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01 04:49최종 업데이트 22.11.01 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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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들은 좀 더 화려한 마침표를 원하고, 주최를 하는 쪽은 가장 많은 관중과 입장 수입이 보장된 경기를 한 경기라도 더 치르고 싶어한다. 한국 프로야구는 4월부터 10월까지 매주 6경기씩 팀마다 144경기를 치러가며 1위부터 10위까지 순위를 가리지만, 그것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5위와 4위가 싸워서 이긴 팀이 3위와 붙고, 그 승자가 다시 2위와 대결하며, 그 승자가 1위 팀과 우승컵을 놓고 최후의 대결을 벌인다. 하지만 정규시즌 우승팀과 포스트시즌 우승팀 중 어느 쪽이 진정한 승자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고교야구의 인기가 절정에 달하던 1976년 한국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청룡기 고교야구대회는 4강전부터 패자부활 제도를 도입했다. 준결승에서 승리한 두 팀이 곧바로 결승으로 가는 대신 '승자결승'을 벌여 결승에 진출할 1팀을 다시 결정하고, 준결승에서 패배한 두 팀은 패자부활전(패자결승전)을 치러 이긴 팀이 승자결승전 패전팀과 다시 대결해 최종결승행 마지막 티켓의 주인을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이루어진 결승전에서 승자결승전 승리팀은 1승만 하면 우승할 수 있었고 패자결승전 승리팀은 2승을 해야 우승할 수 있었다.

이긴 팀은 올라가고 진 팀은 떨어지는 단순명료한 토너먼트 방식의 고교야구 대회에 굳이 패자부활 제도를 도입한 이유는 분명했다. 운이 개입할 여지 없이 명백한 강팀이 우승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싶은 팬과 선수의 마음 그리고 확실한 만원 관중 경기를 조금이라도 더 늘려 좀더 많은 관심과 수입을 얻고 싶었던 야구협회의 의지가 모인 결과였다.

청룡기의 패자부활전, 실업야구의 코리언시리즈

이듬해인 1977년에는 실업야구 리그에서 '코리언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1964년 리그가 확장되고 페넌트레이스 제도가 도입된 이후 13년간 한국 성인야구를 실질적으로 대표해온 실업야구였지만 해마다 춘계, 하계, 추계리그 우승팀을 따로 가렸을 뿐 한 해의 최강팀을 가리는 과정은 따로 없었다.

1977년에는 11개 팀이 두 개의 리그(롯데·한국화장품·한국전력·철도청·육군 경리단·공군 성무로 구성된 실업단 리그와 한일·상업·제일·기업·농협이 속한 금융단 리그)로 나뉘어 운영되고 1년은 전기 1, 2차 시즌과 후기 1, 2차 시즌으로 나누어 치러졌다.

그래서 4번의 시즌마다 실업단 리그와 금융단 리그 1위 팀의 맞대결로 우승팀을 가리고, 1, 2차 시즌 우승팀이 맞붙어 결정한 전기 리그 우승팀과 3, 4차 시즌 우승팀이 맞붙어 결정하는 후기 리그 우승팀이 그 해의 최강자를 가리는 7전 4선승제의 '한국시리즈'를 치르도록 했다. 그렇게 그 해 최종 우승에 성공한 것은 공격 부문 전관왕에 오른 신인 유격수 김재박이 마운드에서마저 맹활약한 한국화장품을 꺾은 경리단이었다. 

하지만 운영 방식은 해마다 바뀌다시피 했는데, 팀의 창단과 해체가 빈번했고 전력의 변화도 심했기 때문이다. 우승팀 선정방식이 지나치게 복잡하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이듬해인 1978년에는 시즌을 전기와 후기로 묶어 단순화하고 금융단과 실업단의 구분도 폐지해 전기 리그 1, 2위 팀인 경리단과 포철, 후기 리그 1, 2위 팀인 롯데와 성무가 풀리그 방식의 한국시리즈를 치렀다.

하지만 1979년에는 타이거스 리그와 라이온스 리그라는 이름의 양대 리그제로 환원되었고, 시즌도 다시 4개로 세분화되어 코리언 시리즈도 각 시즌 우승팀과 준우승팀을 모아 토너먼트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1980년에는 전기 리그 우승팀과 후기 리그 우승팀이 맞대결하는 방식으로 또다시 변화했다.

