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일부터 특별해져버린 영화
 
어떤 경우에는 영화의 의도와 내용을 뛰어넘어 사회현실이 해당 작품의 의미를 좌우하곤 한다. 그래서 운 나쁘게 어떤 영화는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묻히기도 하지만, 또 다른 영화는 본래 완성도를 초월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거나 평가되곤 한다.

그런 측면에서 <애프터 미투>가 개봉과정에서 어떤 성과를 내고 반향을 일으킬 것인가는 무척 흥미로운 대목이다. 하필 해당 영화의 개봉일인 2022년 10월 6일에 개봉을 의식한 것 마냥, 대선후보 당시부터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으로 내놓아 논란을 불러왔던 윤석열 정부는 행정안전부 정부조직 개편방안 발표를 통해 '부'로서의 여성가족부를 폐지하는 대신, '청소년・가족', '양성평등', '권익증진' 기능을 보건복지부로 이관하겠다고 밝혔다. 보건복지부 내에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를 신설해 기존 여성가족부 업무의 대부분을 이관하고, 고용 관련 기능은 고용노동부로 이관한다는 내용이다.
 
물론 대선 당시 남녀 성대결을 부추기며 등장했던 '여성가족부 폐지'의 단호함은 용두사미로 그치고 실질적으로는 '부' 이름만 떼어내는 데 그쳤다는 평가도 만만치 않다. 양성평등본부장은 국무회의에도 장관들과 함께 참석할 정도이니. 하지만 진행되는 상황은 그저 명목상 '부' 폐지로만 그칠 리 없다. 당장은 실질 기능은 유지된다 하더라도 이런 정치권의 조처는 '징후적'이기 때문이다. 일련의 움직임은 단지 정책적 효율성을 넘어 '백래시'라 불리는 흐름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행정안전부 개편안 발표 다음날, 윤석열 대통령이 출근길 기자브리핑에서 질문에 답변한 내용은 상징적이다. 대통령은 "여가부 폐지는 여성과 가족, 아동, 사회적 약자 보호를 더 강화하기 위한 것"이며, "소위 권력남용에 의한 성비위 문제도 피해호소인이라고 하는 그런 시각에서 완전히 탈피하자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보호를 더 강화할 것"이란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정책의 실질적 효율성 제고와 부처 폐지가 어떻게 연동되는지 납득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이미 현 정부와 호흡을 같이 하는 지자체 곳곳에서 관련 기구와 정책 폐지 및 축소가 횡행하는 중이다. 특히 여성인권 관련 교육과 홍보 등 시민사회 내 활동지원 예산이 대폭 삭감되어 관련 활동가와 단체들이 피부로 느끼는 위기감은 대통령의 호언과는 별개로 심화 일로인 상태다. 그런 가운데 <애프터 미투>는 너무나 상징적인 날에 개봉을 맞이해 버린 셈이다.
 
한국사회 미투운동의 다음 단계 과제를 진단하다
 
그렇게 정치적으로 심각해져버린 개봉일을 겪은 <애프터 미투>는 박소현, 이솜이, 강유가람, 김소람 감독 4인의 단편을 조합한 옴니버스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다. 개별 단편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완결성을 지닌 작품으로 활용 가능하지만 4편을 묶어서 함께 볼 경우엔 일종의 총체성을 획득하는 계기가 된다. 각기 다른 주제와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기획 단계부터 4명의 감독은 백래시에 직면한 한국사회 여성주의와 미투운동 관련 다음 단계의 전망과 쟁점을 조명하자는 공통적인 목표로 '따로 또 같이' 스타일의 작업을 공동으로 논의하면서 작업을 진행했다. 그런 골격을 갖춘 작업이기에 4편의 단편 다큐멘터리의 선후 순서부터 꽤 치열하고 진지한 논의를 거쳤다고 전한다.
 
