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한참을 아무 곳에도 가지 못 하다가, 드디어 카타르의 겨울이 당도했다. 100년에 가까운 월드컵 역사 중 최초의 겨울 월드컵이자,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이 새롭게 열린다는 상징적인 의미의 '관중 있는' 세계적 축제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축제의 한가운데, 카타르 도하에 있다.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카타르가 월드컵을 준비하며 수많은 문제를 드러냈지만, 어쩔 수 없이 축제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든 인간이기에 나는 지금의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즐겨볼 생각이다.
 
마닐라 공항에서 아르헨티나 팬들을 만났습니다.  인천에서 마닐라를 거쳐 도하로 가는 비행편입니다. 도하 공항에서 마주친 아르헨티나 팬들에게 진지하게 응원을 보냈습니다. 아자!

▲ 마닐라 공항에서 아르헨티나 팬들을 만났습니다. 인천에서 마닐라를 거쳐 도하로 가는 비행편입니다. 도하 공항에서 마주친 아르헨티나 팬들에게 진지하게 응원을 보냈습니다. 아자! ⓒ 이창희

 
11월 20일 도하에 도착했다. 가장 저렴한 항공권을 몇 달에 걸쳐 검색한 결과 마닐라 경유 필리핀 항공이 제일 매력적이었다. 원래는 부산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로 예약했었는데, 항공사의 사정으로 갑자기 취소되었고, 결국은 월드컵 개막일에 맞춰 인천에서 출발하는 비행 편으로 변경했다. 코로나로 갇혀있던 시간이 길어서인가, 월드컵 현지 직관에 꼭 챙겨야 하는 짐들이 빠져있다는 걸 발견하고 있지만, 그래도 오랜만의 여행은 설렘과 떨림으로 가득했다.

도하까지의 여행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네가 과연 카타르 입국에 합당한 사람인가?'였다. 카타르는 크지 않은 나라인데, 월드컵이라는 세계 최대 규모의 축제를 준비해야 하다 보니 제일 신경 쓴 것이 출입국 관리였다.

일반적인 월드컵이라면 세계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축구팬들을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겠지만, 카타르에겐 버거운 일이었다. 결국 경기 입장권을 구매하고, 숙소를 확보한 사람들에게만 '출입허가증'의 역할을 수행하는 팬 아이디인 '하야카드'를 발급하기로 결정했다. 어쩌면, 월드컵이라는 축제를 즐기고 싶은 축구팬들을 배제할 수 있는 결정이었겠지만, 카타르로서는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입장권, 숙소, 하야카드... 카타르로 가는 관문
 
도하공항에서는 멕시코 팬들을 만났습니다 도하공항에서도 마주친 멕시코 팬들이 반갑습니다.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축구열정을 자랑하듯, 저 거대한 전통 모자인 솜브레로가 반갑습니다.

▲ 도하공항에서는 멕시코 팬들을 만났습니다 도하공항에서도 마주친 멕시코 팬들이 반갑습니다.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축구열정을 자랑하듯, 저 거대한 전통 모자인 솜브레로가 반갑습니다. ⓒ 이창희

 
나는 다행스럽게도 경기표와 숙소 예약까지 모두 일찍 마쳤고, 이 정보를 바탕으로 지난 4월 하야카드 발급까지 완료했다. 도하까지 입국하는 동안 지나쳤던 인천, 마닐라, 도하의 세 개 공항에서 모두 어떤 식으로든 카드를 확인했고, 열여덟 시간에 가까운 여정을 끝내고 도하의 숙소에 도착한 것이 카타르 시간으로 11월 20일 저녁 8시였다. 이번 숙소는 그동안의 월드컵 여행을 거의 함께한 지인들과 함께 도하의 빌라를 한 채 빌렸고, 이제 막 지어진 듯한 도하의 빌라는 세 개의 방과 세 개의 욕실, 주방, 거실, 식당까지의 공간으로 구성된 근사한 곳이었다. 모든 게 새것인 카타르 월드컵의 시작은 숙소에서부터였다.

이번 월드컵에서는 모두 17일을 카타르에 머물게 된다. 지난 월드컵들과는 다르게 경기장 간 이동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서, 우리는 도하에 베이스캠프를 잡고 경기들을 보러 다니기로 했다. 이렇게 장기 여행에서 숙소가 한 곳으로 결정되니 마음도 덩달아 편해진다. 짐을 다시 싸지 않아도 되는 데다가, 한국에서 공수한 식재료들과 현지의 야채들을 이용하면 집에서 밥도 해 먹을 수 있다. 정말 몸도 마음도 편한 월드컵이 될 모양이다.

