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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오후 창원마산 오동동 문화광장에서 열린 “항일독립운동가 마산의딸 김명시 장군 기림행사”
 7일 오후 창원마산 오동동 문화광장에서 열린 “항일독립운동가 마산의딸 김명시 장군 기림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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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여성들의 용맹함은 산맥으로 요동하거늘 어찌 조국 하나 되찾지 못하리." "조선의 잔다르크, 여걸 중의 여걸." "조선사람은 다 통일전선에 참가해 한 뭉치가 되어야 한다."

고등학생들이 '백마탄 여장군' 김명시(金命時, 1907~1949) 선생을 생각하며 쓴 캘리그래피의 글귀다. 이 작품들은 7일 오후 창원마산 오동동 문화광장에서 열린 항일독립운동가 마산의딸 김명시 장군 기림행사에서 전시되어 참가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이날 열린사회희망연대(대표 백남해)는 김명시 선생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기념해 기림행사를 열었다. 국가보훈처는 올해 광복절 때 김명시 선생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김명시 선생은 사회주의계열 항일투쟁을 벌였고, 열린사회희망연대가 거듭 재심을 요청한 끝에 정부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했다.

행사는 1‧2부로 나눠 열렸다. 먼저 경남민예총 마산지부 회원들이 타악 연주를 했고, 이순일 시인이 자작시를 낭송했으며, 박영운 가수가 노래를 불렀다. 또 하모니카연주단(대표 김창대)이 하모니카로 독립운동가를 연주했고, 이예지‧김하은 학생이 '김명시 장군에게'라는 제목의 편지글을 읽었으며, 이춘 작가가 김명시 장군을 소개했다.

이어 열린 본행사에서 이동근 공동대표가 경과보고, 백남해 공동대표가 기념사를 했으며, 김종필 창원특례시 국장이 홍남표 시장의 축사를 대신 읽었다.

백남해 대표는 기념사를 통해 "마산의 딸,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 그가 철이 들어 세상을 보기 시작할 때는 이미 조국 대한민국은 일본놈들에게 강탈 당하여 없었다"며 "자신을 보호해 줄 조국은 없었지만, 조국을 향한 불타는 애국심은 그를 모든 역경을 이겨낼 불굴의 의지를 주었다"고 했다. 이어 "1932년 신의주에서 일경에 체포돼 7년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처참한 감옥소 생활을 견디고 만기 출소했고, 그 고통을 이겨냈지만 죽음의 과정은 의문스럽기만 하다"고 덧붙였다.

백 대표는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조국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헬조선이니, 희망이 없으니 하며 무시하기 일쑤다. 그러나 조국이 없더라도 조국을 향한 애국심은 끝이 없는 것이다. 그것을 김명시 장군은 분명하게 보여주었다"고 했다.

그는 "이 애국심을 국가가 드디어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게 되었다. 우리도 김명시 장군의 그 큰 뜻을 이어받아 우리 조국을 지켜 내며 세계에 우뚝 서는 아름다운 나라로 만들어야겠다"고 했다.

김명시 선생의 친족인 김재두(81, 창원) 어르신과 김향임(김해)씨는 인사말을 통해 열린사회희망연대에 고마움을 전했다. 이경민 가수가 노래 '김명시'를 불렀고, 박은혜씨가 '아름답게 빛나리라'는 제목의 진혼무를 추었다. 마지막에 참가자들은 독립군가 <압록강 행진곡>을 불렀다.

다음은 이순일 시인의 시("나는 용납이 되지 않는다")의 일부 내용이다.

"김명시/그의 이름도 지워지고/무덤도 꽃다발도 없다는 것//나는 나의 무지를 용서할 수가 없다/열 서너 살부터/민족운동과 노동운동에 눈을 떴고/강도 일본제국주의의 감옥에서/칠년이나 견딘 여성 전사를/그의 어머니가/마산어시장의 생선장수였다는 걸/몰랐다는 것 ... 그는/강도를 쫓아낸 조국의 유치장에서/최후를 맞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7일 오후 창원마산 오동동 문화광장에서 열린 “항일독립운동가 마산의딸 김명시 장군 기림행사”
 7일 오후 창원마산 오동동 문화광장에서 열린 “항일독립운동가 마산의딸 김명시 장군 기림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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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오후 창원마산 오동동 문화광장에서 열린 “항일독립운동가 마산의딸 김명시 장군 기림행사”
 7일 오후 창원마산 오동동 문화광장에서 열린 “항일독립운동가 마산의딸 김명시 장군 기림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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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서훈 추서 추진은 2018년부터 시작

김명시 선생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 추서 추진은 2018년부터 시작되었다. 열린사회희망연대가 김명시 선생에 대한 숭모사업을 하기로 하고 창원시에 흉상 건립을 요구하면서 친인척 찾기 운동을 벌인 것이다.

