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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을 완전무결하게 이해하고 싶다면 지방도를 완주하는 여행법이 적격이다. ⓒ 월간 옥이네
 
사람의 말단까지 파고들어 숨결과 영양소를 돌리는 실핏줄처럼, 지방도는 지역의 가장 내밀한 마을까지 인기척과 이야깃거리를 실어나른다.

충북 옥천을 완전무결하게 이해하고 싶다면 지방도를 완주하는 여행법이 적격이다. 크고 평탄한 길을 따라 주요 명소를 방문하는 흔한 '속독 여행'은 잊어버리자. 지도 속 복잡한 등고선 틈새마다 은닉된 명풍경과 가장 작은 지명들로 채워진 노변을 모조리 받아적어라. 여행자보다는 마치 순례객이 된 마음가짐이어야 좋다. 

촘촘한 '완독 여정'으로 감흥을 새겨넣기로 한다. 외진 이면도로 한 구간, 가녀린 물줄기 한 올 마다 깊은 눈썰미를 부여할 때 지방도는 '로드무비'처럼 완결되는 성장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골과 마루를 따라 강에 흘러드는 양저로

동이면 우산리와 청성면 묘금리를 잇는 금강로는 옥천터널을 지난 직후 묘금리에 닿아 575번 지방도를 몸에서 빼낸다. 575번 지방도는 청성면과 보은 남단을 꿰며 연결하는데, 그 첫 도로가 양저로다. 야트막한 골 사이로 편도 1차선 도로가 휘우듬하게 올라선다. 엑셀레이터에 제법 발을 오래 붙여야 수월하게 등정할 수 있지만, 경사가 급하지 않아 가을 옥천의 정취를 속속들이 필경하기 좋은 구간이다. 

양저대교를 넘어서면 본격적으로 강과 산이 주물러 뿌려둔 천혜의 경치가 시야를 점령한다. 보은에서부터 단풍빛을 물비늘에 이염하며 흘러온 보청천은 청성면 고당리에서 금강과 흐름을 합치는데, 여기에 딱 자리잡은 풍경 명당이 양저리 전원마을이다.
 
양저리 전원마을 풍경 ⓒ 월간 옥이네
 
마을을 마주하고 선 국사봉이 능선의 끝자락을 드리우고, 보청천 줄기가 울타리 치듯 주변을 부둥켜안은 품새가 어디 내놓아도 부족함 없을 절경을 빚어낸다. 무른 흙은 실려 가고 단단한 암맥만 남아 배후를 떠받든 산지가 아니었다면, 보청천은 이 마을 즈음해서 우각호로 모습을 바꿨을 터였다.

"마을 윗산까지 더 깊게 들어가면 일년 내내 안 마르는 웅덩이가 있거든. 거기다 농막 하나 짓고 휴양하려고 알아보던 사람도 있었는데, 요새는 안 보이대. 하여튼 여 사는 사람들 다 조용히 지내는 게 좋아. 경치가 좋은께 여름에 막 마을로 들어설라 허기도 혀. 그래서 입구 막아놓고 주민만 들이지."

총 다섯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 동네 주민은 주로 귀농·귀촌인이다. 워낙 휴양에 좋은 환경이라 피서객이 찾아올 때도 있지만, 강에 놓인 콘크리트 다리 안쪽부터는 외부인 출입 엄금이다. 주변에 마땅한 주차장도 없으니 마을로 발 들이지 말고 드라이브하며 풍경을 만끽하는 게 예의 바른 감상법이다. 그래도 노변에 잠시 차를 세운 채 광막한 하늘과 굽이친 물줄기에 홀랑 정신이 팔린 사람들은 자주 목격된다. 하기야 어찌 이 장대한 경탄을 못 본 척할 수 있을까.

