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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적, 1970년을 전후한 그때는 책이 귀했다. 집에 있는 책이라고 해봐야 교과서가 전부나 마찬가지였고 학교 도서관의 장서들도 변변치가 않았다. 그 시절 우리들 가까이 있었던 책은 만화였다. 도서관은 멀었고 만화방은 가까웠던 우리에게 만화책은 유일하다시피한 볼 거리였고 읽을 거리였다. 

그러나, 만화책은 읽으면 안 되는 책이었고 읽다가 들키면 혼나는 책이었다. 만화는 공부에 방해가 되는 책이라고 어른들은 생각하셨다. 그래서 학교에서 만화책을 보다가 들키면 회초리로 맞는 것은 물론이고 책도 압수당했다. 만화는 그런 취급을 받았던 책이었다.

만화로 쓴 소설 <정가네 소사>
 
정용연 작가가 쓰고 그린 <정가네 소사>
 정용연 작가가 쓰고 그린 <정가네 소사>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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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자라서 그런지 나이가 좀 있는 기성세대들은 만화책을 좀 낮춰 보는 경향이 있다. 소설이나 시는 뭔가 그럴듯하게 여기지만 만화는 하급 문화인양 생각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몇몇 작가의 작품은 존중하고 높이 사지만 그 외의 만화는 그저그렇다고 생각했다. 어떤 작가들이 있는지 또 어떤 만화책이 있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미리 지레짐작해서 만화를 낮게 폄하했다.

그랬는데 정용연 작가가 쓰고 그린 <정가네 소사(鄭家네 小史)>란 만화책을 읽고 그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책 제목 그대로 '정씨 집안의 소소한 이야기'를 담은 책인데도 그 안에 우리 현대사가 다 담겨 있었다.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역사가 있다'라는 작가의 말 그대로였다. <정가네 소사>는 한 편의 역사 소설이었고 대하소설이었다.

<정가네 소사>는 일제시대 때부터 시작해서 1970년대를 넘어 현재까지 그리고 있다.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그 안에 우리나라의 역사가 담겨 있다. 등장하는 무대 역시 만주 들판에서부터 전라도 김제와 서울 청계천 등등 넓디넓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은 또 어떤가. 정용연 작가의 친가와 외가 어른들이 주요 등장인물이지만 그 외의 보통 사람들도 나그네가 아닌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심지어 집에서 키웠던 개와 곤충 등을 담은 이야기도 있다.

이 모든 이야기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다. 어느 누구 하나 소위 특별하다고 할 만한 사람이 없다. 내 주변에서 흔히 볼 법한 그런 장삼이사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작가는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생명을 불어 넣어 준다. 그래서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생생하게 살아 있다.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역사가 있다고 작가가 말했듯이 등장인물 모두에게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고 그것은 곧 그들의 역사다. 그래서 이 책은 그 시대를 담은 역사서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이야기

'아버지의 이야기는 언제나 술과 함께 시작되었다'. 정가네 소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술이 거나해지면 아버지의 이야기는 6.25에서 만주로 옮겨 갔다'. 작가는 이야기의 세계로 독자들을 이끌어 간다. 

해방이 되자 만주에 살던 저자의 할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고향을 향해 길을 나선다. 도중에 아버지의 어머니, 곧 저자의 할머니가 길에서 돌아가신다. 망자를 땅에 묻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아 표시를 하였다. 어린 아들(저자의 아버지)은 나중에 돌아와서 반드시 어머니를 고향으로 모시고 가겠다고 무덤 앞에서 맹세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그러니 저자의 아버지는 한이 맺혔고, 술만 드시면 옛날이야기를 하셨다. 

정용연 작가가 풀어놓는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내 이야기인양 생각되는 곳들도 있었다. 누에를 쳤던 이야기는 특히 더 그랬다. 누에를 치기 위해 '잠실'을 지었던 거며 뽕밭에 가서 뽕잎을 따오는 이야기 등등, 마치 어린 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때는 집집마다 누에를 쳤다. 누에는 돈이었다. 고치를 팔면 돈이 생겼으니 방이란 방에는 다 누에를 쳤다. 방마다 누에를 쳤으니 잘 곳이 없어 한쪽 구석에서 쪼그리고 잠을 자기도 했다.
 
정용연 작 <정가의 소사>
 정용연 작 <정가의 소사>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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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을 써서 꿩을 잡는 이야기도 내 이야기인양 보았다. 우리 막내 삼촌도 꿩을 잡았다. 겨울이 되면 막내 삼촌은 꿩을 잡기 위해 모종의 작업을 했다. 콩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은 다음 그곳에 싸이나(청산가리)를 넣고 촛농을 떨어뜨려 구멍을 봉한다.