외사촌 동생 김필두(81), 친사촌 김형두(91)씨를 비롯한 친인척들이 <오마이뉴스> 기사를 보고 이 단체에 연락을 했다. 이 단체는 생가터였던 창원마산 오동동문화광장에서 2019년 8월 김명시 선생의 친가-외가 친족들의 만남 행사를 열기도 했다.

독립유공자 서훈 포상 과정은 쉽지 않았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2019년 1월 국가보훈처에 포상 신청했고, 보훈처는 같은 해 11월 '사망경위 등 광복 후 행적 불분명'의 사유로 공적 심사에서 보류했다. 이에 이 단체는 "김명시 선생은 북로당 정치위원이 아니었고, 북 정부 수립에 공헌한 바 없다"는 내용의 소명자료를 내며 2021년 7월 보훈처에 재심신청했다.

보훈처는 같은 해 8월 재심 심사를 보류했다. 이에 열린사회희망연대는 또 다시 보충 자료를 제출하며 심사를 요청했고, 그해 11월 보훈처 담당자가 열린사회희망연대에서 친인척을 만나 의견을 듣기도 했다. 여러 과정을 거친 뒤 국가보훈처는 올해 광복절을 앞둔 8월 12일 김명시 선생에 대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2019년 10월 오동동 문화광장 옆에 김명시 장군 생가터 표지판을 세웠고, 2021년 8월 창원시가 새 표지판을 제작해 세워놓았다.

1907년 창원마산 오동동에서 태어난 김명시 선생은 1925년(나이 19세)에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입학했고, 1927년 재학 중에 중국 상하이로 파견되어 '동방피압박 민족반제자동맹'을 조직했다.

선생은 1930년 하얼빈 일본영사관 공격을 주고했고, 1932년 국내로 들어와 인천 제물포 근처의 제사‧섬유공장 노동자들을 교육했으며, 당시 동지의 배신으로 신의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7년간 복역했다.

이춘 작가는 "선생은 재판 과정에서 고문의 흔적을 폭로하고 동지들의 옥사에 대해 항의하며 형무소 처지의 개선을 요구했다"며 "김명시 장군은 전사이자 투사다운 면모를 보이며 강력하게 법정 투쟁을 벌였다"고 소개했다.

선생은 1939년 출옥한 뒤 중국으로 탈출해, 팔로군에 들어가 천진, 제남, 북경, 태원 등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이춘 작가는 "항일 최전선에서 한 손에는 총, 다른 한 손에는 확성기를 들고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고 했다.

김명시 선생은 1945년 12월 전국부녀총동맹 결성대회에 참석해 김구, 김원봉 선생과 함께 축사를 했으며, 당시 그는 "이역만리에서 오직 동포를 해방시키고 나라를 구한다는 일념으로 싸웠다"고 발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명시 선생의 오빠와 동생도 항일에 나섰다고 한 이춘 작가는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변절했지만 김명시 장군의 삼남매는 해방 전까지 민족독립운동 전선에서 한번도 이탈한 적이 없을 정도로 치열했다"고 말했다.

한편 오동동 골목에 조성되어 있는 '김명시 장군 학교길'이란 제목의 벽화가 훼손되었다가 최근 창원시가 복원했다.
 
7일 오후 창원마산 오동동 문화광장에서 열린 “항일독립운동가 마산의딸 김명시 장군 기림행사”
 7일 오후 창원마산 오동동 문화광장에서 열린 “항일독립운동가 마산의딸 김명시 장군 기림행사”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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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오후 창원마산 오동동 문화광장에서 열린 “항일독립운동가 마산의딸 김명시 장군 기림행사”. 생가터 표지판.
 7일 오후 창원마산 오동동 문화광장에서 열린 “항일독립운동가 마산의딸 김명시 장군 기림행사”. 생가터 표지판.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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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마산 오동동 골목에 조성되어 있는 '김명시 장군 학교길' 벽화 복원.
 창원마산 오동동 골목에 조성되어 있는 "김명시 장군 학교길" 벽화 복원.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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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마산 오동동 골목에 조성되어 있는 '김명시 장군 학교길' 벽화 복원.
 창원마산 오동동 골목에 조성되어 있는 "김명시 장군 학교길" 벽화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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