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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충남 계룡시 계룡대에서 74주년 국군의날 기념식이 열린 가운데 한 시민이 낙하산을 타고 계룡대 상공을 내려오는 특전사 대원들을 바라보고 있다.
 1일 충남 계룡시 계룡대에서 74주년 국군의날 기념식이 열린 가운데 한 시민이 낙하산을 타고 계룡대 상공을 내려오는 특전사 대원들을 바라보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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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명 중 단 6명! 10월 1일이 국군의 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반 아이들의 숫자다. 심지어 국군의 날이라는 국가 기념일이 지정돼 있었다는 것조차 낯설어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국군 의장대가 서울 도심에서 퍼레이드를 벌이던 때를 추억하는 기성세대에겐 격세지감일 터다. 

그나마 6명 중 2명은 최근 북한 미사일 발사 관련 뉴스를 인터넷에서 우연히 접한 뒤에 알게 됐다고 말했다. 아이들 대다수가 국군의 날을 모르는 이유는 무엇보다 공휴일이 아니어서다. 이어진 10월 3일이 개천절인지 모르는 아이가 거의 없다는 게 이를 방증한다. 

국군의 날에 무관심한 아이들을 나무랄 뜻은 추호도 없다. 솔직히 굳이 그날을 기억할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도 없지 않다. 국군 장병의 노고를 기억할지언정 10월의 첫날을 국군의 날로 지정해 기념할 이유는 없다. 국군의 날이 10월 1일로 정해진 연유를 안다면 말이다. 

10월 1일로 지정된 이유와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 이유

이승만 정부가 국군의 날로 지정한 10월 1일은 6.25 전쟁 당시 국군 제1군단 소속 제3사단이 북진하며 38도선을 돌파한 날이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고 서울을 수복한 직후다. 6월 25일 북한군이 기습 남침한 뒤 꼭 97일째 되던 날이었다. 

국군의 날을 제정한 건 전후 복구 사업이 한창이던 1956년이다. 육해공군이 해마다 따로 창설 기념행사를 치르던 것을 10월 1일로 통합한 것이다. 이후 수십 년 동안의 군사정권 시절 가장 중요한 국가 기념일로 자리매김했다. 법정 공휴일이던 국군의 날은 문민정부가 수립된 뒤인 1991년에 와서야 제외되었다. 

우리 국군의 위상을 국내외에 알리고 장병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한 국군의 날의 취지에는 백 번 공감하지만, 그날을 10월 1일로 정한 건 쉬이 납득할 수 없다. 최초로 38도선을 넘은 제1군단의 군단장이 악질 친일파로 손꼽히는 김백일이었다. 그는 만주에서 항일 독립군을 토벌하던 간도특설대의 중대장으로서 일제로부터 훈장까지 받은 인물이다. 

당시 미군을 비롯한 유엔 연합군은 서울을 수복한 후 전장의 확대와 전쟁의 장기화를 꺼려 북진을 주저했다. 하지만 '북진 통일'을 외치던 이승만 대통령과 군 수뇌부는 미8군 사령관을 설득해 북진을 감행했고, 결과적으로 중국군의 참전을 불러왔다. 이후 2년 넘도록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들이 희생당했다. 

김백일에게 진격 명령을 내린 국군 총사령관도 일제강점기 만주국의 장교였던 정일권이었다. 전쟁 중 갑작스럽게 총사령관이 된 그의 전임자 역시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장교였던 채병덕이었으니, 당시 군 수뇌부는 죄다 친일파였던 셈이다. 일부 역사가들이 6.25 전쟁을 '친일파들의 해방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해방 후 미소 냉전과 극심한 좌우 대립의 현실 속에서 친일파들은 재빠르게 살길을 모색했다. 제헌 헌법으로 친일반민족행위 처벌법이 제정되고 친일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된 상황에서도 국내외 정세는 그들 편이었다. 와중에 김일성의 무력 도발은 적어도 생존을 걱정하던 그들에겐 '한 줄기 희망의 빛'이었다. 

