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바야흐로 유성애 중독 사회다. 그 중심에서 연애 혹은 섹스하지 않을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에이엄브렐라' 성향의 이들이다. 에이엄브렐라는 어떠한 성별에도 정신적 사랑을 느끼지 않거나 육체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성 지향성의 총체를 일컫는다. 우리에겐 무성애란 이름으로 더 익숙하지만, 이보다 포괄적인 상위 개념으로 사용한다. 생소한 용어만큼 소외된 집단. 한국 사회에선 있어도 없는 존재였던 에이엄브렐라 성향자를 만나 그들의 삶을 들여다봤다.[편집자말]
아주 어릴 때부터 연애나 섹스에 관심이 없었다. 분명히 다수와 다른 지점이 있다는 걸 느꼈지만, 달리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언어로 정체성을 표현할 수 없는 스스로가 불치병 같았다. 해소할 수 없는 답답함만 늘어갔다. 안개와도 같던 창진씨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은 건 '너 혹시 무성애자 아니냐'는 친구의 무심한 한마디였다.

"계속 안갯속에 있었는데 드디어 길이 보이는 느낌이었어요."

창진씨는 그 순간 마치 심장을 관통하는 것 같은 짜릿함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그날로 포털에 '무성애자'를 검색해봤다.

"그 단어로 마음 속 빈자리가 채워지는 것 같았죠. 내가 잘못된 게 아니구나, 몇 안 되지만 나 같은 사람들도 있구나..."

에이섹슈얼, 에이로맨틱, 논바이너리(젠더리스) 
 
유튜브 채널 <무성애 친구 호이얏의 혼자 놀기>를 운영하는 유튜버 박창진(30)씨와 성북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 유튜버 "호이얏" 유튜브 채널 <무성애 친구 호이얏의 혼자 놀기>를 운영하는 유튜버 박창진(30)씨와 성북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 김나현

관련사진보기

 
지난 12일 성북구 한 카페에서 만난 박창진(30)씨는 유튜브 채널 <무성애 친구 호이얏의 혼자 놀기>를 운영하는 유튜버이기도 하다. 첫 만남에도 스스럼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소개한 그에게서 '나를 설명할 언어'를 가진 자만의 자기 확신이 읽혔다. "저는 에이섹슈얼, 에이로맨틱, 논바이너리(젠더리스)입니다." 채널 설명과 동영상에도 빠지지 않는 이 소개는 그를 이루는 가장 강력한 정체성이었다.

에이섹슈얼은 타인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성향을 뜻한다. 우리에게는 무성애자라는 말로 더 익숙하다. 에이로맨틱은 타인에게 로맨틱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 성향을 뜻하며, 무연정자라는 말로도 일컬어진다. 두 성향은 에이엄브렐라(어떠한 성별에도 정신적 사랑을 느끼지 않거나 육체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성 지향성의 총체)의 하위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굳이 연애를 경험해봐야 할까요? 안 하고 싶어요. 커피 마시고, 놀러 가고, 영화 보고 (그런 거) 친구들이랑 다 할 수 있으니까요. 그 이상의 깊은 건 하기 싫어요. 구속받는 느낌? 번거롭고 귀찮아요."

'에이엄브렐라' 단어 자체가 생소한 탓에 커밍아웃도 쉽지 않아

에이엄브렐라는 창진씨를 나타내는 정체성이지만 꺼내 보이기에 그리 편리한 단어는 아니다. "제가 먼저 (이 단어를) 말하지 않아요. 어차피 분위기만 싸해지고 못 알아들으니까." 창진씨는 '차라리 모두가 아는 게이, 레즈비언처럼 동성애자 성향이면 그렇게 이야기라도 할 텐데'라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커밍아웃하는 나름의 기술도 터득한 상태다.

"바로 말하기보다 '나는 연애에 별로 관심 없고,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살 거다' 이렇게 슬쩍 흘려보는 거죠. 분위기가 애매해진다 싶으면 더 얘기 안 하고, 수용할 것 같은 분위기면 얘기를 좀 더 하는 거고."

그마저도 성공률은 매우 낮은 편이다. 창진씨는 스타벅스에서 일하며 처음 '제대로 된' 조직문화를 경험했다. 대학교를 한 학기 만에 자퇴하고,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의 개그 소극장에서 근무했던 창진씨에게 처음 당면한 조직문화는 곤욕이었다. 그는 스타벅스에서의 경험을 '고난과 인내의 시간'으로 기억했다.

"동료들이 한 번은 집요하게 연애에 대해 묻길래 '연애도 결혼도 관심 없고, 혼자 내 인생 케어하기에도 바쁘다'고 돌려 말하니까 조용해졌어요. 그러다가 한 분이 '못 해서 그런 거 아니고요?'라고 하셨어요."

그는 해당 발언이 무성애자가 꼽는 불쾌한 발언 중 하나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한 분이 '너 혹시 그거 아이가?'라길래 설마 저 사람 에이엄브렐라를 아는 건가 싶어 두근댔죠. 그런데 신부님이 장래희망이냐고 하더라고요."

가족에게는 정체성을 꺼내볼 시도조차 하지 않은 상태다. 부모님은 아직도 창진씨의 연애와 결혼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다고 한다. 그는 부모님의 가치관을 단편적으로 드러내는 한 일화를 소개했다.

