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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 브래디 미카코 | 사계절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 브래디 미카코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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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어째서 '좋았던 시절'만 되뇔 뿐 새 가치관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것, 영국의 EU 탈퇴, 성희롱과 약자에 대한 괴롭힘, 정치가 부패하고 기득권 세력만 잘사는 것도 아저씨들 탓이다. 자유주의가 후퇴하는 것, 살기 힘든 세상이 된 것, 배외주의로 사회가 악화되는 것도 전부 아저씨들이 나빠서다. 그들은 모든 악의 근원이며, 불안한 정세와 사회 쇠퇴의 원흉이다. 이 정도면 아저씨들을 사탄이나 다름없다며 공격하는 것 아닌가?

작가는 이렇게 시작한다. 영국에서 아저씨 이미지는 한국에서 '꼰대'나 '개저씨'다. 아저씨들이라고 젊은 사람들이 나아갈 길을 막고 싶을까. 조용히 물러나 편히 살고픈 심정이 시시때때로 솟는다. 어르신에게 양보하는 것이 미덕인 시대는 사라지고 이제는 길을 막고 섰다고 욕먹는 시대일까.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는 베이비 붐 시대에 태어나 노동자로 살다 인생 황혼을 맞은 영국 아저씨들 일상을 곁에서 들여다보듯 만난 책이다.

중국인 집에 벽돌을 던지는 일이 벌어지자 막기 위해 나선 아저씨들이 사실은 EU 탈퇴 찬성파다. 브렉시트를 찬성한 사람은 외국인을 혐오할 것만 같다. 그러나 노동계급 아저씨들은 외국 국적 사람들도 존중받으며 생활해야 한다고 믿는다.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돌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아동센터와 도서관 등이 있어 지역 허브 역할을 했던 현대식 건물이 긴축재정으로 사라졌다. 갈 곳 잃은 덩치 큰 노동계급 아저씨가 쪼그라든 아동센터 곁 책 몇 권 놓인 장소에서 일상을 보낸다. 그러다 아이들과 친해지고 돌봄을 거든다. 공공성이 사라진 정치와 그것이 일상에 미치는 디테일을 드러낸 장면이다.
 
강아지를 이길 수 없어
 
"나는 온 세상을 여행하며 알게 되었어. 노동조합이 약한 나라의 노동자는 슬픈 존재라는 걸." 노동계급 아저씨의 얘기다. 성장기에 살아온 체험과 성장 없는 고용 빙하기를 겪은 축소사회 체험은 다르다.

지금은 앞다퉈 근면하게 일하지만, 희망은 발견하기 어렵다. 시대가 다르니 대항문화도 다르다. 그러나 의외의 현상도 있다. 노동당을 지지하는 젊은 청년층 사이에서 요즘, 사회주의는 새로운 밴드 이름이나 제일 잘 나가는 클럽 이름처럼 멋지게 들린다.

아저씨들은 삶에 눌려 알코올 의존증이나 이혼을 경험하고, '내 인생 따위에 이런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지'라고 생각한다. 위안이고 체념이다.그러나 "절망 따위는 위쪽 계급 놈들이나 하는 거야"라며 살아낸다.

이것이 '노동계급의 합리성'일까. 당혹스럽다. 타오르던 '노동계급의 혁명성'은 추억으로 사라진 걸까. 복지가 무너지고 시장에 충성하는 세계에서, 아파도 진찰받기 어려워 견디는 독한 현실에서 투쟁 대신 왜 EU 탈퇴를 선택했을까?

EU에 내는 분담금을 NHS(국민보건서비스)로 돌릴 수 있다는 유언비어가 탈퇴파 승리의 결정적 요인 중 하나였단다. 이렇게 멍청하다니.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유튜브를 비롯해 세상에는 거짓이 더 진실처럼 느끼게 만드는 장치가 작동한다.

"원래는 빈부 격차나 인종, 국정 등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무료로 치료한다는 아름다운 이념으로 발족한 NHS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는 선망과 증오, 분열을 낳게 된 것이다." 작가는 그 원인이 '긴축재정' 때문이라고 몇 번이나 강조한다.

