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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주씨는 속초시에 살며 언니들과 함께 고속터미널 근처 식당운영을 돕고 있다. 장 씨의 가족은 강원도 묵호에서 살다 속초로 이사 왔다.
 
"제 아버지가 장천식이라는 사람이에요. 아버지는 딸 5명에 아들 2명을 낳으셨어요. 원래는 8남매였는데 한 명이 일찍 죽어 7남매가 되었죠. 내가 막내예요. 아버지가 북에서 피난 내려와 가호적을 만들다보니까 형제들 나이가 제 나이보다 조금씩 줄었어요. 우리 주거지는 묵호였지만 아버지는 명태바리를 하러 바다에 자주 나가기 때문에 명태어선이 많은 고성 거진으로 올라가 몇 달 씩 머물다 오곤 했어요. 그때마다 내가 따라갔기 때문에 아버지 사정을 잘 알고 기억하고 있죠."
 
부친 장천식은 대양호라는 선박의 기관장이었다. 68년 당시엔 교통상황이 좋지 않아 명태잡이를 위해서는 거진까지 올라가 그곳에서 임시거처를 마련해 지내야 했다.  장씨의 부친은 대양호 기관장으로 함께 조업할 선원과 그들의 가족을 태워 묵호에서 거진까지 이동했다. 거진에서 겨울 내내 명태조업을 하다가 이듬해 봄이 되면 다시 묵호로 돌아왔다.

함께 올라간 가족들은 거진에서 각자 방을 빌려 생활했다. 장씨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따라 거진으로 올라가 생활했다. 물론 당시에는 경제상황이 어려워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심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명태잡이를 위해 오후에 출항하면 다음날 아침 들어올 때까지 먹을 도시락을 싸야 했다. 어머니와 자신은 굶더라도 부친의 도시락은 빼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 군용 반합에 밥과 반찬을 넣은 도시락을 부친은 매일같이 들고 다녔다고 한다. 고생은 묵호에 남은 가족 역시 매한가지였다.
 
"집이 가난해서 언니는 학교를 다니지도 못했어요. 학교를 다닐 시간도 없었지만, 집안일만 해도 엄청 바빴거든요. 지금처럼 수돗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서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밥을 해야 했어요. 또 난방을 하려면 나무를 구해 와야 하는데 언니가 근처에 있는 목공소에서 나오는 자투리 나무들을 해다가 밥 해먹고 살았어요."
 
납치된 아버지, 남은 가족들

장씨의 부친이 승선한 대양호는 1968년 11월 8일 밤 12시경 북한 경비정에 납치되었다. 당시 납치사실을 알게 된 것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였다. 그 당시는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이다 보니 라디오에서 "대양호가 납치되었다"고 하면서 선원 명단이 방송되었다고 한다. 라디오를 듣던 모친은 부친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통곡을 했다고 한다.

거진에는 고모 이외에는 아무 연고가 없었다. 부친의 납북 소식을 듣자마자 장씨와 모친은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 고모 집에 찾아갔다. 그러나 고모 역시 걱정하며 우는 것 이외에는 달리 손쓸 방법이 없었다. 장씨 일행은 고모 집에 이틀 가량 머물다 묵호로 내려왔다고 한다.

당시 묵호 집에 함께 살고 있던 친할머니는 아버지가 함께 돌아오지 않은 이유를 궁금해 했다. '아들은 왜 같이 안 오냐, 어디 갔냐'고 물어보는 할머니에게 납북되었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어 '며칠 있으면 들어 올 것이다'라고 거짓말을 둘러댔다.

그러나 부친이 납북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실을 알게 된 할머니는 한참을 통곡하시다 자리에 몸져누웠다. 아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밥을 먹겠느냐며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다. 모친은 남편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틈틈이 서울에 있는 대한적십자회에 올라가서 납북선원 귀환 요구 시위를 벌이고, 생존 여부 확인요청을 했다.

부친의 부재와 그런 부친을 찾기 위해 집 밖으로 뛰어다니는 모친, 몸져누운 할머니, 집안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되었다.
 
"어른들이 모두 없으니 누군가는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언니가 14살 나이에 남의 집 식모살이를 가서 일을 하며 밥을 얻어왔어요. 나는 막내다 보니까 오빠들이 많이 챙겨줬어요. 언니나 오빠들이 고생을 했어요. 그때는 공장에 가는 것보다는 동네 남의 집 일하는 게 더 쉬워서 남의 집에 가서 식모살이 하고 밥을 얻어먹는 것이 유일한 일이었어요. 제일 큰 오빠는 묵호항에 가서 꽁치 배를 타기까지 했다니까요."
   
납북귀환어선
 납북귀환어선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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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귀환, 그러나

그렇게 고생하며 생활하던 어느 날, 서울 대한적십자에서 부친의 생환과 관련한 통보가 전해져 왔다. 1969년 5월 28일 대양호가 거진항으로 귀환한다는 것이었다. 모친은 소식을 접하자마자 곧장 아이들과 함께 거진으로 올라갔다. 귀환 날 거진항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있었고, 고모도 이미 항구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거진항으로 들어온 납북귀환 선박과 선원들은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굴비 엮이듯 줄에 묶여 배에서 내렸다. 가족들은 10미터 정도 거리에서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포승줄에 묶인 선원들은 버스에 태워져 고성경찰서로 끌려갔다. 고성경찰서에 다녀온 큰 오빠는 부친이 고성경찰서 정보과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결국 면회가 불허되어 부친과 말 한마디 나눠보지 못한 채 가족들은 허무하게 묵호로 돌아와야 했다.
 
