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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수많은 이야기를 가진 신화의 섬이다. 그 중엔 키가 아주 큰 설문대 할망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키가 얼마나 컸던지 할망이 치마에 퍼서 담아 옮기던 흙이 흘려서 생긴 것이 제주 곳곳에 있는 오름이란다. 그리고 성산 앞바다의 우도는 원래 섬이 아니었다고. 그런데 할망이 너무 강하게 소변을 보다 보니 그 줄기에 연결됐던 육지가 파여 우도가 섬이 됐다는 전설이다.

신화 속 설문대 할망은 한쪽 다리는 관탈도에 놓고 다른 한 쪽은 마라도에 걸치고 한라산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리고 빨래를 하기 시작하는데 그 빨래통이 성산일출봉이다. 이 성산 일출봉의 아름다움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성산읍에서 설문대 할망의 빨래통인 성산일출봉으로 가는 올레길을 따라 가다 보면 광치기 해변과 터진목이라는 곳이 나온다. 모든 올레길을 다 가본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제주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 중 하나다. 성산 일출봉에서 바라보는 일출도 멋있지만 이곳에서 보는 일출도 상당히 근사하다.

요즘은 좀 뜸해졌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올레길을 걸으면서 위로와 치유, 새로운 다짐과 희망을 얘기한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길이 수십 년 전 어떤 이들에겐 공포와 눈물로 걸어야 했던 '죽음의 길'이었다.

성산국민학교, 서북청년단의 본부지
  
  현재는 폐허로 방치되고 있으며, 학교는 다른 곳으로 옮겼다.
▲ 성산국민학교 옛터  현재는 폐허로 방치되고 있으며, 학교는 다른 곳으로 옮겼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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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눈부신 발전의 원동력 중 하나로 높은 교육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해방 이후 전국 곳곳에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학교를 세웠다. 당장의 먹거리가 중요하던 시기에도 미래를 위해 투자한 것이다.

교육열은 특히 제주가 매우 높았다. 광복 직후부터 1947년까지 2년 동안 제주도에는 총 44개의 초등학교와 10개의 중등학교가 새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초등학생은 2만여 명에서 3만8000여 명, 중등학생은 300여 명에서 3600여 명까지 증가했다. 전국을 통틀어서도 최상위 수준이었다.

성산면 주민들도 학교를 세웠다. 주민들은 학교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일본인이 운영하던 학교 건물을 인수, 1946년 2월 22일에 성산동공립국민학교를 열었다. 새로운 나라에 새로운 인재를 키우기 위한 활력이 잠깐이나마 넘쳐 흘렀다. 하지만 얼마 후 서북청년단(서청)이 성산국민학교에 주둔하면서 학교는 죽음의 공간이 됐다.

서청은 북한 공산체제에서 억압받던 서북지역 지주 출신이나 개신교도들이 월남해 만든 반공 단체였다. 이들은 좌익세력에 대한 집단 테러를 일삼았고 이승만 정권은 이들을 비호했다. 1949년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도 한때 서청 회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는 제주 4.3을 진압하기 위해 군을 투입해 무자비한 초토화 작전을 펼쳤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됐다. 이때 정규군 외에도 서청을 투입했는데, 1947년 말까지 제주에 들어온 서청 구성원은 2000여 명이 넘었다.

서청은 약간의 군사 훈련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들의 신분은 민간인이었다. 그래서 경찰과 군인의 복장을 입고 계급장을 달았더라도 그들에게는 급여가 지급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서청은 좌익척결을 빙자해 수많은 약탈과 살인 등 불법을 저지른다. 하지만, 군과 경찰은 이들의 행위를 묵인하거나 지원했다.

이들 서청 중 1개 중대 100여 명이 1948년 겨울에 성산국민학교로 와서 약 3개월 간 머물렀다. 이들로 인해 성산의 아름다운 해안과 일출봉으로 이어지는 길은 피로 물들었다.

피로 물든 백사장, 광치기 해변과 터진목
  
  저 멀리 성산일출봉이 보이고 희생자 위령비를 만날 수 있다.
▲ 광치기 해변  저 멀리 성산일출봉이 보이고 희생자 위령비를 만날 수 있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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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올레길 1코스의 종착점이자 2코스가 시작되는 곳이 바로 광치기 해변이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모래사장을 터진목이라고 부른다. 터진목은 터진 길목이라는 뜻인데 과거에는 물 때에 따라 바닷물이 드나들었다. 하지만, 현재는 바다를 막고 소나무를 심어 과거처럼 터진목이 바로 보이지는 않는다.

성산국민학교에 주둔했던 서청은 인근 주민들을 체포해 학교 맞은 편 감자창고에 감금했다. 젊은 남자들은 모두 유격대로 간주해 체포돼 살해당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마을마다 많은 청년들이 집을 떠나 피신했다. 서청은 도피자 가족들을 체포해 청년들의 행방을 대라면서 모진 고문을 가한다.

