호에 재수록 되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또한 같은 해 10월 10일 '색동회' 주관의 첫 동요회에서 '봄편지'가 김영복의 독창으로 발표됐다. 이 때 사회를 보던 방정환이 서덕출의 장애를 소개하자 그를 격려하는 모금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서덕출의 장애가 알려지기 전에 지역 소년의 작품이 <어린이>에 실린 것은 큰 영향을 미쳤다.

신고송의 <어린이> 발표 작품은 언양의 소년들에게 동요 쓰기의 계기를 더 자극하였을 것이다. 당시 소년들이 잡지를 구독하였고, 소년운동단체 회원들은 당연히 돌려가며 잡지를 읽었다. 언양 지역 소년들에게 지역 출신이자 소년단원 선배가 동요작가로 등단함은 무척 고무적인 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신고송, 서덕출은 <어린이>에 등단함으로 기성시인으로 윤석중과 같이 동인 '기쁨사'를 만들어 활동했다.

1925년 11월 잡지 <어린이>에 '우체통'을 신고송이 발표한 이후에 또 쾌거가 언양소년단에 있었다. 김릉(金陵)청년회 대강당에서 12월 27, 8일 이틀 개최된 각지에서 도착한 문예전람(文藝展覽)에 대한 진열품은 200여 점에 가까웠다. 40여 원의 동정금도 모금됐다. 김천소년소년문예전람회에서 언양소년단의 조상갑이 4부 동요 부분에서 5등상을 수상했다. 당시 대구소년단의 윤복진은 작문에서 3등과 5등, 동요부분에서 1등과 3등을 또 하였다. 조상갑(趙相甲, 명치43년 10월생)은 언양 동부리 출신으로 언양공보 10회 졸업생(1925.03.24.졸)이다.

1926년 1월 중남소년단은 지난해 4월에 창간 출판하려다가 재정관계로 출판하지 못한 <소년회보>를 매월 등사판으로 발행하여 분배 혹은 회람하기로 하였다. 당시 다른 지역 소년운동 단체도 회보를 발행하였고 경찰에 의해 발행금지를 당하기도 하였다. 언양소녀(소년)회는 1926년 1월에 잡지 <검빗별> 창간호를 간행했으나, 그 후로는 경비문제가 있어 격월간으로 등사 발행하기로 하여 배부하기로 했다. 이러한 회보, 잡지의 발간은 소년들의 글짓기 능력을 향상시키고, 작품 발표 기회를 늘리고 작품 수준이 향상되는 계기가 됐다.

언양지역 소년운동단체는 가극회, 동요회, 강연회, 웅변회, 음악회 등 다양한 문화예술활동을 통해 소년들의 계몽과 의식향상을 도모했다. 1926년 7월 18일 저녁 언양공보교 대강당에서 제1회 언양시민강화회를 개최를 하였다 주최한 9개 단체에서는 '여름철(夏)의 위생(衛生)과 일상생활(日常生活)' 강연이 있었다. 언양의 소년소녀단체는 일본 유학하며 색동회원으로 활발히 활동 중이던 정인섭의 귀국을 계기로 그가 쓴 <어린이> 5월호에 게재된 '백로(白鷺)의 죽음(死)' 동화극을 준비하여 무대 공연을 하였다. 계속해 자유 강좌를 열어 3명의 열렬한 변론이 있고 난 뒤 저녁 10시에 폐회했다.

당시 정인섭은 신문연재에서 "동화는 아이들의 꿈나라라고 하면, 예술적 아동극은 그 꿈나라의 현실화요 체험의 왕국이다. 아동의 정서 교육의 극치는 여기까지 와야 한다. 예술교육의 완성은 정서교육을 주의(主意)로 함으로서 우미(優美)한 아동극은 예술교육의 최고형식이요, 인간성 교육에서는 가장 근본적 가치를 가졌다"라고 주장했다.

언양지역 소년들은 그들의 문학적 역량을 각종 잡지와 신문에 투고하면서 드러냈다. 당시 언양에 <조선일보> 지국이 있었기에 조선일보에 작품을 발표하는 것이 당연할 수 있었지만, 언양소년회원들의 작품은 동아일보에 1927년 전반기에 집중적으로 발표됐다. 1928년 이후는 조선일보에 작품이 더 많이 발표됐다.