그런 논의의 결과는
① 박소현 감독의 <여고괴담>
② 이솜이 감독의 < 100.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 >
③ 강유가람 감독의 <이후의 시간>
④ 김소람 감독의 <그레이 섹스> 순서로 결정되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제법 절묘한 조합이란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제목처럼 영화는 현재 우리 사회가 인식하고 있는 미투운동의 전형을 넘어서는 논의와 부문을 제시하려는 야심찬 시도의 일환으로 탄생했고, 충분히 그에 걸맞은 범위를 커버해주고 있었다.
 
# 1번 주자, <여고괴담>이 전하는 '스쿨미투' 성폭력
 
'애프터 미투"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애프터 미투"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그램

 
박소현 감독의 <여고괴담>은 용화여고에서 벌어진 '스쿨미투', 주로 성인인 교사들에 의해 이뤄지는 미성년 제자들에 대한 위계질서에 힘입은 성폭력 문제를 진단한다. 용화여고의 경우 일부 남성 교사들이 훈육 혹은 징계 명목으로 여학생에 대한 신체접촉과 추행을 반복해 왔지만 '닫힌 사회' 문제의 전형처럼 학교는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해 왔었다. 2003년에는 문제제기를 한 피해 학생이 오히려 학교의 명예 운운하며 퇴학되는 지경에 놓인다. 하지만 담장 밖 사회가 더디 가도 조금씩 변화하던 바람은 학교 안으로도 훈풍이 되어 밀려왔고, 십여 년이 지나 다시 벌어진 문제제기엔 졸업생들의 연대를 포함한 지원으로 마침내 미진하나마 가해 교사에 대한 징계가 솜방망이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다.
 
감독은 일반적인 인터뷰 위주 다큐멘터리 작업을 진행하기 힘든 닫힌 사회의 특성을 십분 고려한다. 영화는 기록 자료와 인터뷰 대신에 포토 에세이 형태로 작업을 진행한다. 특히 흑백 톤으로 표현된 화면의 질감은 음습한 성폭력이 은폐되어오던 담장 속 요새 같은 학교의 이미지, 그리고 선악의 확고한 대비라는 주제의식과 스타일적으로 절묘하게 조화를 이뤄낸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그 자체인 것만 같던 학내 문제제기가 '이제는 말할 수 있다!'며 용기를 내고 후배들을 지원한 졸업생 선배들의 연대에 힘입어 마침내 담벼락에 균열을 내는 순간은 그래서 더 환희에 찬 느낌이다.
 
# 2번 주자, <100.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이 제기하는 친족성폭력
 
"애프터 미투"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애프터 미투"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그램

 
이솜이 감독의 <100,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는 눈썰미 좋은 이들이라면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이 단편의 주인공은 전혀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못했다. 어릴 적 주인공은 친족에게 성폭력을 반복해서 당했지만 그 피해는 가족의 평화라는 명목으로 덮여질 뿐이었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 잊고 말 것이라는 집안 어른들의 태평스런 전제와는 별개로 피해당사자는 마치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거나 혹은 재수가 없었다는 식으로 억압당해 왔다.
 
이제는 중년이 되어 형법상 공소시효도 다 끝났고, 증거 같은 건 남아있지도 않지만, 독립 후 타지로 떠나 살아가던 당사자는 어느 날 고향으로 귀환한다. 물론 그녀의 귀환을 반길 이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주인공은 자신만이 림보에 갇힌 것처럼 떨쳐내지 못하던 끔찍한 기억과 정면대결하기로 결의한 뒤다. 가족회의에서 폭로를 할 것인가, 사회단체와 연대해 기자회견이라도 감행할 것인가. 관객이 궁금해 하던 복수와 응징의 실행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행해진다. 남쪽 바닷가 해안마을 출신인 주인공은 청중이라곤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야외 곳곳에 스피커를 설치하고 마치 1인극을 벌이듯 자신의 가슴 속에 묻어뒀던 잊고만 싶은 기억을 끄집어내 마치 비워내듯 호소하고 연설한다. 그렇게 케케묵은 상처를 대나무숲에 토해내고 나서야 비로소 주인공은 건강해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3번 주자, <이후의 시간>으로 진단하는 문화예술계 성폭력
 