꿩이 올 만한 장소에 싸이나를 넣은 콩을 뿌려두면 꿩이 콩을 먹고 날아가다가 독이 몸에 퍼져 땅으로 떨어진다. 그러면 그 꿩을 가져와서 꿩국을 끓여 먹었다. 그때는 다 그렇게 꿩을 잡았는데 저자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싸이나는 청산가리(시안화칼륨)를 일컫던 말로 독극물이다. 지금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때는 그렇게 꿩을 잡았다. 야생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식도 없었고 독극물 사용에 대해서도 그리 엄하지 않았다. 먹고 살기에 바빴던 옛날이었다.  

가슴 아픈 이야기도 있었다. 해방과 전쟁통에 좌우 이념 갈등으로 숨져간 사람들 이야기였다. 전쟁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순호 당숙이 겪었던 고생과 외로움에 같이 가슴 아팠고 똑똑해서 집안의 기대를 받았던 큰 형이 끝내 사관학교를 못간 이야기는 더더욱 안타까웠다.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또 다른 당숙 때문에 큰 형은 꿈을 접어야 했다.

아버지의 사촌 형인 저자의 당숙은 빨치산 대장이었다. 광주고보에 다녔던 당숙은 졸업 후 은행에 취직해 잘 먹고 잘 사는 게 인생의 다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숙은 그보다 가치 있는 일들이 있다고 여겼다. 남자로 태어나 일생을 걸 만한 일 말이다. 당숙은 광주고보 시절에 사회주의 서클의 장을 맡았고 전쟁이 터지자 자연스레 빨치산 대장이 되었다. 당숙은 신출귀몰했지만 토벌대에 잡혀 총살을 당했다. 
 
<정가네 소사>
 <정가네 소사>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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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큰 형은 사관학교를 가고도 남을 점수였지만 면접에서 떨어졌다. 연좌제 때문이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족보에 이름조차 올라가 있지 않았던 당숙 때문에 그토록 꿈꾸었던 사관학교에 갈 수 없었다. 당숙은 국가는 물론이거니와 집안에서조차 철저히 버림을 받았다. 연좌제가 무서워 족보에도 올리지 않았던 것이다.  

7년 공들인 만화

<정가네 소사>는 모두 3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화는 그림으로 그린 소설이라더니 과연 그랬다. 정가네 소사는 한 편의 대하소설이었다. 만화가는 그림만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를 만드는 소설가이기도 하다. 또 만화가는 마치 영화감독처럼 이야기를 연출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스토리가 있어도 연출이 받쳐주지 않으면 독자들의 호응을 얻기 힘들 것이다. 또 그림이 좋아도 연출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독자들은 곧 시선을 돌려 버린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정용연 작가는 소설가이자 감독이 분명했다. 이야기들을 구성하는 힘이 대단했다. 

<정가네 소사>를 보고 있노라니 작가의 노고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갔다. 어느 그림 하나 허투루 그린 게 없었다. 작가가 어린 시절을 생생히 기억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 기억을 완벽히 그림으로 살려낸 것이 더 놀라웠다. 아마도 저자는 자료 수집과 고증에 시간과 노력을 많이 들였을 것이다. 
 
<정가네 소사>
 <정가네 소사>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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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연 작가는 이 작품의 완성에 7년이라는 시간을 바쳤다고 한다. 이 작품으로 저자는 만화가로서의 자신감을 얻었다. '만화'에 대한 자신이 없어 다른 길을 걷기도 했지만 '만화'가 자신의 길임을 알고 용맹정진했다. 화두를 붙잡고 깨달음의 길을 찾아 가는 선승들처럼 정용연 작가는 <정가네 소사>에 몰두했다.

우리 모두는 역사적 존재다. 누구에게나 하루하루의 삶이 있고, 그게 쌓여 역사가 된다. 역사란 국가나 민족 등의 집단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또한 개인의 삶이 축적된 결과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들과 누나, 동생, 이들 모두는 개인적인 존재이면서 역사적 존재이기도 하다. 역사란 뛰어난 누군가의 힘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대개는 이름 없는 다수에 의해 만들어진다. 오늘의 내 일상도 역시 한국 현대사가 되고 인류 역사가 되는 것이다.' - 저자의 말 중에서

역사 책 속에는 이름 있는 사람만 기록되지만 이름 없는 우리의 삶 역시 역사다. 역사라는 거대한 강물에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날들은 우리의 역사라는 걸 <정가네 소사>는 말해 주었다.

[세트] 정가네 소사 세트 - 전3권

정용연 (지은이), 휴머니스트(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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