그렇게 방식은 오락가락했지만 실업야구의 코리언 시리즈는 늘 팬들을 열광시켰고, 1년 내내 한산했던 경기장에 매일 1만여 명 안팎의 대관중을 모아 뜨거운 관심 속에서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1978년에는 국가대표 에이스 이선희를 앞세워 3승을 거둔 경리단이 2승 1패의 성무, 1승 2패의 포철, 3패의 롯데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고 1979년에는 전 해의 4강인 성무와 경리단, 포철과 롯데 외에 한전과 농협, 상업은행이 진출해 각축을 벌인 끝에 포철과의 최종전 연장 11회 말 극적인 끝내기 홈런을 날린 이해창의 롯데에 돌아갔다.

그리고 군인 팀끼리 국내 최정상을 다툰 마지막 대결에서 육군(경리단)이 공군(성무)을 누르고 우승한 1980년을 거쳐 1981년에는 실업야구 시대의 마지막 전설이 만들어졌다.

그 해 전기 리그 우승팀 롯데는 후기 리그 우승팀 경리단을 만나 먼저 2경기를 내주고 3차전도 앞서가다가 동점을 내주며 1무 2패로 몰렸지만, 4, 5, 6차전을 모두 잡아내는 대역전극을 펼쳐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역전우승 자체보다도 더 팬들을 열광하게 했던 것은 김시진과 최동원이라는 24살 동갑내기 에이스들의 피 튀기는 맞대결이었고, 그중에서도 혼자 코리언 시리즈 6경기에 모두 출전해 42.1이닝을 던져 2승 1패 1세이브를 기록하며 역전 우승을 이끌어낸 롯데 에이스 최동원이었다.

1984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롯데의 최동원이 혼자 7경기 중 5경기에 나가 40이닝을 던져 4승 1패를 기록하며 우승을 이끌었을 때 어떤 이들은 경악했지만 어떤 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던 것 역시 3년 전 실업 무대에서 이미 예고편이 상영된 바 있었기 때문이다.

1981 최동원 그리고 1984 최동원

1982년에 창설된 프로야구 역시 전기 리그 우승팀과 후기 리그 우승팀이 맞붙어 최종 우승팀을 가리는, 실업야구와 똑같은 방식의 코리언 시리즈로 한 해를 마무리했다. 1982년에는 전기 리그 우승팀 OB가 후기 리그 우승팀 삼성을 꺾고 프로야구 초대 챔피언이 됐고 1983년에도 전기 리그 우승팀 해태가 후기 리그 우승팀 청룡을 제압하고 종합 우승자가 됐다.

전기 리그 우승팀은 후기 리그에 주축 선수들을 쉬게 하고 신예들에게 기회를 주며 팀을 정비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유리했고, OB와 해태는 그 점을 잘 활용했다.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의 첫 번째 영웅 김유동 창설 첫 해 한국프로야구는 김유동의 만루 홈런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의 홈런은 OB 팬들에게 아름다운 겨울을 선물했고, 5개팀 팬들에게도 한국시리즈 우승의 간절한 꿈을 품게 했다. ⓒ 두산 베어스

 
하지만 1984년 그 유리함을 지나치게 활용하는 사례가 불거지며 고민이 깊어졌다. 그 해 전기 리그를 우승한 삼성은 롯데와의 후기 리그 최종전에서 2진급 선수들로 라인업을 짰다.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확보한 삼성으로서는 굳이 힘을 뺄 이유가 없는 경기였고, 더구나 상대인 롯데는 한국시리즈에서 상대하고 싶지 않았던 OB와 후기 리그 우승을 다투는 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전급을 빼는 선에서 무난하게 1승을 넘겨주어 한국시리즈 상대로 낙점하려던 삼성의 시도는 엄청난 후폭풍을 만나게 된다. 상대가 굳이 이길 생각이 없음을 감지한 롯데 역시 주력 선수들을 쉬게 하며 여유를 부렸고, 반대로 오랜만에 출전 기회를 잡은 삼성의 2진급 선수들이 젖 먹던 힘까지 짜내며 승기를 잡아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삼성의 김영덕 감독은 말이 통하는 주전들을 다시 투입해 적극적인 져주기에 나섰고, 외야수 뜬공을 장타로 바꾸어주고 도루 시도에는 악송구로 맞대응하며 비난과 야유를 감수해야 했다. 그리고 그나마 그렇게 억지로 바꾼 상대 롯데에 한국시리즈에서 극적인 패배까지 당하며 다시 한번 체면을 구겨야 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1984 최동원> 관련 이미지. ⓒ ㈜영화사 진

 
다음 해부터 전기 리그와 후기 리그 우승팀보다도 종합승률 1위 팀에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먼저 보장해주는 방식으로 제도를 바꿔야 했던 이유다.

