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헌법 제27조 제3항입니다. 하지만 이 헌법 조항은 잘 지켜지고 있지 않습니다. 재판 지연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판결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 탓에 실질적인 구제를 받기 어렵거나 당사자가 사망했다면, 정의가 실현됐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오마이뉴스>는 '정의의 유효기간'이 지난 재판 지연 사례를 추적하고, 우리보다 먼저 사회적 논의를 진행한 독일에서 그 대안을 찾고자 합니다.[편집자말]

승소 판결에 눈물 흘리는 일본 강제징용 피해자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중 유일 생존자 이춘식 씨와 고 김규수 씨 부인이 지난 2018년 10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강제징용 피해자 원고 4명이 신일철주금(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의 재상고심에서 승소한 뒤 기뻐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유성호

2018년 10월 30일, 94세의 이춘식씨가 휠체어를 타고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 들어섰다. 이 날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철주금(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의 재상고심이 열리는 날이었다. 이춘식씨는 이 재판의 원고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애초 지난 2005년 4명의 원고가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이 13년간 최종적인 판단을 미루는 사이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홀로 '승소 판결'을 받은 순간, 이씨의 표정은 덤덤했다. 하지만 법정 밖으로 나온 이씨의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그는 말했다.

"재판에서 이겼는데, 오늘 나 혼자 나와서 마음이 슬프고 눈물이 많이 나오고 울고 싶어요."

법원의 판결을 기다리다 원고 세 명이 사망한 이 소송은 대표적인 '재판 지연' 사례로 꼽힌다. 대법원이 재상고심에서 새롭게 제기된 쟁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5년 3개월 동안 선고를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씨가 승소 판결을 받고도 서러운 눈물을 흘려야 했던 이유다.

만약 재판이 별다른 이유 없이 미뤄질 때, 법원을 압박할 수 있는 '최소한의 법적 장치'가 있다면 어떨까. 당사자들이 무력하게 재판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판사에게 '경고장'을 날리고, 실제 재판이 지연됐을 때 보상까지 요구할 수 있다면?

독일은 지난 2011년 이미 그런 장치를 마련했다. 이른바 '재판지연보상법'으로 불리는, 법원조직법 198조(§ 198 GVG)가 바로 그것이다. 이에 따르면, 소송당사자는 재판을 지연시키는 재판부에 지연 경고(Verzögerungsrüge)를 할 수 있고, 이후 과도한 재판 기간으로 불이익을 받은 경우 상급법원 등에 보상 청구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재판 지연으로 인해 받을 수 있는 손실보상액은 1년당 1200유로(약 165만 원)에 이르며, 이 금액은 법원의 판단에 따라 조정될 수 있다.

미하엘 브레너(Prof. Dr. Michael Brenner) 예나 프리드리히-쉴러 대학교(Friedrich-Schiller-Universität Jena) 법대 교수는 지난 2011년 3월 독일연방의회에서 해당 법안의 공청회가 진행됐을 당시 참여해 발언한 학자 중 한 명이다. 지난 10월 28일, 독일 현지에서 그를 만났다.

브레너 교수는 이 법이 재판 지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만능 열쇠'가 아니며, 일정 부분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국가가 재판 지연을 인정하고 책임진다는 측면에서 "한국에서 비슷한 법이 도입되면 충분히 의미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


"재판지연보상법은 누구도 괴롭히지 않는다"

10월 28일 <오마이뉴스> 취재진에게 '재판지연보상법'에 대해 설명하는 미하엘 브레너 예나 프리드리히-쉴러 대학교 법대 교수. ⓒ 오마이뉴스

- 먼저 '재판지연보상법' 도입 배경에 대해 묻고 싶다. 지난 2006년 유럽인권재판소가 독일 정부에 '재판 지연에 대한 권리 구제 방안이 없다'고 지적했다. 2010년 유럽인권재판소가 다시 이를 언급하고, 구제책을 마련하라는 판결을 내린 뒤 2011년 재판지연보상법이 통과됐는데. 그 과정에 대해 설명하자면.