일제 강점기 신문은 제대로 수익 구조를 갖추기 어려웠고, 문맹과 빈곤으로 독자들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실정이었다. 1930년에 문맹률은 77% 정도였고 실업률도 73%나 되었다. 당시 일반인은 임금 수준이 낮아서 신문구매가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수의 확장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기란 불가능했다.

<동아일보>는 1923년 지면을 8면으로 확대했다. 수익 창출의 돌파구 하나로 어린이 독자, 소년 독자를 확보하기 위해 그들의 글을 발표할 지면을 마련했다. <동아일보>는 1923년 8월부터 '동아문단 투고모집'을 했다. 그리고 신문 독자층의 정치적·사상적 요구에 부응해야 했기 때문에, 민간 신문들이 민족주의적 반일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1927년 하반기부터 조선일보에 동요가 게재되기 시작하였고 <동아일보>는 드물었다. 신문사의 독자 확보 차원과 함께 소년들의 작품은 신문 편집 방향과 작품 선정자의 관점이 반영돼 게재됐다.

오영수가 1967년에 <현대문학> 9월호에 쓴 '요람기'에 따르면, 언양지역은 "기차도 전기도 없었다. 라디오도 영화도 몰랐다. 그래도 소년은 고장 아이들과 함께 마냥 즐겁기만 했다. 봄이면 뻐꾸기 울음과 함께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고 가을이면 단풍과 감이 풍성하게 익는 물 맑고 바라 시원한 산간마을이었다." 일제식민시대였지만, 천진난만한 모습의 소년들이 동심을 갖고 살았다.

1927년 언양소녀회 오덕선과 언양소년단의 신태균, 문창준, 오영수, 오학근은 <동아일보>에 동시를 투고해 게재됐다. 그들은 그들이 소속된 소년운동 단체과 같이 이름이 신문에 실렸다.

1927년 1월 4일 <동아일보> '아동작품현상'에 시가(詩歌)부분에 2등으로 언양소녀회 오덕선(吳德先, 14세)의 '꿈'이 당선됐다. 오덕선(1911년생)은 언양공보 11회 졸업생으로 언양소년소녀동맹 검사위원을 지냈다.
 
-오덕선의 동요가 아동작품현상 공모에서 2등 당선하였다. 오덕선은 언양소년소년동맹에서 활동하였다. 동아일보(1927.01.04.)
▲ <언양소녀회> 출신 오덕선 동요 「꿈」 -오덕선의 동요가 아동작품현상 공모에서 2등 당선하였다. 오덕선은 언양소년소년동맹에서 활동하였다. 동아일보(1927.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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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밤에보든꿈이상하여요/ 보지못한서울을구경하엿고/ 돗지안흔나래로날너왓지요// 어제밤에보든꿈쓸쓸하드라/ 태산갓흔과자와맛난모시를/ 눈에보고못먹고꿈을깻지요// 어제밤에 본꿈은눈무나지요/ 도라가신아버지만나뵈옵고/ 반가운말못하고꿈을깻지요 (오덕선, '꿈')
 
1927년 2월 20일 <동아일보>의 '현상당선아동작품'에 언양소년단원 신태균(申泰均, 12세)은 '새양쥐'로 시가(詩歌)부분에 3등 입선했다.

새양쥐새양쥐/ 나히몇치냐/ 밤까먹는 새양쥐/ 나히몇치냐/ 동지파죽새알을/ 몇개먹엇나/ 새알만도밤만도/ 크지안코나
 
1927년 5월 1일 어린이날 <동아일보> 특집기사에 언양소년단원 문창준(文昌俊, 9세) 의 시 '새'와 오학근(吳學根, 11세)의 '갈때싹'이 실렸다.

문창준(1916년생)은 언양공보 14회(1929.3.23.) 졸업생으로 정인섭의 큰고모 아들이다. 그는 해방 후 백부 정인목과 같이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나섰지만 낙선했다. 그는 일본 교토입명관대학(京都立命館大学) 법과를 졸업하고, 한국무역해운회사대표를 지내고, 1960년 대한중석광업주식회사 사장이 됐다. 한국외국어대학 교수로 있을 때 브라질어과를 창설했고, 문창산업사장을 지냈다. 오학근(吳學根)은 언양공보 13회의 오학근(吳鶴根), 1913.12.31.생)과 동일 인물 여부를 알 수 없다. 문창근과 오학근, 두 명 모두 학적부 나이가 신문과 다르다.
 