갈대와 강바람이 인간의 시간을 감속시키는 합금로

잘 정비된 아스팔트 노면은 원당교 근처부터 거칠어지더니 합금로에 들어서며 아예 '쎄멘'(시멘트) 바닥으로 변한다. 그래도 폭은 좁지 않아 천천히 가면 주행에 무리는 없다. 이 길부터 보청천은 금강에 더해져 큰 줄기를 형성하는데, 강 건너 기암절벽 반영(反映)이 수면에 복사한 듯 떠다니기에 맑은 날 가면 만족스럽다. '쎄멘길' 초입부터 끽해야 5분 남짓, 합금리 마을회관 아래서 시동을 끄자. 꼭 보고 지나가야 할 장관이 있어서다.

물만 있다면 듬뿍듬뿍 잘 자라는 게 갈대라지만, 합금리 인근 금강변 갈대밭은 여행자가 좋아할 장점이 있다. 본디 물놀이 명소로도 찾는 이가 많을 정도로 강변이 넓고 뻘이 없는 자갈밭이라 쉬어가기 알맞은 것. 높이 수십 미터는 족히 넘을 절벽들이 방풍림 역할을 해 강바람도 제법 잔잔하다. 수풀도 지나치게 밀생하지 않아 탐방하는 데 방해물도 적다. 하늘거리는 가을바람에 갈대 풀씨가 무게를 버리고 떠오르는 순간, 인간의 시간은 느려지는 기분이 든다.
 
575번 지방도에서 제일 주의해야 할 건 안개다. ⓒ 월간 옥이네
 
바람과 갈대와 풀냄새를 몸에 발라가며 강가를 충분히 걸었다면, 고개를 들어 합금리 벽화마을에 들러보자. 이곳 명칭은 사람마다 기억하는 원전(原典)이 다르다. 누군가는 금강에 섞인 사금을 채취하던 위아래 동네 '상금·하금'을 같은 행정구역으로 묶어 '합금'이라 부르게 됐다고 하고, 또 다른 이는 예부터 전해진 우리말 이름 '윗쇠대·아랫쇠대'를 일제가 한자어로 바꾸어 강요했을 뿐이라 한다. 또 그 '쇠'는 금이 아니라 소를 뜻한다는 주장도 따라붙는다.

"여 풀밭에서 소 많이 멕였어. 수백 마리씩 뜯어먹고 댕겨서 풀이 다 없어질 때도 있구. 근데 금 나오던 것도 맞거든. 지금이야 물 관리한다고 못 건지게 하지만... 그런게 누구 말이 맞는지는 암도 몰러. 다 맞지, 뭐."

마을 설명 현판에 쓰인 '묵넝거리'는 무슨 뜻인지 물었지만, 이름 말하기 싫다는 어르신은 본인도 모른다고 얼른 찍고 가라며 손사래를 친다. 버스 기다리신다기에 언제 오냐 하니 그것도 모르신단다. "대충 이맘때 와"라는 말이 파고드니 오늘 안에 575번 지방도를 싹 다 둘러보겠다는 조급한 마음가짐이 부끄러워진다. 옥천읍까지 가는 501번 버스는 금방 도착했다. "첨엔 도로 측량하는 사람인가 혔다"는 소박한 웃음에 마을 어귀를 벗어나기 싫어진다.

몽환과 청명, 풍요와 빈곤이 엇갈리는 청마로·안남로

575번 지방도에서 제일 주의해야 할 건 안개다. 대청호와 금강 수계가 그물망처럼 얽힌 옥천에서도 안개 피해가 유독 심한 지역 중 하나가 이 근방이다. 일단 운전자에겐 '적'이 확실하다. 이 적요한 적은 집요하게 지상을 저공 비행하며 가시거리를 몰수한다.

하지만 안개는 뜻밖의 장탄식이 터져 나오게 하는 풍광을 감춰둔 발견이 될 때도 있다. 분진 폭발하듯 퍼져나간 수증기 가루들이 햇빛의 잠열을 못 이기고 물러나는, 그 아주 찰나에 어마어마한 비경이 공개된다. 절벽과 수면 사이에 폐곡선으로 맴돌며 힘을 응집한 바람이 안개의 껍질은 긁어내고 속살은 남겨둔 채 떠난다. 솜뭉치처럼 벽과 골 사이에 끼어 나풀거리는 모양새가 진경산수화 부럽지 않다.
 