"애프터 미투"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애프터 미투"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그램


 
강유가람 감독은 <이후의 시간>을 통해 수도권에 비해 지극히 협소하고 좁은 '판'인 지역 문화예술계 내부 성폭력과 이에 맞서는 활동가들을 조명한다. 보는 눈도 상대적으로 많고 일거리도 많아서 까짓 눈치 안보고 살겠다! 호기로운 이들도 곧잘 나올 수 있는 서울에 비해 지역 문화예술계는 상상할 수 없는 '작은 세계'를 형성하기에 문제제기도 더욱 고난이도다.
 
시골마을 사정처럼 이웃집 숟가락 개수도 다 안다는 호언장담이 지역 문화예술계에선 당연한 것처럼 통용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안 되는 문화예술에 종사하는 이들은 공적 지원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운명인데 문제는 그 지원대상과 방향 의사결정과정이 철저하게 폐쇄적인 '그들만의 리그'라는 점이다. 즉 몇 명의 원로와 선배, 대표들이 돌려막기 하듯 여기에선 대표, 저기에선 위원 이런 식으로 인맥과 학연 등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온전히 독립적인 활동모델이란 사실상 존재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용기를 내어 '선배'들의 과오를 지적하고 문제해결을 도모하는 순간, 소수의 피해자와 연대자는 '버릇없는' '내부의 적' 취급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그런 고충을 경험한 지역의 문화예술가들의 증언을 인터뷰로 담아내는 한편, 예술창작의 자유를 꿈꾸던 이들이 상상도 못하던 사건 대응 과정에서 고립되고 시달리며 겪었던 애환과 함께 또 다른 별개의 중요지점을 제기한다. 수많은 일을 치르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상처를 입는 것과는 별도로 소수의 활동가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창작활동 대신에 문제해결 전문가가 되어버린다.

처음엔 개별 사안에 대해 '총대'를 메고 이 건이 끝나면 다시 열심히 작업해야겠다던 꿈 대신 사방팔방에서 밀려드는 유사 사례와 지원요청 때문에 혹사당하고 마는 것이다. '소수'의 희생에 의지해 계속 폭로와 고발로 이슈를 만들고 해결하는 과정의 연속이 가지는 한계에 대한 영상 활동가의 사려 깊은 고민이 비교적 평이한 인터뷰 다큐멘터리 형식 안에 담겨 있다.
 
# 마지막 주자, <그레이 섹스>가 도발하는 성폭력 회색지대 논쟁
 
"애프터 미투"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애프터 미투"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그램

 
앞서 4편의 배치순서에 대한 제법 치열한 논의가 공동감독들 사이에 있었다는 언급을 했지만 그 중에 특히나 쟁점은 마무리에 해당하는 4번째 순서를 어느 작품이 담당하느냐 문제였다고 한다. 그 대망의 결말을 차지한 작업은 김소람 감독의 <그레이 섹스>다. 앞의 세 단편 다큐멘터리가 형식은 상이해도 사회 각 분야별 미투운동의 첨단에 해당하는 과제를 다루는 반면 이 4번째 에피소드는 포괄하는 범주도, 접근하는 방식도 기존 미투운동과 확연히 차별화된다.
 
'그레이 섹스', 회색지대의 섹스다. 성인들의 연애에서 성생활은 입에 담기 부끄러워하는 이들이 있을지 몰라도 엄연히 필수적인 동반사항이다. 하지만 대부분 음지에선 갑론을박 백가쟁명이 오가도 공개적으로 쟁점화하거나 토론하기엔 뭔가 낯 뜨거워 보인다. 그런 와중에 가해자와 피해자 논란은 점점 더 불거지고만 있다.