"부친이 고성경찰서에 있는 동안 면회 한번 못했던 엄마는 아버지가 강릉교도소로 이송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아버지 얼굴을 보기 위해 강릉교도소 구내식당 일용직 식모로 일하러 갔어요. 그곳에서 며칠간 교도소 생활하는 사람들 밥을 가져다주는 일을 했는데, 재소자들에게 밥을 나눠 주었고, 그러던 중 아버지와 마주치셨대요. 아버지에게 밥을 나눠줄 때 아버지를 보고 '영감 밥 많이 먹어라'라는 말만 하고 울면서 밥을 주고 왔더라고 하더라고요. 다른 말은 하지도 못하고 오직 그 말만 했다고 해요."
 
부친은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출소했다. 출소 뒤 부친은 형제들에게 혹여 배를 타더라도 묵호 앞바다에서만 조업을 하라고 당부했고, 어디를 가든 꼭 경찰서에 신고하고 가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일상을 조심하더라도 부친은 수시로 공안기관에 잡혀가거나 공권력에 의해 이유 없이 폭행을 당해야 했다.

돌연 사라지는 아버지... 그들이 지켜보고 있다
 
"아버지가 한 번씩 사라져요.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자주 잡혀가요. 한번은 식구들이랑 같이 밥 먹는데 어느 기관 사람이 찾아와서 장천식 나와 보라고 해서 아버지가 옷을 걸치고 나가서는 사라졌어요. 그렇게 갔다가 한 일주일에서 15일 씩 조사를 받고 와요. 올 때는 파김치가 돼서 와요. 어디서 맞고 왔는지 다리를 절뚝대고 가슴도 아파하고 힘들어 해요. 와서 며칠씩 누워 있어요. 그러면서 우리보고는 절대 밖에 못나가게 해요. 나가면 누가 붙잡아 간다고 하면서 절대 나가지 못하게 해요.

아버지가 참 인자하세요. 술을 안 드셨거든요. 이북에서 온 피난민이다 보니 자식을 귀하게 생각했어요. 혹시라도 집에 물건 하나라도 사오면 수사기관에서 와서 붙잡아가요. 어디 이북에서 돈을 받아서 산 줄 알고 잡아가서 조사를 하더라고요. 아버지가 일을 해서 상다리라도 하나 생기면 북한 공작금을 받아서 사는 건가 하는 거죠. 아버지가 감옥에서 나오고 부터 오징어가 그렇게 많이 나요. 그래서 내가 오징어를 안 먹어요. 아버지가 오징어 잡으러 가서 돈을 벌어왔는데 그게 그렇게 싫더라고요."
 
사복차림의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장씨의 집을 항상 감시했다고 한다. 그들은 주로 밤에만 오고, 골목골목에서 보이지 않게 장씨 가족을 지켜봤다. 비라도 오는 날에는 뒤뜰이나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 소리가 아닌 우산에서 떨어지는 빗물 소리가 들렸다. 눈이 오는 날 밤에 마당의 화장실에 가려고 하면, 흰 눈이 쌓인 마당에 어지럽게 찍혀 있는 발자국이 있었다. 그렇게 형사들의 감시가 심했다는 것이다.
 
"우리 집 부엌에 작은 창문이 있는데 사복경찰들이 거기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어요. 엄마가 밥하다가 사람얼굴을 보고 기겁을 했어요. 그럼 모른 척하고 엄마가 방으로 들어와서 산에서 사람들이 지키고 있다고 이야기 하더라고요. 그렇게 일상적으로 감시가 있었어요."
 
부친의 납북경력은 자식들의 '앞길'을 막는 장애가 되었다. 큰 오빠가 기관장 면허를 취득해 면허증을 찾으러 갔다가 부친의 납북이 문제가 되어 면허증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막내 오빠는 야간고등학교를 나와 동사무소 채용시험에 합격했음에도 신원조회가 문제가 되어 공무원을 포기하고 리어카에 노가리를 싣고 파는 일을 하며 살아야 했다고 한다. 장씨 역시 결혼 후 부친의 납북문제로 남편이 직장을 구하지 못하게 되자 4년 만에 시댁의 요구로 이혼을 해야 했다. 당시 장씨 나이 24세였다.

일찍 시작한 식모살이로 인해 형제들은 음식을 제법 잘 만들었다. 지금 형제들은 속초에서 식당을 꾸려가고 있다. 장씨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항상 간첩 딸이라고 왕따 당하며 살았어요. 아버지가 조사를 받고 늦게 들어오면 축 처져서 들어와요. 각목으로 맞아서 등, 어깨, 가슴이 막 멍들어 왔어요. 한숨을 쉬면서 아버지가 이야기하는데 집에 올라올 때 양쪽으로 팔짱을 끼워서 공동묘지로 데리고 가더래요. 그리고 어디 갔다 왔냐고 하면서 각목으로 막 때리더래요. 먹고 살려고 직장 갔다 왔다하면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바른대로 대라면서 각목으로 때리더라는 거예요.

아버지는 그렇게 당하고 나면 며칠 동안 일어나지도 못해요. 몸이 날 만하면 먹고 살려고 또 일하러 나가요. 나가면 한 며칠 있다가 안 와요. 오면 또 그렇게 끌려가서 매만 실컷 두드려 맞고 오는 거예요. 이게 한두 번이 아닌데 말도 못했어요.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니까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 당하고 정상적인 사람대접을 못 받게 되는 거예요. 자식의 도리로서 아버지가 그렇게 되는 것을 지켜보는 건 참 고통스러운 것이죠.

아버지가 벌어서 식구들 먹여 살려야 하는데 그렇게 자꾸 끌려가니까 집안 경제가 말이 아니었죠. 매일 눈물로 살았어요. 굶는 것도 속상하고 힘든데 아버지 한 번씩 끌려가지, 매일 감시당하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어떤 고통인지 모를 거예요. 그런 억울한 일이 있다는 것을 좀 밝혀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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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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