"일단, 재판지연보상법 이전에 (재판 지연 문제에 관해) 기존에 독일법이 가지고 있는 몇 가지 대안이 있긴 했다.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등의 방안이 있긴 했으나, 실효성이 없었다. 그래서 2006년 유럽인권재판소에서 처음 이에 대한 지적이 나왔을 때 독일 내부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다만, 당시 이 법안이 정부가 신경 썼던 주요 사안은 아니어서 2011년에 법이 제정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 2011년 독일연방의회에서 법안 공청회가 열렸을 당시 참여했는데. 쟁점이 됐던 부분이 있나.

"국회 논의 당시, 이 법안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크진 않았다. 먼저 법무부가 독자적으로 법안 초안을 작성하고, 그 다음 독일연방의회 법사위에서 공청회를 열었다. 초안이 공개됐을 때 정계나 학계에서는 전체 내용에 대해 어느 정도 합의를 했다. 문장들만 조금씩 바꾸는 정도였다. 국회에서 법안을 처리할 때도 압도적인 득표 수로 찬성했다. (법안 논의 당시) 가장 중요했던 줄기는, '각 법원들이 (재판 지연에 대해) 재량권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게 한다'는 부분이었다."

- 왜 국회에선 별다른 '논쟁'이 없었을까. 관련법 제정을 명하는 유럽인권재판소 판결이 있었기 때문일까.

"예측한대로 유럽인권재판소의 판결이 가장 큰 원동력이 됐다. '1년 안에 재판 지연에 대한 권리 구제 방안을 마련하라'고 했으니 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독일의 경우, 법안 초안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정부와 법조계, 그리고 소송당사자를 모두 만족시킬만한 '절충안'을 만들었다. 국가 차원에선 예산에 부담되지 않았고, 판사 입장에선 (재판 지연을) 개별 사건 별로 따져서 판단하는 재량권을 부여했기 때문에 '신경 쓰이지만 감수할 수 있는' 수준의 법안이었다. 서로를 괴롭히지 않는 수준의, 아주 좋은 절충안이었다."

- 일각에서는 바로 그 부분을 지적한다. "판사들을 괴롭히지 않는 수준의 절충안"이기 때문에, 재판 지연에 대한 근본적인 구제책이 아니라는 건데.

"재판지연보상법의 의미는 두 가지다. 첫 번째, 재판 지연을 사전에 방지한다는 의미다. 신속한 재판을 위한 작은 수단이다. 다음으로, 지연된 재판에 대해 국가가 인정하고, 위로한다는 의미다. 국가가 좀 더 잘하겠다는 의지 표명이다. 그래서 1200유로를 보상할 수 있는 길을 만든 것이다.

'판사를 괴롭히지 않는 수준의 절충안'이라는 비판은 1차원적으론 다 맞는 얘기다. 특히 1200유로라는 액수가 너무 적다고 비판했을 텐데, 개인적으로 의미가 없는 숫자라고 생각한다. 만약 정말 영향력 있고 신속한 재판만을 추구했다면, 금액을 1만 유로(약 1381만 원)로 책정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법원의 돈이 많이 나가고, 판사는 이에 대해 책임을 져야해 신속하게 대응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했을 때, '법정의 수준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독일에는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뿐만 아니라 올바르고 충실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도 있다. 그래서 법관들에게 심한 부담을 주기 힘들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문제를 다 해소하려다 보니 중간자적 선택을 하게 된 건데, 내가 보기엔 좋은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재판지연보상법 이전엔 재판 지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이 법으로 인해 최소한의 '가능성'이 생긴 거다. 만약 이 조항에서 명시한 액수가 커졌다면, 독일법의 특성상 소송당사자가 입은 피해를 스스로 증명하고 증거를 제출해야 하는 의무가 생겼을 거다."

