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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초등학교 시절에 영어학원에 보내지 않는 대신 3년간 30만원씩 모아서 뉴욕여행을 떠났다(관련기사 : 3년 사교육비 모아 뉴욕에 다녀왔습니다).

아이들에게 미국을 보여주러 간 것이기도 하지만 나도 미국에서 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미국에서만 볼 수 있는 다양한 박물관도 빼놓을 수 없는 코스였다.

뉴욕에 있는 자연사박물관은 '박물관은 살아있다'라는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한지라 처음 가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낯설지 않았다. 그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2D로 납작하게 눌려있던 내 머리 속 박물관이 달궈진 옥수수가 껍질을 뒤집고 팝콘으로 터져나오듯 3D 공간으로 살아났다.

인디언들의 의복
 
비드장식 안장 블랭킷
 비드장식 안장 블랭킷
ⓒ 최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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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도 자연사박물관이 있고 나름대로 잘 구성해되어 있어 두어 시간 내에 둘러보기 부담없어 좋지만 여기는 하나씩 유심히 보려면 하루 종일이 필요할 것 같았다. 오후에는 맨해튼 야경을 볼 수 있는 몇 곳 중 하나인 톱 오브 더 록(Top of the Rock) 전망대를 예약해 두었기 때문에 전부를 다 보려면 공룡이 전시된 층 말고는 설렁설렁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생활을 재현해 둔 전시관에 갔을 때였다. 촘촘한 비즈로 만든 의복이나 장신구들이 눈에 띄어 '실이 어떻게 바느질이 되었을까, 어떻게 이렇게 이음새 하나 없이 천에 고정했지? 그 시절에 무슨 실로 이 바느질을 했을까' 생각하며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걸 본 아들이 말했다.

"엄마, 또 이거 신기하다며 사진 찍을 거죠?"

어느 박물관에 가든 옛 사람들이 공들여 만든 의복이나 바느질한 장신구들을 보면 반응하는 엄마를 알아서 하는 말이다.

그러고보니 제주도의 국립제주박물관에서도 군용 깃발의 한자를 어떻게 아플리케했는지, 깃발 밑 주름 하나하나에 어떻게 저렇게 예쁘게 바느질을 했는지, 말 안장에 함께 쓰는 마구는 동물 가죽에 어떻게 바느질을 했는지 감탄하며 봤던 기억이 난다. 재봉틀도 없던 시절에 가죽에 이렇게 예쁜 바늘땀으로 박음질을 한 장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는 감탄을 하며 카메라를 들이대곤 했다.

인간의 뇌는 미니멀하다. 내가 지금 경험한 많은 것들을 단기 기억에 넣어두었다가 장기 기억으로 넘길 만큼 반복적으로 회상하거나 입력하지 않으면 싸악 잘라내어 버린다. 그런데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장기 기억에 지금 들어온 기억을 연결할 수 있다면 새로운 기억은 기존의 기억과 손을 잡고 거기에 똬리를 틀게 된다.

몇 년이 지나고 나면 아마 나는 뉴욕 자연사박물관에서 본 공룡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해도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정성 들여 만들어 입었던 촘촘한 비즈가 달린 옷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내 뇌에는 바느질과 관련된 네트워크가 촘촘하기 때문이다.

모르는 이의 퀼트 작품
 
퀼트 작품
 퀼트 작품
ⓒ 최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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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 사는 고모님 댁에서 묵었기 때문에 맨해튼에서 체류했다면 보지 못했을 동네 도서관에도 가볼 수 있었다. 도서관의 복도에는 어릴 때부터 바느질을 했다는 퀼터가 만든 패브릭 누빔 작품이 걸려 있었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어느 퀼터의 작품을 보며 온전한 천 위에 모양을 아플리케로 붙인 게 아니라 조각조각을 이어서 평면의 그림처럼 연결한 것부터, 이음매가 자를 대고 그어서 그린 듯 연결된 부분, 색깔을 배치한 방식 등을 유심히 살폈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만들었을 작품을 보며 그 제작 과정을 그려보는 것은 내 습관이자 즐거움이기도 하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과정을 머리 속으로 떠올리며 재구성하다 보면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고 내가 가지 못한 경지에 있는 작업자가 존경스럽기도 하다. 그 복합적인 감정의 움직임을 느낄 때 내가 있는 지금 여기를 충실히 즐기고 있다는 충만감을 느낀다.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돌아보면 나는 어쩌면 그 작품을 본 것을 잊을 수도 있고 앉아서 공부하고 싶게 만드는 도서관의 건물만 기억할지도 모른다. 혹은 이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옷이나 가방을 만들다 조각천이 남았을 때 그걸로 뭔가를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도 모른다.

내 인생을 즐겁게 만드는 씨앗들

바느질이라는 취미를 가짐으로써 만드는 경험을 해보게 되고, 그 경험을 통해서 뭔가를 만드는데 필요한 과정을 되짚어볼 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된 것은 내 인생을 즐겁게 만드는 씨앗을 만들어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느질이라는 취향으로 만들어진 즐거움의 씨앗들이 내가 어딘가에 가서 뭔가를 봤을 때 내 인생이라는 밭에 뿌려진다. 그 밭이 내가 가진 씨앗들이 발아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그 순간 씨앗은 잭과 콩나무의 이야기속 줄기처럼 맹렬하게 자라나 나의 뇌에 즐거움이라는 불꽃놀이를 터뜨린다.

흔히들 나이가 들면 시간이 빨리 간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생활에 변화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억될 만한 이벤트가 별로 없기 때문에 하루 갔나 싶으면 일주일이 지났고 일주일 지났나 싶으면 한 달이 흘러 있고 그렇게 1년도 후딱 지나간다는 것이다.

나도 이제 2022년이 입에 익을 만하니 벌써 뜯지 않은 달력이 12월 한 달뿐이라는 사실에 문득 아연해진다. 하지만 바느질을 하면서, 바느질에 대한 글을 쓰면서, 기억될 만한 씨앗들을 제법 뿌려두었구나 생각하니 1년을 보내는 마음이 마냥 허무하지만은 않다.

새로 맞이할 한 해에도 내가 가진 즐거움의 씨앗들이 새로 뜯은 1년과 만나 어떤 추억을 만들어낼지 상상하니, 재미있는 드라마의 재생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처럼 설렌다.

지금 내 앞에 펼쳐지는 드라마를 열심히 즐기되 다음에 볼 드라마가 될 씨앗을 뿌리는 일도 게을리하지 말아야지 생각해 본다. 취미라는 씨앗을.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 브런치와 블로그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시민기자 그룹 '워킹맘의 부캐'는 일과 육아에서 한 발 떨어져 나를 돌보는 엄마들의 부캐(부캐릭터) 이야기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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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만드는 삶을 지향합니다. https://brunch.co.kr/@sword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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