새가새가우네/ 무근새가우나/ 참새들이운다네/ 짹잭짹잭 째잭잭// 새가새가 안젓네/ 어대어대안젓나/ 가지우에안젓네/ 짹잭짹잭 째잭잭" (문창준의 '새')
 
모래언덕에/ 적은갈대싹/ 바람이부니/ 살살파뭇친다/ 물가에소슨/ 적은갈대싹/ 물결이치니/ 살살파무친다 (오학근 '갈대싹')

 
- 오영수는 언양출신 문학소년 중에 성인이 되어서 단편소설가로 활동하였다. 동아일보(1927.05.25.).
▲ 언양소년단 출신 오영수의 동요 「병아리」 - 오영수는 언양출신 문학소년 중에 성인이 되어서 단편소설가로 활동하였다. 동아일보(1927.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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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5월 25일 언양소년단의 오영수의 '병아리'가 실렸다.
 
귀엽고도 사랑스런/ 우리집의 병아리는/ 삐욕삐욕 소래하며/ 어미밋흘 따름니다/ 심술구즌 소리개가/ 삐-호홀 소래치며/ 무서운 그 고양이가/ 양옹양옹 소래치면/ 병아리들 감짝놀나/ 어머니의 나래밋헤/ 못들엇가 야단이요
 
1928년 1월 1일 언양소년단의 박복순(朴福順)의 동시 '눈'이 <동아일보>에 게재됐다. 박복순(1914년생)은 언양공보 14회(1929.3) 출신으로, 부친은 이동개의 양부였다. 이동개는 언양소년단 간부로 항일독립운동가로 성장한 인물이다.
 
눈이 옴니다/ 저것이 모다/ 사탕이 라면/ 작히나 졸까// 마당의 눈은/ 옵바의 눈이고/ 들판의 눈은 압바의 눈이고/ 뚝위의 눈은/ 내눈이 란다

1927년 이후 언양지역 소년소녀들의 문학적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동아일보> 현상공모에 당선되고 투고작으로 게재된 이들 문학소년 중에 오영수만 유일하게 그 후 문학활동을 계속하였다. 오영수는 <조선일보>에 '술자신우리 아버지(1929.11.10.)', '눈마진내닭(1929.12.01.)'과 '뎐신대(1930.01.25.)'을, <동아일보>에 '박꼿아가씨(1929.10.25.)'를 발표했다.

그리고 언양 '오파침(吳波枕)'이란 필명이 오영수라면, <동아일보>에 '내동생(1930.01.19.)', '누나야 대답해라(1930.09.02.)'를, <조선일보>에 '쪼저진바싹(1930.03.14.)', '물주든아가시(1930.03.29.)'를 더 발표했다. 오영수가 오파침이란 필명으로 글을 발표한 이유가 동생 오호근의 '언양격문사건'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920년대 중반 언양의 정인섭과 신고송, 울산의 서덕출은 아동문학 황금기 한가운데에서 활동하였다. 그들은 1927년 여름 경성에서 온 윤석중과 함께 서덕출 집에서 만나 머물기도 하였다.
  
울산소년단체의 사회문화운동

1924년 7월 27일 오후 8시 울산청년회 주최로 청년회관에서 현상웅변대회가 열렸다. 연사 16명은 불교, 기독교, 천도교 소년군으로 불교소년단 권상호의 독창으로 개회되었다. 심사는 박병호, 이시완이 맡았다. 1등은 불교소년단 박태영, 2등 보통교 5년 임인수, 천도교소년단 박용구, 3등은 천도교소년단 김윤봉, 불교소년단 윤영순 차종출이었다.

1924년 8월 17일 울산불교소년단은 임시총회를 열고 당분간 사정으로 사무소를 울산청년회관으로 이전하고, 여름방학을 맞아 귀가한 유학생과 연합해 소년가극회를 8월 26일과 27일 이틀간 공연했다. 1925년 6월 21일 울산불교소년회는 울산청년화관에서 전울산탁구대회를 열었다. 참가비는 개인 40전이었다.