포스트시즌 진행 방식이 다시 한번 바뀐 것은 1989년이었다. 창설 이후 빠르게 성장하던 프로야구의 인기는 민주화운동에 불이 붙고 국민의 관심이 정치로 쏠리면서 조금씩 수그러들고 있었고, 관중 규모 역시 1986년을 정점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던 1988년 초 전두환 정권에서 청와대 대변인과 MBC 사장을 지낸 뒤 KBO의 두 번째 총재 자리에 오른 이웅희는 얼마 뒤 1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정치인으로 변신했고, 프로야구를 발판 삼아 좀 더 높이 도약하고자 했다.

그는 우선 팀의 수를 늘리고 경기 수를 늘림으로써 리그 확대의 바탕을 만들었고, 동시에 포스트시즌의 판도 좀 더 키운다는 구상을 제시했다. 그에 따라 KBO는 1988년 시즌이 마무리된 뒤 각 구단 감독과 코치, 기자와 해설가 등 114명을 상대로 설문지를 돌려 바람직한 포스트시즌 운영방식에 대해 묻기도 했다.

설문지에 포함된 선택지 중에는 양대 리그로 전환하는 것, 정규시즌 1위와 4위, 2위와 3위가 준결승을 치른 뒤 승자들끼리 결승을 치러 최종 우승팀을 가리는 것 등이 들어있었다.

그중 가장 많은 응답자가 선호한 것은 2위와 3위가 플레이오프를 치르고 이긴 팀이 1위와 한국시리즈를 벌이는 기존의 방식이었지만 채택된 것은 '통합시즌 준플레이오프 방식'이었다. 우선 전·후기 리그를 통합해 단일 시즌으로 치르되 정규시즌 4위와 3위가 삼판양승의 준플레이오프를 치르고, 그 승자가 2위와 5전 3승의 플레이오프를 치르며, 그 승자가 다시 1위와 7전 4승의 한국시리즈를 치르는 방식이었다.

통합시즌과 준플레이오프, 프로야구 몸집 키우다

그런 변화는 당장 연간 관중 수를 100만 명 가까이 증가시켰을 뿐 아니라 각 팀의 운영 방식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각 팀의 경기 수가 108경기에서 120경기로 늘어났을 뿐 아니라 긴장감 없이 임해도 됐던 경기들이 대폭 줄어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전기 리그와 후기 리그 각각 중반 정도를 지나면 한국시리즈 진출 가능성이 윤곽을 드러냈고, 그 뒤로는 대부분의 팀들이 '페이스 조절'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바뀐 상황은 선수층이 두껍고 주전과 후보의 격차가 적은 팀들에 유리하게 작용했고, 각 팀이 더 많은 선수들을 영입하고 영입한 선수들을 더 공들여 육성하도록 유도했다. 1989년부터 각 팀이 전문 스카우트팀을 신설하고 대대적인 2차 지명을 통해 선수단 규모를 키우는 동시에 2군 운영에 투자를 하기 시작한 배경에는 그런 제도 변화가 있었다.

물론 경기 내용 면에서 장명부와 최동원으로 상징되는 슈퍼 에이스의 시대가 저물고 '분업'과 '로테이션'이 힘을 발휘하는 시대로 넘어간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박영길과 최동원 1977년부터 1981년까지 5번 치러진 실업야구 코리언시리즈 중 3번의 우승을 이끈 것은 롯데 자이언트의 박영길 감독이었다. 특히 1981년에 그는 최동원이 코리언시리즈 6경기에 모두 나가 혼자 우승을 쟁취하는 모습을 감독으로서 지켜봤고, 3년 뒤 삼성 라이온즈 코치 시절 그 최동원의 롯데를 한국시리즈 맞상대로 지목하려는 감독을 만류하기도 했다. ⓒ 롯데 자이언츠

