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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난다. 베이고 찢기고 피가 흐른 자리에 딱지가 앉는다. 시간이 지나면 딱지가 떨어진다. 조금 가렵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아진다. 어떤 상처는 흔적을 남기지 않지만, 어떤 상처는 흉터를 남긴다. 흉터는 옛 상처를 기억하게 한다.

흉터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때로는 아물지 않는 상처도 있다. 낫지 않고 진물이 흐른다. 상처가 벌어지고 진물이 흐르고 고름까지 찬다. 상처가 덧나는 것이다. 이럴 때면 항생제를 처방받아 감염을 막고, 필요한 경우엔 살을 도려내야 할 수도 있다.

몸의 상처라면 그쯤이겠지만, 마음의 상처라면 얘기가 다르다. 상처에 진물이 흐르고 고름이 찼는데도 가슴 깊이 묻어두고 돌아보지 않는 경우가 있다.

우연히 TV를 켰다가 어느 다큐멘터리를 봤다. 아이 여럿을 입양해 기르는 어느 부부의 사연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장애인 보호시설에서 아이들을 돌봤다는 부부는 12년 동안 8명의 아이를 입양했다고 했다. 하나같이 사연 많은 아이들이었다. 저를 낳은 부모에게, 저를 입양했다 다시 버린 이들에게 상처 입고 부서진 아이들이었다. 이들을 입양한 부모는 온갖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아이 하나하나를 보듬고 끌어안았다.

아이들 여럿이 장애가 있었다. 타고난 장애가 있는 아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버려지고 고통 받는 과정에서 생긴 퇴행성 발달장애였다. 인간은 제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 도망친다고 했다. 성장하길 포기하고 제 안의 여린 상자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아이들의 눈에선 두려움과 불안이 읽혔다. 이 아이들을 입양한 부부는 아이들이 제 마음의 피신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응원하고 독려했다. 지난한 과정이었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내내 눈물을 펑펑 쏟았다. 부모 없이 버려진 아이들, 육체적이며 정신적으로 온전한 상태도 아니었던 아이들을 기꺼이 품 안에 품은 그 부부가 너무나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이들이 마주했을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니 내가 살아온, 또 살고 있는 세상 역시 다르게 보였다. 당연하지 않았다, 나를 둘러싼 무엇도 당연하지 않았다.
 
책 표지
▲ 허구의 삶 책 표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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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상처를 안고 산다는 것

이금이 작가의 소설 <허구의 삶> 속 두 주인공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고 산다. 주인공인 상만도, 그의 친구 허구도 모두 상처가 있다. 하나는 제 상처를 깊이 파묻고 그 위에 거짓으로 성채를 쌓는다. 다른 하나는 제 상처를 외면하고 온 세상을 떠돈다.

소설의 도입부, 상만은 고교시절 동창들이 있는 네이버 밴드에 가입해 글 하나를 올린다. 장난인 것처럼 쓰인 글은 다름 아닌 부고장이다. 상만의 단짝이던 허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다.

이야기는 30년 전으로 훌쩍 날아간다. 상만이 충청북도 제천에 사는 고등학생이던 시절이다. 상만은 학교를 마치면 늘 쌀을 배달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다. 상만에겐 부모가 없다. 아버지는 어릴 적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돌아가신 지 오래다. 고아원에 가는 대신 쌀집 주인인 외삼촌을 따라 제천으로 왔는데, 외숙모와 사촌들은 그를 살갑게 맞아주지 않는다.

학교가 끝나면 가게에서 일을 돕기 바쁜 상만에겐 다른 것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런 그 앞에 서울에서 전학을 왔다는 허구가 나타난다.

시간여행자와 쌓아가는 기묘한 우정

상만의 눈에 비친 허구는 편한 삶을 사는 녀석이다. 아버지는 과수원농사를 맡겨두고 부동산 사업까지 하는데 수입이 꽤나 되는 눈치다. 어머니도 허구에게 여간 다정한 게 아니다. 거기다 사랑을 독차지하는 외아들이니, 상만에게 없는 것들이 허구에겐 죄다 있다.