그리고 서청은 체포한 주민들 수백 명을 터진목으로 끌고 가서 학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희생자들은 모래밭에 대충 묻히거나 바다로 흘러가서 시신조차 찾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서청은 자신들의 행동에 좌익 척결이라는 정당성을 부여해 왔다. 하지만 정규군이라 할 지라도 법적 절차를 밟지 않은 민간인의 임의적 처형은 '불법'이다. 그런데 서청은 정당한 공권력도 아니었고 민간인 처형에 대한 어떤 법적 근거도 가지지 못한 민간단체였다.

학살은 서청이 떠나고 나서도 1949년 6월까지 계속됐다. 인근 구좌면 주민까지 끌려와 희생됐는데, 총 희생자 수는 확인된 것만 212명에 이른다. 생존자 중에는 당시 17개월 아기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엄마는 죽었지만 아기는 주변 한 할머니에게 구조돼 기적적으로 살아 남았다고 한다.

아름다운 해변은 피로 물들었다. 그러나 그 아픔의 현장은 도로 확장 등의 명목으로 많이 사라져 버렸고, 60여 년이 지난 2010년에서야 유족들은 위령비를 세울 수 있었다.

성산일출봉으로 가는 길, 우뭇개 동산에 얽힌 학살
  
  주민들은 이 초원을 올라 우뭇개 동산에서 희생되었다.
▲ 성산일출봉 아래의 초원  주민들은 이 초원을 올라 우뭇개 동산에서 희생되었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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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치기 해변을 지나 성산일출봉으로 계속 가다 보면 야트막한 언덕에 넓게 펼쳐진 초원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성산일출봉 입구에 있는 '우뭇개 동산'이다. 여행자들은 이 푸른 초원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일출봉에 오른다.

1949년 1월 2일, 국군 2연대의 군인들과 서청은 이곳에서 성산읍 오조리 주민들을 집단 학살한다. 학살의 원인은 일명 '다이너마이트 사건'이다. 사건 4일 전에 군인들과 서청 단원들은 오조리 마을 주민들 중 다이너마이트를 소지하고 있는 이들을 체포한다. 또한 마을 주민들을 공회당으로 집합시켰는데 폭발물을 다룰 수 있거나 집합에 늦은 이들도 마구잡이로 체포한다. 이렇게 체포된 이들은 성산국민학교 맞은 편 감자 창고에 감금됐다.

원래 마을 주민들이 소지하고 있던 다이너마이트는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남겨두고 간 것이었다. 주민들은 이를 고기잡이용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2연대 이전에 제주에 주둔했던 9연대는 인민유격대를 방어하기 위해 마을마다 민보단을 꾸렸는데 이 때 다이너마이트를 방어용으로 사용할 수 있게 허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9연대와 임무를 교대해 제주에 들어온 2연대와 서청은 이 다이너마이트 소지를 자신들에 대한 공격 목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주민들을 체포했고. 그 중 30여 명의 주민들을 우뭇개 동산으로 끌고가 살해했다.

현재 우뭇개 동산으로 가는 길은 성산일출봉 매표소에서 무료 탐방로로 조성돼 있다. 그러나 과거 민간인 학살과 관련된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당시 군경과 서청에 의해 성산 일대에서 희생된 주민은, 확인된 것만 총 467명이다.

보기 좋은 곳은 죽이기 좋은 곳

신화 속 설문대 할망은 모든 것을 품고 있었다. 할망의 털은 탐라의 풀과 나무가 됐다. 할망의 소변은 바다를 풍성하게 만들어 물고기와 해초, 전복 등 수많은 생명의 원천이 됐다. 탐라의 백성들은 할망의 부드러운 살로 만들어진 땅에 밭을 갈았다.

신화는 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다. 섬이라는 척박한 환경이지만, 사람들은 설문대 할망의 넉넉함에 위로를 받으며 감사하며 삶을 일궈 왔다.

하지만 설문대 할망이 모든 것을 내줘 만들었던 삶의 터전인 제주는 어느 한 곳 빠짐없이 피바람이 휘몰아쳤다. 성산뿐 아니라 정방 폭포와 함덕 해변처럼 우리가 감탄하는 제주의 아름다운 해안과 절벽, 드넓은 초원에서 학살이 일어났다. 넓게 탁 트인 곳은 많은 사람들을 모으기 좋은 장소이고, 한 번에 죽이기에도 좋은 장소였다.
  
  위령비 외에는 별다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광치기 해변의 위령비  위령비 외에는 별다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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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허영선, <제주4.3을 묻는 너에게>, 서해문집
김여정, <다크투어, 슬픔의 지도를 따라 걷다>, 그린비
김용옥, <우린 너무 몰랐다 - 해방,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 통나무
제주4.3평화재단, <제주4.3사건 추가진상조사 자료집> 
현용준, <제주도 전설>, 서문당
신동흔, <살아있는 한국 신화>,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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