 
반면 1999년에는 가장 큰 폭의 제도 변화가 시도되었지만 2년 만에 실패로 돌아가며 해프닝으로 끝나는 일이 있었다. IMF 경제위기의 여파 속에 공멸의 위기에 몰리던 프로야구가 양대 리그라는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전년도 성적을 기준으로 1,4,5,8위팀(현대·두산·해태·롯데)은 드림리그로 2,3,6,7위팀(삼성·LG·쌍방울·한화)은 매직리그로 분류해서 각 리그 1위팀이 다른 리그 2위팀과 플레이오프를 치르고 그 승자 간에 한국시리즈를 치르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각 리그 2위 팀들에 비해 1위 팀이 가지는 유리함이 없다는 점과 두 리그 팀들 사이의 전력 격차가 벌어지면서 공정성이 침해되는 문제가 제기되었고, 그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아 하나둘씩 땜질하다 보니 리그를 나눈 의미를 찾기 어려워지는 문제의 악순환에 빠지고 말았다. 미리 충분한 검토와 연구 없이 시도된 실험은 성과도 낼 수 없지만 교훈조차 별로 남기지 못한다는 깨달음 정도가 굳이 꼽을 수 있는 성과였다.

결국 2001년부터 이전 방식으로 돌아갔고, 각 팀은 정규시즌에서 최소한 4위 안에 들어 '가을야구'에 참가함으로써 한국시리즈 우승에 도전할 기회를 얻는 것을 1차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2015년부터는 10개로 팀이 늘어난 상황을 반영해 정규리그 5위 팀에 와일드카드 결정전의 기회를 주는 변화가 추가된 것을 제외하면 1989년에 정착된 방식의 뼈대가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문제들은 있다. 우선 미국이나 일본처럼 '리그 우승팀들이 벌이는 최종승자 결정전'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순위와 우승팀을 제쳐놓고 다시 한 번 우승팀을 가리는 어색함이 있다. 또 144경기를 치른 끝에 결정된 우승팀보다, 많아야 열댓 경기를 치러 만들어진 또 다른 우승팀에 더욱 큰 찬사와 환호가 집중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싶은 고민도 있다.

하지만 올림픽이나 WBC 같은 국제대회에서도 흔히 '예선리그'와 '결선리그'를 나누어 운영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굳이 이상할 것은 없다. 정규리그 하위 팀에 좀더 많은 경기 과정을 통해 부담을 지우고 상위 팀에 좀더 휴식하며 정비할 여유를 주어 균형을 맞춘다는 점에서는 보통의 '결선리그'보다 좀더 합리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포스트시즌, 야구 없는 겨울 견디기 위한 사육제

돌아가 보면, 포스트시즌이란 좀 더 멋진 마침표를 찍고 싶은 팬들의 마음 위에 펼쳐지는 무대이며, 마지막 힘을 짜내 그 마음 위에 이름을 새기고 싶은 선수들의 꿈이 만드는 공연이다. 그 순간을 함께하며 야구팬들은 지나간 1년을 압축해 돌아보며, 내년에 다시 맞이할 새 시즌을 상상한다.

그래서 포스트시즌이란 우승팀을 결정하는 마지막 승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팬들에게 더 큰 선물을 줄 수 있는 팀을 가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고 하나씩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승리한 팀은 그렇지 못한 팀보다 팬들의 '야구가 끝나는 날'을 조금씩 뒤로 미뤄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끝내 우승을 해낸다면, 팬들에게 감격을 곱씹으며 '야구 없는 날들'을 견딜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과 더 아름다운 다음 시즌을 상상할 수 있는 강력한 희망을 선물하는 단 하나의 팀이 될 수 있다.

이제 2022년 가을야구의 마지막 관문인 한국시리즈가 시작된다. 올해의 '야구 끝나는 날'이 5일일지 9일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까지는 울고 웃고 설레고 분노할 수 있을 것이고, 그다음에는 또 어떻게든 낙관과 비관을 오가며 겨울을 버틸 것이다. 그리고 감격으로 시작하건 아쉬움으로 시작하건, 팬들 마음속의 '겨울 야구'는 늘 내년의 '봄 야구'로 이어질 것이다.
 

정규시즌 우승과 한국시리즈 우승 2022년 정규시즌 우승은 SSG 랜더스에 돌아갔다. 하지만 랜더스는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통과해서 올라온 키움 히어로즈와 한국시리즈라는 마지막 승부를 벌여야 한다. 두 팀의 팬들은 이미 올 해 가장 오래 야구를 즐기는 특권을 선물받았지만, 한국시리즈 결과에 따라 겨울을 보내는 마음은 사뭇 달라지게 될 것이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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