티 하나 없는 진청색 창공에 죽죽 그어진 청마대교를 봤다면 그 장엄함을 떠올릴 테다. ⓒ 월간 옥이네
 
575번 지방도를 한 번만 타본 이들끼리는 자기가 겪은 날씨에 따라 전혀 다른 감상을 새기리라 장담한다. 잡티 하나 없는 진청색 창공에 죽죽 그어진 청마대교를 봤다면 그 장엄함을 떠올릴 테다.

그러나 앞서 말한 '안개 산수화'를 맞닥뜨린 사람은 몽환적인 운무 속에서 가물가물 윤곽을 삼킨 길과 다리에 압도당할 것이다. 합금로부터 청마대교까지, 575번 지방도가 유일하게 동이면을 지나는 이 1km 남짓한 짧은 여정이 특히 그러하다. 때문에 이 지면에는 길이 지은 두 표정을 함께 찍어 담았다.

청마대교 너머부터는 옥천 내에서 575번 지방도가 최장거리로 펼쳐진 안남면 구간이다. 사실 안남면부터 575번 지방도는 매력을 갈아 입는다고 보는 게 맞다. 갑자기 탁 트인 농지로 길이 내달리면서 한가로운 분위기를 물씬 뽐내서다.

그러나 이 목가적인 대지 속에는 남다른 수심이 엉켜 있다. 근 반세기 동안 최악이라는 쌀값 폭락이 옥천 농토를 남김없이 할퀴고 지나서다. 그럼에도 청정리에서 마주친 농민들은 트랙터를 꺼내 벼를 거두고 '다음'을 써레질하기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어쩔 땐 이 징글맞은 안개가 고마울 때도 있어. 나만 안 보이간? 다 같이 안 보이는 거지. 그거 아오? 풍년 들면 더 속창시가 썩어. 답답한 속알맹이를 야들(안개)은 아는 거 같기도 하니깐. 젊을 적에 아버지가 나락 베러 가면 내가 그까짓 거 다 내다 버려버리라고 했거든. 돈도 안 되는 거, 근데 이제 내가 그러고 있어. 그게 최선이 아니라 최소였단 걸 이제 알지 나도. 농사짓는 놈이 논 버리면 끝인 거더라고."

타향살이에 지쳐 내려왔건만, 고향이라고 구들장 속 같지는 않았다는 그가 훌쩍 트랙터에 올라타고는 다시 엔진을 돌린다. 씨알만 쏙 빼먹고 볏대는 퉤퉤 뱉는 트랙터 뒤꽁무니를 한참 보다 다시 차에 오른다.

우회와 되돌림이 해답처럼 느껴지는 안내수한로
 
우리는 보통 편리함을 위해 길을 내지만, 세상에는 숭고함을 위해 길을 우회시키는 경우도 있다. ⓒ 월간 옥이네

안내중학교까지 온 다음, 575번 지방도는 37번 국도와 합류해 동진한다. 안내면 현리에서 502번 지방도가 575번 지방도와 잠깐 겹치다 다시 제 갈길을 간다. 안내면과 보은군 수한면을 잇는 안내수한로다.

우리는 보통 편리함을 위해 길을 내지만, 세상에는 숭고함을 위해 길을 우회시키는 경우도 있다. 안내 곳곳에 선 동구나무들이 그 증거다. 굳이 '커브'를 내지 않아도 될법한 평탄면인데 길은 곡선을 감내한다.