쌀 배달을 갔다가 허구와 친해진 상만, 둘은 어딘지 기묘한 우정을 쌓아나간다. 허구와 친해지며 그의 방에서 공부하게 된 상만은 마치 제게도 가족이 생긴 양 즐거운 생활을 이어나간다. 허구의 부모는 아들의 친구인 상만에게도 살갑게 대해준다. 괴롭고 외로웠던 상만의 삶에 숨이 트이던 시절이다.

이야기는 허구의 방에서 노트 한 권을 발견하며 급물살을 탄다. 노트엔 허구가 끼적인 습작 소설이 들어있다. 선택 하나하나마다 갈라져서 다른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는 평행우주 세계관, 그 안에서 허구와 또 다른 허구 K가 서로의 세계를 오가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지어낸 이야기이겠거니 생각하는 상만은 이후 벌어진 사건들을 겪으며 허구가 어쩌면 진짜 시간여행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빠져든다.

상만의 삶은 묘사된 것보다 고통스러웠을 수도 있겠다. 기댈 곳 없이 제 살 곳마저도 위협받으며 아주 멀찍이 어딘가로 떠나야겠다고 생각하는 상만의 삶은 서글프다. 멀리 가겠다는 건 오직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부모 없이 외삼촌 집에 더부살이하는 사정을 다른 누가 알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외삼촌 가족이 상만을 기꺼이 가족으로 맞아주었다면 달라졌겠으나 그렇지 못해 그는 겉돌고 겉돈다. 그러면서도 제 역할을 다하려 열심히 쌀 배달을 나선다.

제 상처를 대하는 소년들의 자세

상만이 쌓아올린 성은 비록 그것이 제 상처를 외면한 뒤에 쌓은 것이라 할지라도 대단하고 대견하다. 제 힘으로 제천을 떠나 서울에서 터전을 닦아낸 것, 회사에서 인정받고 월급쟁이 사장일지라도 알만한 업체 대표 자리에까지 오른 것 모두가 빛나는 성취다. 그 과정에서 상만은 저의 상처와 고통을 어디에도 알리지 않는다. 제 아내와 자식에게까지도.

상만은 알지 못했으나 허구의 삶 역시 고통스러웠다. 소설 후반부에 드러난 이 같은 사실은 상만은 물론 독자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안긴다. 그저 편하게만 자란 줄 알았던 허구의 삶이 실은 제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큰 고통에 쌓여 있었다는 걸 알고서 그를 바라보는 상만의 시선이 완전히 뒤바뀐다.

상만과 허구는 다른 것 같지만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의 상처를 대한다. 상만은 제 상처를 아는 이가 없는 곳으로 떠나 마치 고통이 없는 것처럼 위장하고 살았다. 허구는 제 나라를 떠나 죽기 직전까지 떠돌이생활을 한다. 둘 모두 제 상처를 직면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같다. 상만은 정착했고, 허구는 떠났다는 게 다를 뿐이다. 그곳에서 그들의 상처는 덧나고 고름이 찼다.

다큐에서 본 입양된 아이들을 떠올린다. 그들을 입양한 부부를 생각한다. 부부는 임신한 아이를 여러 차례 유산한 고통을 갖고 있었다. 그 상처를 생각하며 눈물을 쏟던 그들이 새로운 아이를 각자의 고통으로부터 구원한다. 하나하나 구원한 아이들이 어느새 여덟이나 됐다. 여덟 개의 우주를 구원한 것이다.

어쨌든 살아 있기에 가능하다

상만과 허구, 허구의 부모를 떠올린다. 이들은 여물지 않은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를 갖고 살아가야 했을까. 다큐에서 퇴행성 발달장애를 겪는 아이들은 그 상처를 마주하고 치유할 수 있을까. 새 부모가 된 부부는 이들의 상처가 덧나고 고름이 차지 않도록 보살펴주게 될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더 나은 선택뿐이다. 아이를 잃은 부모가 다른 아이들을 입양해 그들을 구원하듯이, 허구의 죽음으로부터 깨달음을 얻은 상만이 제 가족에게 진짜 자기의 모습을 내보이려 하듯이, 입양된 여덟 아이도 제게 찾아올 상처와 마주해 더 나은 선택을 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상처를 입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같을 것이다.

책을 덮고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잊지 않기로. 살아 있기에 아직 많은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허구의 삶

이금이 (지은이), 문학동네(2019)


태그:#허구의 삶, #이금이, #문학동네, #한국소설, #김성호의 독서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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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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