- '과도한 재판 기간으로 불이익을 받은 경우'라는 재판지연보상법의 내용이 다소 추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재판 지연을 판단하는 기준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독일 사법계에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개념이 '적합한 배상 수준'과 '지연된 재판 기간'이다. 각 개별 사건들에 따라, 법원의 재량권을 바탕으로 사건의 심각성, 복잡성을 따져 (재판 지연을) 판단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부작용을 우려하는데, 법은 그렇게 (추상적으로) 규정하지만 판례가 많아질수록, 경험 많아질수록 '이 정도 기간이면 적합하다, 적합하지 않다'는 통계가 법원 별로 쌓인다."

"한국, '상징적인 대안'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10월 28일 <오마이뉴스> 취재진에게 '재판지연보상법'에 대해 설명하는 미하엘 브레너 예나 프리드리히-쉴러 대학교 법대 교수. ⓒ 오마이뉴스

- 재판지연보상법은 (1) 재판이 지연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는 예방적 조치, (2) 재판이 지연됨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것을 보상해주는 사후적 조치를 목표로 한다. 재판지연보상법이 도입된 지 10여 년이 지났는데, 위 두 가지 입법 취지를 잘 실현해냈다고 보나.

"법안이 추구했던 두 가지 목적은 현재까지 상당한 효과 발휘하고 있다고 본다. 다만, 이 법이 판사들에게 (재판 지연에 대한) '부드러운 압력 행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재판 지연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가진 못했다.

잠깐 한국 상황을 언급해보자면,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노동자 손해배상 소송 원고 중 네 분 중 세 분이 돌아가고 한 분만 살아남아 13년 만에 승소 판결을 받았다고 들었다. 만약 비슷한 사건이 독일에서 발생했다면, 국가가 재판 지연을 인정한다고 했을 때 매해 1200유로의 보상금이 나오는 건데 이 사건의 중요성과 희생자의 피해 손실액을 따지면 1200유로는 애들 장난 수준이다. 그렇게만 본다면 의미가 없다."

- 그럼 재판지연보상법은 재판 지연 문제 해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고 보면 될까.

"한국에서 재판지연보상법처럼 재판지연보상 개념을 담은 법이 생긴다면, 독일처럼 상징적으로만 작동한다 하더라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국가가 재판 지연을 인정하겠다, 책임지겠다'는 내용을 두는 것만으로도 당사자 입장에서 충분히 큰 의미를 띠게 된다. '재판이 오래 걸렸든 아니든, 알 바 아니다' 국가가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없다는 거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손해배상 소송은 사회적으로 의미를 갖고 있는 사건이다. 법이 1200유로처럼 상징적인 보상 액수만 규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사례에서 충분히 법정에서 재량 발휘해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재판 지연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런 법을 도입하는 것말고도 판사를 증원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법이라는 게 계속 복잡해지고, 사건의 특수성도 높아지니까 더더욱 그렇다."

- 한국에서는 재판지연보상법에 대한 논의가 미진하다. 또 이 법에 대한 법조계의 입장도 엇갈리고 있는데.

"일단 독일의 재판지연보상법을 번역해서 한국에 좀 뿌려봐라. (웃음) 이런 법안을 작성할 때는 '누구도 괴롭히지 않을 만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입법자는 처음부터 강력하게 나가지 않고, 서로가 다 만족할만한 방안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소송당사자의 요구와 관심 사항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재판 지연에 대해 국가가 다 책임지진 못하더라도, 상징적이더라도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특히나 입법자가 노력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한국 사법부의 권위주의적인 분위기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사법기관이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근본 전제에는 시민들의 '동의'가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법원도 권위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시민들에게 법정을 오픈하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대화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은 맞지 않는다."

10월 28일 <오마이뉴스> 취재진과 만난 미하엘 브레너 예나 프리드리히-쉴러 대학교 법대 교수.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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