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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기욤 '막간극' 1915년
 알베르 기욤 '막간극' 1915년
ⓒ 구로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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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자리에 가든 대화를 나누다 보면 한두 사람이 툭 던지는 말이 있다. "뭐 재밌는 거 없나?" 이 말은 나이와 계층을 가리지 않는다.

청소년들도 친구들과 만났을 때 따분한 표정으로 내뱉고, 취업 준비에 여념이 없는 청년이나 바쁜 직장생활에 시달리는 중년·장년의 입에서도 나온다. 육아와 가사에 지친 주부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네 사는 모습같기도 한 재미없이 따분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표정을 전형적으로 담은 그림이 있다. 프랑스 화가 알베르 기욤(Albert Guillaume)의 '막간극'이다. 본 공연이 아닌 막간극 시간의 관람석의 모습인데, 막간극은 본 공연의 내용과 상관없이 막과 막 사이 또는 그 전후에 공연되는 아주 짧은 극을 뜻한다. 비는 시간을 채우고, 관객의 긴장을 풀어주는 목적이다. 

이 그림 속 관객은 하나같이 따분한 표정이다. 조금이라도 재미가 있었으면 지켜볼 텐데, 어느 한 사람 무대로 시선을 향하지 않는다. 여성들은 가방에서 실과 바늘을 꺼내 뜨개질을 하며 시간을 죽인다. 남성들은 더 무료한 표정인데, 한 사람은 신문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하는가 하면, 아예 의자에 기대어 졸기도 한다. 

우리의 현실이 대부분 이렇게 갑갑해 사람들은 습관처럼 "뭐 재밌는 거 없나?"라고 한다. 비슷한 사람들 속에 살면서 같은 일과 사건이 반복된다. 묻는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 말에 마땅한 대답을 찾기 어려운 자신을 발견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제 내가 무엇을 할 때 재미를 느끼는지조차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친구를 만나고, 나름 맛집을 찾아가기도 하지만 짧은 시간 재미 비슷한 느낌이 들다가도 곧 다시 심심해진다. 일에 몰두하여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면 심심함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봐도 큰 효과를 주지 못한다.

사람이 기계나 컴퓨터가 아닌 이상 아무리 바빠도 곳곳에 시간의 틈새가 있다. 그 짧은 시간에 문득 무료함이 찾아든다. 특히 밤이 되면 틈새가 더 넓어진다. 비록 하루 전체에서 그 틈새가 차지하는 양이 적다 하더라도 우리의 감정은 여기에 휘둘린다. 

왜 사는 게 재미없을까

사람마다 취향과 인생관이 다르기에 재미를 느끼는 계기도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이 무료함을 느끼는 조건이더라도 누군가는 즐거워할 수 있다. 그런데도 현실에서 다수가 자기 일상이 재미와 상관없다고 느낀다면 개인적인 요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재미의 여부가 일정하게 개인의 선택을 넘어선 사회적인 요인과 맞물려 있다고 봐야 한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이와 관련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여가의 현명한 이용은 문명과 교육으로 가능하다. 평생 장시간 일해 온 사람이 갑자기 일하지 않게 된다면 따분해질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상당한 양의 여가 없이는 최상의 많은 것에서 차단된다. (…) 현대의 인간은 모든 일이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자체를 목적으로 일하는 법이 없다. (…) 

농부들의 무도회는 외진 시골을 제외하곤 사라져 버렸지만, 그들을 도야시켜 주던 그 충동은 여전히 인간의 본성 속에 남아 있음이 분명하다. 도시 사람들의 즐거움은 대체로 수동적인 것으로 돼 버렸다."

러셀에 의하면 일단 상당한 양의 여가가 없을 때 따분함이 찾아온다.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 노동 자체도 힘들지만 이어지는 여가에서도 즐거움을 누리기 어려워진다. 실제로 장시간 노동이 이어질 때 여가는 일을 위한 충전의 의미에 머문다.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능동적인 활동으로서의 여가여야 한다. 하지만 늘 일에 지쳐 있는 상태라면 여가는 충전을 위한 휴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결국 러셀의 지적처럼 현대 도시인들의 여가는 주로 '수동적인 것'에 머물게 된다.

TV·영화를 보거나 외식, 혹은 야구·축구 등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는 방식인데, 아주 짧은 순간만 흥분을 동반한 재미를 줄 뿐이다. 이는 일상의 재미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게다가 여가가 일을 위한 충전의 성격을 가질 때 재미를 느낄 만큼 마음껏 즐기지 못한다.

러셀에 따르면 "현대의 인간은 모든 일이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재미 자체를 목적으로 할 때 재미가 찾아오는데, 현대인들은 생산적인 목적을 가져야만 의미가 있다고 배워왔다. 더 많은 일을 하지 못할 때 불안감이 스며든다. 재미에 빠져 있으면 무언가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든다. 일 중심의 사고와 삶의 방식에 찌들어 있으니 여가를 통해서도 재미를 느끼는 게 어렵다. 

행복해지기 위한 여가교육
 
브뤼헐 '농부의 춤' 1568년
 브뤼헐 '농부의 춤' 15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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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직업과 관련된 일은 합리성·효율성처럼 이성적인 태도와 연관돼 있다. 생각과 행동이 이성의 틀 내에 있을 때 우리의 일상을 규제하는 일의 관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게 당연하다. 재미는 이성보다 감성·충동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러셀이 "농부들의 무도회는 외진 시골을 제외하곤 사라져 버렸지만, 그들을 도야시켜 주던 그 충동은 여전히 인간의 본성 속에 남아 있음이 분명하다"라고 한 말의 의미를 되새겨볼 만하다. 

농부들의 무도회는 플랑드르 화가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hel)의 '농부의 춤'에서 특징을 엿볼 수 있다. 백파이프 연주에 맞춰 사람들이 몰려나와 신나는 춤판을 벌인다. 탁자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 술을 마신다. 중앙에서는 여러 남녀가 쌍을 맞춰 흥겨운 춤을 춘다. 오른쪽에는 춤판에 들어가려고 손을 잡고 헐레벌떡 뛰어가는 모습도 보인다. 

술을 마시는 행위는 합리적 사고로서의 이성의 끈을 느슨하게 하거나 내려놓고 감정의 지시에 맡기는 상태를 의미한다. 춤도 마찬가지다. 남의 시선에 신경 쓰고 체면을 얽매어있는 사람들은 선뜻 춤판에 나서지 못한다.

이성에 속박돼 있던 '정신줄'을 풀어 놓아야 스스럼없이 춤사위에 몸을 맡긴다. 탁자 뒤로 남녀가 서로 부둥켜안고 키스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본성에 자리잡은 감성과 욕구에 충실함을 보여준다. 감성이 꼭 술과 춤, 사랑으로 제한되지는 않는다. 음악·미술·문학 등 예술 분야에서 접하는 감성적 만족도 큰 즐거움을 준다.

예술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더 큰 재미를 위해서는 능동적으로 직접 창작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 러셀은 "여가의 현명한 이용은 문명과 교육으로 가능하다"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학교에서 노는 방법을 배운 적이 거의 없다. 결국 직업을 위한 교육이 중요한 만큼, 행복해지기 위한 여가 교육도 절실하다. 

어떤 분야에서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습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관람을 넘어 예술이나 스포츠 분야에 직접 행위 주체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더욱 그렇다. 사회적으로 여가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자기 스스로도 이를 찾아 나설 필요가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태그:#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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