울산읍에 있는 천도교울산소년단에서는 '소년극단(少年劇團)'을 조직하여 1924년 12월 27일 저녁 8시경 언양에서 사회극인 '청년의 개심(改心)'과 종교극 '신생의 날'을 공연하고, 다음날 28일에는 상남면 거리 천도교 교회에서 공연했다.

1925년 7월 16일 울산성우회(蔚山城友會)와 울산소년회의 주최로 현상소년소녀동요동화대회가 열렸다. 심사위원은 방정환, 정순철이었다. 동화부문은 1등 '눈어두운 포수' 차종철, 2등 '용감한 소녀' 박영명, 3등 '흉년과 독수리' 서덕봉, '효의 평화' 김아단이었다.

동요부문은 1등 '내곳동모' 조덕희, 2등 '눈먼 닭' 김해성, 3등 '백일홍' 서계봉, '갈대살' 황덕송(황덕수), 등외 '별' 한봉금, '참새노래' 김말돌이었다. 울산에 온 방정환은 언양에도 둘러 언양소년단 조기회 활동을 봤다.

1925년 8월 13일 울산불교소년회 주최로 울산청년회관에서 음악연주회가 열렸다. 8월 20일 저녁 9시 <조선일보> 울산지국 주최, 울산청년회 후원의 울산웅변대회가 있었다. 소년부 1등은 '똑같은 재주' 박영호, 2등 '재미있는 예이야기' 임연수, 청년부 1등 안석주였다.

울산 출신의 서덕출 이외에 울산의 김인원(金仁元)이 1930년 이후 동시 5편을 발표하였다. '우리 닭(조선일보, 1930.11.26.)', '얼음편지(조선일보, 1930.12.7.)', '새벽 반달(조선일보, 1930.12.10.)', '까치야(조선일보, 1931.1.17.)', '허잽이(매일신보, 1934.01.30)'가 그것이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중에 '까치야'는 까치가 짖으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속설에도 불구하고 좁쌀 한 끼 없는 집이라 손님을 반갑게 맞이할 수 없는 딱한 사연을 읊고 있다.
 
- 김인원은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그후으 활동을 알 수 없다. 조선일보(1930.11.26.).
▲ 울산 소년 김인원의 동요 「우리 닭」 - 김인원은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그후으 활동을 알 수 없다. 조선일보(1930.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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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닭 깨어나는 일흔새벽네시죠/ 툭툭툭 나래치며 고함처명령하죠/ 우리닭 고흔닭은 저먼저일어나서/ 용감히 대장처럼 일하라명령하죠/ 늣잠쟁이 똥똥보 우리닭욕하구요/ 부지른 이수동이 우리닭칭찬하죠/ 우리닭 대장님이 용감히웨치면은/ 어둠은 실금실금쪽기여간답니다 (김인원, '우리 닭', 조선일보, 1930.11.26.)
 
돌사이에 곱게언 얼음떼서요/ 우표한장 붓처서 압강에 띄워/ 아지못할 나라로 흘러보내면/ 꽃닙피는 새봄이 찾어온대요 (김인원, '얼음편지', 조선일보, 1930.12.7.)
 
새벽한울 서산우에 걸린반달 는/ 고히고히 솔가지에 졸고잇지요/ 새벽한울 서산우에 조으는반달/ 지집간 엡문누나 눈썹가태요/ 우리누나 눈섭가튼 고흔반달은/ 새는날에 놀난 듯이 사라잔다오 (김인원, '새벽 반달', 조선일보, 1930.12.10.)
 
까치야 까치야 웨그리짖나/ 좁쌀밥 한끼도 없는이집에/ 먼손님 오시면 어찌하라고/ 철없는 까치야 짖지만마라 (김인원, '까치야', (조선일보, 1931.1.17.)
 
나락논에 허 잽 이 마음도 좃치/ 다떨어진 영감모자 눌여씨워도/ 실타소리 하지안고 옷기만하며/ 종일토록 굶 겨 도 말도업지요// 세상사라 어이그리 무심도할까/ 벽이삭이 다익도록 직혓스나/ 겨울바람 찬 바 람 부는이밤도/ 그냥논에 내 버 려 떨니우지요 (김인원, '허잽이', 매일신보, 1934.01.30.)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삼산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 오마이뉴스에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을 연재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이병길씨는 작가, 지역사연구가, 울산민예총 감사입니다. 이 기사는 <울산저널>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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