어제 저녁은 숙소에 먼저 와 계셨던 우리 모임의 대장님께서 '을지로식 골뱅이 소면'을 해 주신 데다가, 오늘(현지시간 21일) 아침은 한국에서 가져온 햅쌀밥과 김, 현지에서 사 온 김치까지 함께한 한국식 아침상이 준비되었다. 카타르로서도 모든 게 새것이고 최초인 월드컵이겠지만, 2002년 이후로 20년이나 이어진 월드컵 여행에서도 전례가 없는 여행이 될 모양이다.

도하에서의 첫날부터 경기장에 가야 한다. 오늘 봐야 하는 경기는 미국과 웨일스의 경기인데 거의 매번 월드컵에 진출하는 미국보다는 64년 만에 월드컵에 출전하는 웨일스의 기세에 마음이 쏠리는 날이기도 하다. 하지만, 경기가 저녁 10시 (한국시간 22일 새벽 4시)라서 낮 시간에는 도하에서 제일 유명한 식당에 들르기로 했다. 대표팀이 도하에 방문했을 때 회식을 했던 장소라며, 축구팬들에겐 성지 탐험의 일환으로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구글맵으로 지도를 확인하니 숙소에서 걸어도 15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길이라, 11시의 햇살을 등에 지고 식당까지 걷기로 했다.
 
도하 최고의 맛집에서 양고기를 먹습니다 양고기도 너무 맛있었는데, 곁들여진 난과 후무스를 포함한 각종 소스들도 근사했어요!

▲ 도하 최고의 맛집에서 양고기를 먹습니다 양고기도 너무 맛있었는데, 곁들여진 난과 후무스를 포함한 각종 소스들도 근사했어요! ⓒ 이창희

 
도하의 11시는 한낮이다. 해가 뜨는 시간이 대략 5시쯤이고, 11시의 햇살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아무도 걸어 다니지 않을 것만 같은 거리에는 차들만 가득했고, 길을 걷기 위해 횡단보도 사인을 요청했지만 언제 초록색으로 바뀌는지 몰라서 웅성거리는 사이,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조금 오래 기다리셔야 해요. 여기 신호등 이상해요. 그리고, 차가 적당히 없어지면 그냥 건너셔도 괜찮아요."
"안 그래도 언제 바뀌는지 궁금해하던 참이에요. 감사합니다!"


운동을 하러 나오신 한국 분이 반갑게도 말을 걸어주셨고, 우리는 때마침 바뀐 신호등에 길을 건너면서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축제의 특권은 이런 데 있다. 모두가 비슷한 생각으로 이곳에 왔을 테고, 그것을 너무도 잘 아는 개최국의 국민들은 축제를 즐기러 찾아온 사람들을 크게 환대한다. 어쩌면 이번 월드컵이 성공한다면, 카타르가 유목민으로 사막을 떠돌던 수천 년 전부터 이어져온 환대의 문화가 가장 큰 기여를 하지 않을까?

도하 최고의 양고기 집에서 '한국인 전용 스페셜 콤비네이션' 메뉴를 맛있게 먹고 났더니, 오후 2시쯤이었다. 이번 월드컵이 개최되는 여덟 개의 경기장은 모두 도하를 중심으로 20~40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었으니, 돌아오는 길에는 저녁의 동선을 고려해서 지하철역 탐험에 나섰다. 지하철은 팬 아이디인 하야카드를 갖고 있으면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는데, 정말 방금 지어진 역사가 품고 있는 새것의 냄새는 여기에서도 어김없었다. 지하로 한참을 내려간 지하철의 맨 앞 칸은 운전실로 막혀있지 않아서인가, <스타트렉>의 USS 엔터프라이즈 호의 운전실 같은 느낌이었다.

경기 끝나고 지하철로 쏟아진 4만 3천 관중
 
여기가 사막이 맞습니까? 사막의 한 가운데에 놓인 도시인데, 이렇게나 풍성한 노란꽃이 가득한 나무가 근사했습니다. 초록의 잔디와 낮게 심어진 페튜니어의 향기가 가득한 산책로는 여기가 과연 사막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 여기가 사막이 맞습니까? 사막의 한 가운데에 놓인 도시인데, 이렇게나 풍성한 노란꽃이 가득한 나무가 근사했습니다. 초록의 잔디와 낮게 심어진 페튜니어의 향기가 가득한 산책로는 여기가 과연 사막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 이창희