"인간이 무언가를 끌어안고 자면 훨씬 질 높은 수면을 취할 수 있다길래 인형을 안고 자는데, 부모님이 뭐라고 하는 거예요. 너는 어떻게 서른살 된 남자가 그런 걸 안고 사냐, 버리라면서 '네 나이 되면 인형 말고 다른 걸 끌어안고 자야 하지 않겠냐'고 하시더라고요."

무성애자의 자조, 에이엄브렐라는 없는 존재

'혐오도 사람들이 알아야 당하는 거지.' 한 무성애자의 자조 섞인 한탄이다. 이 씁쓸한 말은 에이엄브렐라가 사회에서 얼마나 '없는 존재'로 취급당하는지를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생물학적 남성과 여성이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사는 게 최고의 삶이라고 대부분 말하잖아요. '슈퍼맨이 돌아왔다'나 '환승연애' 같은 프로그램이 흥행하기도 하고요. 성에 관심 없는 사람에 대한 프로그램은 거의 없다고 봐야죠." 

실제로 한국에서 '무성애'를 다룬 콘텐츠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무성애자를 주인공으로 하거나 무성애를 주제로 한 콘텐츠는 고사하고, 언급조차 희박한 게 현실이다. JTBC 드라마 <런온>이 한국에선 거의 최초로 무성애자 캐릭터를 다루며 호평을 받았지만, 이조차도 단역에 그쳤다. 
 
'에이엄브렐라'와 '유포리아'를 합쳐 만든 단어. 스티커로도 제작했다
▲ 에이엄브렐라 가시화 프로젝트팀 "에이슈" 로고 '에이엄브렐라'와 '유포리아'를 합쳐 만든 단어. 스티커로도 제작했다
ⓒ 정다슬

관련사진보기

 
같은 퀴어(LGBTQIA: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 자신의 성정체성·성적 지향에 의문을 품은 사람(Questioner), 간성(Intersex), 무성애자(Asexual)를 모두 합한 단어) 공동체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창진씨는 에이엄브렐라가 사회적 소수자인 퀴어 내에서도 비주류라고 지적한다.

"퀴어끼리 밥을 먹는 자리였는데, 돌아가면서 자기 성향을 이야기했어요. 제가 '안녕하세요. 무성애자입니다'라고 하니까 다들 무성애라고요?(라면서)... '진짜 있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동물원의 동물이 된 느낌이었죠."

어느 집단에 있든 그에게 소외감은 '기본값'이다.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는 집단마저 완전한 소속감을 주지는 못한다. 

"게다가 퀴어문화축제에 성(sex)과 관련된 아이템들이 있기도 한데요. 이것 때문에 무성애자 분들은 참여하기 싫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좀 들더라고요. 우리는 이런 부분에 관심 없으니까요."

낯선 개념일 뿐 무성애자는 분명히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 무성애자 인구를 세계 인구의 1%에 해당하는 7000만 명으로 추정하는 연구도 있다. 앤서니 보가에르트 교수는 2004년 영국인 1만8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 조사 대상의 1%가 '타인에게 성적 매력을 느껴본 적 없다'고 응답했다고 밝혔다. 보가에르트 교수가 자신의 책 <무성애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 Asexuality)>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당신은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교육이요."

창진씨는 에이엄브렐라를 가시화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이 교육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무성애라는 개념을 몰라 난항을 겪던 시기를 떠올리며 학생들이 무성애에 대해 인지할 수 있는 교육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국에서는 동성애에 대해서 가르치고 이상한 게 아니라고 교육하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역시 (외국에서조차) 무성애 교육은 없거든요." 

그가 '무성애'라는 생소한 개념을 주제로 꾸준히 유튜브 콘텐츠를 제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상을 보면 다 제 경험을 얘기해요. 무성애자면서 자기 얘기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제 개인적인 얘기가 누군가에겐 정보처럼 들릴 수도 있잖아요. 제 말을 듣고 공감하고, 무성애 성향인 걸 깨닫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요."

그는 자신이 에이엄브렐라 성향인지 고민하는 사람의 댓글을 받으면 몇 시간이고 정성을 들여 답해준다고 한다. 턱없이 부족한 자료 탓에 정체화까지 힘든 시간을 보낸 과거의 자신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창진씨 가방에 부착된 배지. 에이엄브렐라 상징 색을 조합한 아이스크림 모양으로, 뒤집으면 대문자 A가 된다.
▲ 에이엄브렐라 배지 창진씨 가방에 부착된 배지. 에이엄브렐라 상징 색을 조합한 아이스크림 모양으로, 뒤집으면 대문자 A가 된다.
ⓒ 김나현

관련사진보기


마지막으로 에이엄브렐라 성향인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당신은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그냥 성향과 취향이 다른 것뿐이지, 당신이 잘못된 건 아닙니다. 우스갯소리로 말하면 그거죠. 민트초코, 파인애플 올라간 피자."


[관련기사]
- '연애' '섹스' 안 하면 안 되나요? http://omn.kr/21lxp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울여자대학교 바롬 졸업 프로젝트 팀 <에이슈>의 기사입니다. 김나현(저널리즘 전공), 임하늘(일어일문학과), 장혜윤(저널리즘 전공), 정다슬(디지털영상전공)로 구성돼 있습니다. '에이엄브렐라 가시화'라는 큰 주제를 축으로 활동합니다. 기획기사와 캠페인 활동을 통해 퀴어 내에서 소외받는 에이엄브렐라의 존재를 알리고 이를 통해 유성애 중심 사회 속에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태그:#무성애자, #에이엄브렐라, #퀴어, #성소수자, #호이얏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