으레 그런 지점마다 동네만큼이나 나잇살 잡순 아름드리 한 그루씩 우뚝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도율리에서는 길을 쪼개놓은 나무 모습도 보인다. 비록 관리의 손길이 띄엄띄엄한 듯은 보이지만, 울타리까지 세우고 지극정성 보호받는 건 확실하다. 1992년 옥천 제11호로 지정된 이 보호수는 어쩌면 마을보다 도 먼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

"길이 먼저가 아니라 마을이 먼저고, 마을도 사람이 먼저지. 여기가 원래 동네 입구였어. 길 넓힌다고 할 때는 보호수로 정해져서 애초에 벨 일이 없었고. 그 전에 처음 도로 뚫을 때 베자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은 들었지. 어른들이 천벌이니 액운이니 받는다고 반대했다는데, 나는 그게 중요한 건 아닌 거 같아. 사람들끼리 계속 모이고 동제 지내고 했던 마음이 있잖아, 마음이. 그게 뭉클한 거여."

수십 년 전 동네 어른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린 마을 주민 정성근씨의 정의 방식대로 이 나무들 속에는 '동신'의 신격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종교적 의미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공유 정체성을 관념화한 형태로써도 동구나무들은 수호신 그 자체다. 앞뒤를 헷갈려서는 안 된다. 보호수니까 길을 돌린 게 아니라, 길을 돌릴 만큼 소중한 가치이기에 보호수가 된 것이다.

대도시 한복판마저 조각내 높다란 방음벽을 쑤셔 박은 후 길을 욱여넣는 요즘 방식이라면 어림없었을 일이다. 효율성 만점인 최신식 공법과 대척점에 놓인 이 도로야말로 옥천이 어떤 지역인가를 생생히 증언하는 풍경이다.

575번 지방도는 옥천 북단부터 다시 산속으로 스며든다. 면적을 가늠할 수 없는 하늘의 화폭에 붉고 노란 옷동을 무수히 기워입은 산들이 늘어서 말없이 도로를 빨아들인다. 보은군과의 접경지에서 차를 되돌리는 길, 뒤를 잘 살피지 않는 일상에 길들었기에 '역류'가 오히려 반가워진다.

총연장 35km, 운행시간 50분을 채우지 못하는 '직진'만 계속한다면 보이지 않았을 것들이 잔뜩 동승한 느낌이다. 아무리 초점거리를 조여도 카메라로는 다 현상하지 못할 노을을 눈에 감광하면서, 여정을 끝낸다.
 
면적을 가늠할 수 없는 하늘의 화폭에 붉고 노란 옷동을 무수히 기워입은 산들이 늘어서 말없이 도로를 빨아들인다. ⓒ 월간 옥이네
 
지방도로만 진입 가능한 명소, 은은한 색감을 즐기는 화인산림욕장  

안내로의 끄트머리, 인포리 진입 직전 만곡저수지 인근에는 옥천을 대표하는 가을 휴양림인 화인삼림욕장이 있다. 오직 575번 지방도로만 들어갈 수 있는 이곳은 국내 최대 메타세콰이어숲이 유명한데, 메타세콰이어는 단풍이 지는 보기 드문 침엽수 종이어서 가을 방문지로도 적격이다. 원색을 불태울 듯 물들이는 활엽수와는 '감성이 다른' 은은하고 무딘 홍조가 색다른 매력을 선사할 것이다. 

빡빡한 산행에 겁먹을 필요도 없다. 최고봉 높이는 318m로, 산책로 전반이 푸근한 낙엽 더미와 보드라운 흙으로 가득해 발걸음에 부담이 적다. 메타세콰이어 이외에도 재래종 소나무와 도토리가 열리는 참나무, 잣과 편백, 은행나무 등이 고루 심겨 있다.

 
화인산림욕장 ⓒ 월간 옥이네
 
주소 : 충북 옥천군 안남로 151-66
운영 시간 : 06:00~18:00
입장료 : 성인 4천 원 / 중·고생 및 장애인 3천 원/ 옥천군민(안남·안내 이외 거주) 2천 원 / 안남·안내면민 무료
문의 : 0507-1318-0308

월간옥이네 통권 65호(2022년 11월호)
글·사진 김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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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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