 
숙소에 돌아와서 잠시 쉰 후, 첫 번째 경기인 미국과 웨일스의 킥오프 시간에 맞춰서 7시쯤 숙소를 나섰다. 구글맵에 따르면 경기장까지 1시간 정도 걸린다고 되어 있었으니, 경기장까지는 넉넉할 것이라 생각했다. 제일 큰 걱정이라면, 실물 표가 배송된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에 저장된 디지털 티켓이 어떤 식으로 동작하게 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현지에서 사용하겠다며 주문한 e-SIM 카드가 아직 배송되기 전이라서, 내 스마트폰은 도하에 도착한 이후로는 카메라밖에 기능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근거리 통신인 블루투스는 힘이 있었고, 표가 보이지 않아 전전긍긍하며 초조함이 극에 달할 때쯤 경기장 입구의 검표원 근처에 도착했고, 검표원의 마법인지 때마침 디지털 티켓의 QR 코드가 활성화되었다. 이럴 수가! 카타르의 디지털 티켓 시스템이 지금껏 못 미더웠는데, 이렇게 또 믿게 해 주다니!
 
긴장한 웨일스 팬들 옆으로 첫경기 승리로 환해진 잉글랜드 팬들이 지나갑니다.  경기 시작 전, 웨일스와 잉글랜드가 나란히 경기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런 풍경은 축구를 축구답게 만들고 있어요.

▲ 긴장한 웨일스 팬들 옆으로 첫경기 승리로 환해진 잉글랜드 팬들이 지나갑니다. 경기 시작 전, 웨일스와 잉글랜드가 나란히 경기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런 풍경은 축구를 축구답게 만들고 있어요. ⓒ 이창희

 
이번 월드컵의 마스코트가 라이브인데, 너무 귀여워요! 경기장 입장 전, 마스코트인 라이브 아래로 라이브랑 똑같은 차림의 사람들이 앉아 있는 풍경입니다.

▲ 이번 월드컵의 마스코트가 라이브인데, 너무 귀여워요! 경기장 입장 전, 마스코트인 라이브 아래로 라이브랑 똑같은 차림의 사람들이 앉아 있는 풍경입니다. ⓒ 이창희

   
경기 전 사전행사가 화려합니다.  웨일스와 미국의 킥오프 전, 화려한 불꽃쇼와 플래그쇼가 화려하네요. 준비를 많이 한 티가 납니다. 기대돼요!

▲ 경기 전 사전행사가 화려합니다. 웨일스와 미국의 킥오프 전, 화려한 불꽃쇼와 플래그쇼가 화려하네요. 준비를 많이 한 티가 납니다. 기대돼요! ⓒ 이창희

 
월드컵은 역시 월드컵이었다. 64년 만에 월드컵에 출전한 웨일스는 관중석 대부분을 채울 만큼의 축구팬이 몰려들었고, 피치의 선수들에게 주문에 가까운 염원을 쏟아내고 있었다. 경기는 아쉽게도 양 팀이 1점씩을 허용하며 무승부로 끝이 났지만, 오랜만에 월드컵 무대에 복귀한 웨일스에게는 성공적인 시작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이란, 잉글랜드와 벌여야 할 예선도 기대해 보게 된다.

하지만, 지금껏 순조로웠던 월드컵 운영은 경기를 마치고 복귀하던 시점에서야 너무도 큰 문제를 드러냈다. 당일 경기장에 들어왔던 4만 3천 명이 넘는 관중이 경기 종료와 동시에 지하철로 쏟아져 나왔고, 카타르의 지하철은 쏟아져 나온 관중들을 수용해 내지 못했다. 결국, 지하철 앞에서 한참을 헤매던 우리 일행은 간신히 우버를 잡아타고 90분 만에 경기장을 빠져나왔는데, 그때까지 지하철 입구를 가득 메웠던 관중들이 언제쯤 각자의 숙소에 돌아가게 되었을지 걱정스러웠다. 게다가 오늘의 두 번째 경기는 일행 없이 혼자 움직이게 되는데, 또 어떤 예기치 않은 사건들을 겪게 될까?

카타르에서의 월드컵 여행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모두 17일을 예상한 여행의 일정은 이틀이 지나갔고, 이번 월드컵에서 보게 될 열세 개의 경기 중 막 첫 번째 중요한 경기가 인상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앞으로의 15일, 카타르에서 벌어질 축제의 순간을 기대하며, 오늘은 덴마크와 튀니지의 경기를 보러 출발해야겠다. 기대해 주세요!
 
경기를 진짜 가까운 자리에서 봤습니다.  미국 첫 골의 주인공인 풀리식과 웨아 콤비가 이렇게나 가까이에서 보이네요.

▲ 경기를 진짜 가까운 자리에서 봤습니다. 미국 첫 골의 주인공인 풀리식과 웨아 콤비가 이렇게나 가까이에서 보이네요.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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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여행기 카타르2022 도하여행 월드컵 웨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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