친일파가 순식간에 애국자로 돌변한 어처구니없는 현대사의 중심에 김백일이 있다.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해 기념한다는 건, 그의 업적을 기린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아이들에게 국군의 날이 언제인지 물을 게 아니라, 10월 1일로 지정된 이유와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 이유다. 

앎에서 실천으로 나아가는 일

민주화운동의 결실로 교과서가 여러 차례 개정되면서 아이들도 우리 사회의 전도된 가치관이 뒤틀린 현대사에서 비롯됐음을 잘 알고 있다. 해방 후 친일 청산에 실패하고 6.25 전쟁을 거치며 그들이 되레 기득권층이 되어 권력을 세습하고 있다는 사실쯤은 이미 상식이 됐다. 문제는 앎에서 실천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김백일이 친일파라는 건, 특히 이곳 광주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다. 지난 2016년 그의 이름을 딴 백일초등학교를 성진초등학교로 개명하면서 한동안 지역 사회의 화제가 됐다. 친일파의 이름을 지우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학생 모임인 성진회를 기억하자는 취지였다. 

공교롭게도, 담장을 사이에 두고 학교 바로 옆에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 공원이 세워졌으니,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를 함께 기리는 모양새가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백일 장군이 불세출의 영웅인 줄로만 알았다.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광주에 그의 이름을 딴 학교가 세워진 건 그래서다.

지금 성진초등학교 안팎에서 그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학교 이름뿐만 아니라 '백일로'로 명명된 길 이름도 이젠 '학생 독립로'로 개명됐다. 학교 밖 담장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개 과정을 담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어느덧 이곳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필수 답사 코스가 됐다.

광주만의 일도 아니다. 지난 2019년 전국의 시민사회단체가 뜻을 모아 경남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 공원에 세워져 있는 김백일의 동상 옆에 '친일 단죄비'를 세웠다. 이제 버젓한 동상은 그를 기리는 기념물이 아니라, 민족을 배반한 그의 치욕적 삶을 보여주는 증거물이 됐다.

지난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705인 명단 안에 포함될 만큼 그의 역사적 평가는 끝났다. 일제의 주구를 자처한 숱한 친일파 중에 705명 안에 들었다는 건 악질 중의 악질이라는 뜻이다. 국립 서울현충원의 맨 윗자리를 차지한 그의 무덤을 파묘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아이들에게서 희망을 본다

이쯤에서 다시 10월 1일 국군의 날을 떠올려보게 된다. 김백일은 역사적으로 단죄되었는데, 그의 업적을 기리는 10월 1일 국군의 날은 요지부동이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3년부터 지난해까지 국군의 날을 한국광복군 창설일인 9월 17일로 변경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끝내 국회를 통과하진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의 법통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있다면서도 유독 국군의 뿌리는 1948년 정부 수립에서 찾는 기형적인 구조다. 1946년 조선 국방경비대가 국군의 전신이라고 소개하면서도 차마 그때 국군이 창설됐다고 말하지도 못한다. 미군정 시기인데다 일본군과 만주국 군인 출신이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였던 한국광복군을 뿌리로 삼자니 6.25 전쟁 때 무공을 세운 이들의 친일행각이 탄로 날 수밖에 없어 정부가 수립된 해로 어정쩡하게 봉합한 것이다. 이는 과거 이명박 정부가 목매달았던 '건국절' 제정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어떻게든 일제강점기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사를 폄훼하려는 비열한 술책이다.

깨어있는 시민들의 힘으로 '건국절' 제정을 막아냈듯, 이제는 국군의 날을 그 취지에 맞도록 바루어야 할 때다. 역사 교사로서 "올해가 왜 건군 74주년이냐"는 아이들의 질문에 두루뭉술하게 답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서글프다. 그래도 그들에게서 희망을 본다. 한 아이가 얼마 전 뉴스에서 봤다며 이런 제안을 꺼냈다.

"10월 1일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난 날이라던데요. 일제 말 민족말살정책에 맞서 우리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을 기리는 게 국군의 날을 기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가혹한 식민 통치 속에서도 우리 말과 글을 지켜냈다는 걸 기억한다면, 국군 장병의 사기도 덩달아 드높아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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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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