<그레이 섹스>는 상대가 동의하지 않는 행위로서의 데이트 폭력 혹은 커플 내부의 폭력 문제를 조명한다. 다른 작업들이 선악이 명확하게 대비되는 반면, 제목처럼 마지막 에피소드는 말 그대로 모호하고 불투명한 영역에 도전한다. 대개 남성들이나 기성세대는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 그리고 여성 당사자들도 개인별로 판단이 상이할 수밖에 없지만 막상 이야기를 끄집어내면 서로 너무나 비슷한 고민을 싸안고 있던 이야기를 감독은 용맹 과감하게 풀어낸다.
 
그 저돌적인 문제제기는 일부 등장인물의 인터뷰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 애니메이션 등으로 완화된 표현방식을 택한다. 그 덕분에 수많은 '목소리'들의 재구성을 통한 객관적 조망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실사 위주라면 무의식적으로 자극적이기 쉬울 관람을 끝까지 지적 담론과 토론의 공론장으로 대체해버린다. 애니메이션 효과 뽑아내기가 만만찮았을 테지만 그 결과물은 애니메이션-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실험성까지 확보한다. 그런 지원사격에 힘입어 완성된 단편은 보는 이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길 꾀한다. 이게 왜 성폭력이냐? 좋아서 같이 해놓고 뒤늦게 딴소리냐? 부류의 프레임은 이미 한국사회 내에 강고하게 자리한 상태다. <그레이 섹스>는 바로 그 지점에서 표류하고 있는 현재의 미투 당사자들에게 영감과 토론을 제공하려는 기획이다.
 
'애프터 미투가 촉발한 미래의 사회적 담론
 
4편은 서로 다른 감독과 상이한 스타일의 조합이지만 3+1, 혹은 2+2의 별개 조합도 가능한 트랜스포머 같은 옴니버스 기획물이다.
 
3+1이라면, 각각 스쿨미투+친족성폭력+문화예술계 성폭력이라는 각론격 주제와 대미를 장식하는 <그레이 섹스>의 회색지대 진단이 만나는 측면이겠다. 그리고 2+2를 스타일로 보면 정통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 100,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 >와 <이후의 시간>이 한 배를 탈 테다. 그리고 <여고괴담>과 <그레이 섹스>가 실험성과 상징적 차원에서 별도의 선단을 형성할 것이다. 그런 도식에 그치지 않고 개별 작품들이 독창적 아이디어를 형성하고 있긴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옴니버스 기획은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영화들의 내용은 제목의 함의를 숨기지 않고 풀어내는 데 집중한다. <여고괴담>은 유명했던 영화처럼 학교를 떠나지 못하는 성추행과 폭력의 망령들을 소독하고 박멸하려는 시도와 연대를 향한 의지의 기록이다. < 100,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 >는 가해자에 대한 물리적 응징과 엄벌주의보다 피해자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고 지원할 것인가에 초점이 좀 더 맞춰져야 한다는 고민을 담았다. <이후의 시간>은 개인의 헌신을 넘어 제도와 시스템으로 미투운동이 기반을 잡아야 한다는 염원을 가공해낸다. 그리고 <그레이 섹스>는 대안과 전망이 아니라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통해 미투운동의 차세대 지평을 확장하려는 도전에 나선다.
 
영화는 지극히 실용적 필요성에 충실하다. 그럼에도 여성주의 창작이 확대되면서 다양한 형식과 접근법을 선보이는 <애프터 미투>의 도전은 주제의식과 문제제기에 귀를 기울이는 만큼 개별 작가들의 창의성과 연출력을 확인하는 계기로서도 더없이 유용한 시험물이 될 테다.
 
<작품정보>
 
애프터 미투 #AfterMeToo
2021|한국|다큐멘터리
2022.10.06. 개봉|85분|15세 관람가
감독 박소현, 이솜이, 강유가람, 김소람
제작 애프터 미투 프로젝트 팀
배급 ㈜영화사 그램
애프터 미투 박소현 이솜이 강유가람 김소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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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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