'이념과 이념이 대립하는 시대에서 사람과 사람이 대화하는 시대로'라는 말을 영국의 정치가와 지식인 들이 자주 한단다. 이런 말이 탁상공론이 아니라 진짜로 시작되는 곳은 언론이나 학회, 회의 같은 곳이 아니라 항상 저변이다. 작가는 그러한 곳을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장례식 등 나이 든 노동계급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우리는 강아지 발뒤꿈치도 못 따라가." 나이 들고 병든 사람에게 가장 위안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점점 약해지는 국가의 복지도 아니며 먹고 사느라 정신없는 자식도 아니다. "역시 개들은 어떻게 해도 이길 수가 없다"라는 얘기에 씁쓸함이 깊게 밀려든다.
 
로맨스는 죽지 않아
 
"우리의 NHS를 내주지 않겠다."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에 참가한 사이먼, 트럼프가 영국에 온다는 소식에 시위 시간 한참 전에 도착해 앞자리를 차지한 그의 사진이 여러 언론에 실린다.

그 사진에는 인종차별에 반대한다는, 환경파괴에 반대한다는 각종 플래카드를 든 사람들의 모습이 함께 있다. 시위 참가자 대부분은 EU 탈퇴 반대파다. 사이먼은 그들과 다른 투표를 했지만, 함께 트럼프 반대 시위를 한 것이다. 그의 비일관성보다는 여러 색깔의 모자이크 같은 삶이 보인다. 우리는 성·계급·계층·인종 등 다양한 관계가 교차하는 삶을 산다.

사이먼은 바로 그 시위에서 20대에 사귄 여인과 닮은 여인을 만났다. 가슴 설레는 사랑이 움튼다. 작가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썸타는 그들 뒷모습을 보며, "좀 섹시하지 않은가?"라며 "베이비 트럼프가 가져온 메이비한 관계"라고 한다.

로맨스는 죽지 않는다. 인종과 국경보다 강력한 마음의 철벽은 외국인을 혐오하는 배외주의다. 그러나 베트남이나 아프리카에 날아가 사랑을 나누는 노동계급 아저씨들이 보여주듯 "사랑은 배외주의를 관통하는 최종병기다."

유럽연합 탈퇴를 둘러싼 토론 방송에서는 베이비부머 세대 지식인과 밀레니얼 세대 지식인이 마지막에 가서 거의 싸우다시피 했단다. 탈퇴 투표를 한 세대에 대해 '부머 책임론'이 거세지고 '배신자 세대'라거나 '지들은 탈퇴로 인한 손해를 보기 전에 죽을 거면서!'라는 말까지 나온다.

함께 나누는 정책을 취했더라면, 아랫세대가 연장자를 부담으로 간주하고 "좋은 시절에 섹스도 많이 하고 좋은 음악을 듣던 사람들"이라며 질시하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 "정말 몇 번을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긴축재정이라는 놈은 죄가 많다."

한국 언론에 영국의 7계급 구분이 소개된 적이 있다. 그러나 2016년 영국 기사에 따르면 영국인 대부분이 자신을 노동계급이라고 여긴단다. 계급 울타리를 넘어 '계급 간 이동성'을 주장하는 것은 별 의미 없는 시대다. '백인노동계급'이라는 표현이 나올 만큼 백인 중에서도 소외층이 많지만, 이런 표현이 묻어버리는 존재도 있다.

노동계급 안에도 다양성이 존재한다. 이주 노동자와 백인 노동자는 같은 조건을 공유한다. 계급 분열을 조장해 서로 싸움을 붙이는 '분할과 통치'가 아니라 '연대와 투쟁'이 길이다. '분리와 따돌림'이아니라 '섞임과 어울림'이 절실한 것은 영국만이 아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는 내내 영국 특유의 블랙 유머가 짙게 밴, 유물이 되어가는 노동계급 아저씨들의 웃픈 장송곡을 듣는 기분이었다. 이런 감정을 추스르느라 약간 당혹스러웠다. 책은 일상의 디테일을 통해 브렉시트, 복지 축소, 재정감축의 결과가 어떤 처참한 결과를 낳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 안에 로맨스가 살아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조건준 아유 대표가 쓴 글입니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비정규노동> 11,12월호 '책 만나기' 꼭지에도 실렸습니다.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 영국 베이비부머 세대 노동 계급의 사랑과 긍지

브래디 미카코 (지은이), 노수경 (옮긴이), 사계절(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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