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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세가 딱 좋은 것 같아."
"진짜? 난... 한 85세?"


지난 봄, 프랑스 배우 알랭 들롱이 스위스에서 안락사로 생을 마감하겠다고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부부가 나눈 대화이다. 우리는 늘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반대하는 편이었고 너무 오래 살지 않았으면 하는 대화를 하곤 했으니 '안락사'가 자기가 죽고 싶을 때, 'stop'을 외칠 수 있는 그런 제도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무식했다).

알고 보니 스위스의 안락사는 의학적 치료가 불가능한 사람에 한해 가능한 절차란다. 그러면 그렇지. 아무렴 그만 살고 싶다고 자기 마음대로 죽는 것이 가능할까. 그런 방법이 합법이 될 리 만무했다. 어쨌거나 알랭 들롱의 소식이 주는 파급효과는 대단해서 막연했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생겼다.

'안락사'에 대해 잘 모르긴 하지만 자기 스스로 고통 대신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참 괜찮은 일이라 생각했다. 신체적 고통이든, 나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든 그것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었을 때, 인간이 인간답게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는 권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인간답게 죽고 싶다는 마음
 
<나를 죽여줘> 영화의 포스터
 <나를 죽여줘> 영화의 포스터
ⓒ ㈜트리플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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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런 생각을 굳혀주었던 것은 얼마 전 개봉한 <나를 죽여줘>라는 영화에서였다. <나를 죽여줘>는 장애와 안락사에 대해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였다. 주인공 민석은 선천적 지체장애를 가진 아들 현재를 돌보며 사는 아버지이다. 장애를 가진 아들을 키우는 것도 만만치 않은데 예기치 않은 사고로 민석은 신체적 마비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민석의 병명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민석은 하루하루 굳어가는 몸과 약으로 밖에 버틸 수 없는 통증 때문에 힘겨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병원에서의 처치를 무엇보다 고통스러워하던 민석은 아들 현재에게 유언처럼 병원에 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남긴다.

그 사건이 터진 건, 현재의 특수학교 졸업식날이었다. 졸업식에 갈 준비를 하며 들떠있던 가족들과 여자친구(이일화) 앞에서 민석은 그만 바지에 실수를 하게 된다. 몸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생리적 작용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그는 인간으로서 극도의 창피함을 느끼게 된다.

가족들에게 짐이 되고 있다는 죄책감과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 속에서 절규하던 민석은 쇼크 상태에 빠지게 되고, 아들 현재는 구급차를 호출하려는 고모를 단호히 만류하는데...

배우들의 몰입도 높은 연기가 함께여서인지 여운이 참 오래 남는 영화였다. 인간이 인간답게 죽고 싶다는 것을 이렇게 설득력 있게 이야기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인간으로서 남은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싶다는 의지는 존중받아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어쩌면 이기적인 죽음
신아연 작가의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신아연 작가의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 책과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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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실제 안락사 현장에 동행한 후 그 이야기를 담은 신아연 작가의 책은 안락사에 대한 조금 다른 시선을 가지게 해주었다.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라는 지극히 자극적인 제목의 이 책은 예상과 다르게 안락사에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안락사에 동행한 후 지독한 인본주의에서 지극한 신본주의자가 되었다는 작가는 담담하게 그 동행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놀라웠던 것은 작가가 묘사한 실제 안락사 현장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건조하면서도 충격적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말기 암 환자가 육체의 끔찍한 고통을 끝내고자 하는, 그야말로 원하던 죽음이었다. 그 결정이 쉽지 않았던 만큼 그 끝이 왠지 슬프지만 감동스러울 것 같았다. 그런데 아무리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였다고는 하지만, 고통이 없는 상태의 사람이 농담인 듯 가볍게 스스로 생명을 끝내는 장면은 뭔가 어색하고 이상했다.

자연스럽게 환자의 감정에 이입된다기보다는 무엇인가 부자연스럽고 찝찝했다. 촛불이 사그라들듯 사라지는 생명이 아닌, 잘 작동하고 있는 전자제품의 전원을 갑자기 차단한 것 같은 죽음이었다고 할까.

자연스레 그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가족들과 친지, 친구들에게로 시선이 갔다. 그 죽음의 충격은 오로지 남겨진 자들의 몫이 되었으니 말이다. 안락사를 지켜보아야만 했던 가족들에게 남은 후회와 죄책감이 감당하기 쉽지 않아 보였다.

영화에서 설득력 있게 다가오던 죽음이라는 선택. 너무나 인간적인 권리로 느껴지던 그 선택적 죽음이 어쩌면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상처가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락사가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권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가장 이기적인 욕심으로 비춰질 수도 있을 만큼 말이다.

중요한 건 나의 일상을 돌보는 것

'죽음'이라는 것은 그동안 깊게 생각해 보지 않은 탓에, 그리고 아직은 먼 일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저 스쳐지나가는 주제에 불과했다. 그런데 얼마전 허망한 죽음들을 맞이했던 탓인지, 아니면 중년에 접어든 나이탓인지 이번에는 오래도록 이 생각이 마음에 많이 남아 있었다. 물론 생각이 거듭될수록 '죽음'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었지만 말이다(아마도 웰빙과 웰다잉이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어떤 삶을 원할까. 이 철학적인 문제에 답을 내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모두 이루고, 많은 것을 누리는 것이 내 삶의 목표가 아니듯, 나는 나의 마지막도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나온 결과이길 바란다. 내 삶의 하루하루를 소중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면, 삶의 그 끝에서도 나를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문득 지난여름 서울대 졸업식에서의 허준이 교수의 축사가 생각이 났다. 자기의 분야에서 최고로 인정받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도전이나 열정이란 말 대신 친절이라는 다정한 언어로 졸업식을 더욱 빛냈던 그 한 구절 말이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승진, 은퇴, 노후 준비와 어느 병원의 그럴듯한 1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길 바란다.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반갑게 맞이하길 바란다."

이 말이 너무나 와닿았던 것은 어쩌면 이 말이 일상의 핵심을 말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정신없이 도장 깨듯 지나가는 일상이 아닌 나를 반겨줄 수 있고 나를 안아줄 수 있는 친절한 일상,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곧, 잘 사는 법이자 잘 죽는 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오래도록 머리 속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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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고 글쓰는 일을 좋아합니다. 따뜻한 사회가 되는 일에 관심이 많고 따뜻한 소통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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