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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것이 지천인 가을 산이 내어 준 개암열매
▲ 잘 익은 개암 먹을 것이 지천인 가을 산이 내어 준 개암열매
ⓒ 오창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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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는 지금부터 밤의 계절이다. 지난 봄에 여우꼬리처럼 북실북실했던 밤꽃이 밤송이로 자라서 밤톨로 떨어지는 시기가 왔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토실토실한 알밤이 아니라 '개밤'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種)들이 있고 거기에는 비슷비슷한 아류들도 많다. 알밤에 밀려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개밤'에 대해 말하려 한다.

소리 크지만 기분 나쁘지 않다? 
 
지인의 집 마당에서 발견한 개암나무
▲ 지난 8월 중순의 개암 지인의 집 마당에서 발견한 개암나무
ⓒ 오창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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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밤에 비해 턱없이 작고 보잘 것 없으면서도 모양은 밤처럼 생긴 열매를 개밤, 즉 개암이라고 한다. '개'라는 접두어가 붙은 생물들에 대한 인식은 우리에게 하찮고 보잘 것 없음을 의미한다. 처음에는 '개암'이라는 표준어의 어감과 '깨금'으로 부르는 우리 동네 언어 사이에서 원조가 '개밤'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언어도 시대가 흐르면서 발음의 경제성과 편리성에 따라 변한다. 개밤에서 개암으로 변했고 지역마다 개성 있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충청도 부여 땅 우리 동네에서는 '깨금'으로 부른다. 부여는 밤이 유명한 곳이라서 품종개량을 통해 깨금이 지금의 알밤이 된 줄 알았다. 찾아보니 밤나무와 개암나무는 전혀 다른 종이라 품종개량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개암나무는 본 사람은 별로 없어도 민담을 통해 도깨비가 놀라서 도망간 그 열매로 온 국민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따악!"

경쾌하면서도 기분 나쁘지 않은 소리, 바로 개암 깨무는 소리였다.

"뭐야! 이 정도 데시벨에 도깨비가 놀라서 도망갔단 말이야? 음, 조용한 데서 갑자기 들으면 놀랄 수도 있겠네."
"그만 따랑게... 내가 아끼고 있는 것인디.... 한 일주일은 더 있어야 익을 겨. 아직 풋내가 안 가셨잖여."

지인은 개암나무를 신기해하며 열매를 자꾸만 따는 나를 말렸다.

"우덜(우리) 어릴 적에 학교 댕기는 길가시에(길가에) 이 깨금나무가 많았잖여. 깨금을 한 주먹씩 따서 깨물어 먹으면서 걸어가면 학교까지 금방 가는 것 같았당게."

"고소해서 아이들이 주전부리로는 딱이네요. 작아서 먹기는 불편해도 밤보다 식감도 좋구요."
"우덜 어린 시절이야 워낙 먹을 것이 귀했응께 요런 깨금도 없어서 못 먹었지. 지금이야 먹기 좋은 알밤이 있는데 쳐다보기나 허겄남?"


원래는 야생이었지만 지인이 개암나무가 자라고 있던 산자락에 집을 짓고 살게 되면서 정원수로 남겨두었다고 했다. 어릴 적에는 흔한 나무였으나 지금은 야산에도 경제성이 있는 수종 위주로 심어서 개암나무도 '그 흔한 나무'에서 빠졌다. 눈 씻고 찾아봐야 하는 나무가 되었다. 어린 시절과는 반대로 밤나무는 흔해도 개암나무는 보기가 어려운 나무가 되었다고 했다.

개암은 속 알맹이를 먹기 위해 겉껍질을 어금니로 깨물어 소리를 내는 순간부터 뭔가 다른 감각이 느껴졌다. 맛을 보기 전에 겉껍질을 깨물어 내는 소리부터 저장된 기억에서 불러오는 뭔가 좋은 기분이 느껴졌다.

소리부터 맛있다는 카피처럼 개암을 깨물 때 '따악' 하고 나는 소리에 쾌감이 있었다. 바로 자율감각쾌락 반응(ASMR)이었다. 그래서 개암을 따게 되고 깨물어서 그 소리를 나도 모르게 즐긴 것이었다. 소리부터 매력적인 열매였기에 도깨비가 놀라서 도망갔다는 민담이 생성되었고, 구전되며, 개암의 따악하며 깨무는 소리에 쾌감이 느껴지고 즐기게 된 것이 아닐까.

이 소리에 도깨비의 방망이를 가로채 부자가 된 나무꾼의 이야기까지 덮어 씌워졌다. 개암 하나 잘 깨물어서 부자가 되었다는 스토리야말로 얼마나 황당하면서도 매력적인가. 영혼을 끌어모으는 노력 없이 우연히 부자가 되는 꿈은 인간의 평생 로망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벼락부자가 되거나 로또 당첨 이야기에 사람들은 열광하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그 어려운 일의 단초를 개암이 제공했다는 것은 개암 껍질을 깨물 때 나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개암의 냄새를 기억하시나요
 
개암이 익어가는 가을
▲ 잘 익은 개암 개암이 익어가는 가을
ⓒ 오창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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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무렵, 갈색으로 익은 개암 열매를 지인의 집에서 한주먹 따왔다. 갈색으로 익은 개암 열매의 모양새는 도토리와는 차이가 있었다. 개밤이라는 이름처럼 밤의 아류나 변종처럼 보였다. 예쁜 그릇에 잘 익은 개암을 담아 놓았다.

"어머머! 이거 깨금 아니니?"

몇 년 전 귀촌을 해서 이웃으로 친하게 지내고 있는 동네 언니였다.

"내가 시골에 살게 되면 마당에 이 개암나무를 한 그루 정도는 가지고 싶었어."
"왜요? 꽃이 예쁘게 피지도 않고 수형이 좋은 나무도 아닌데..."
"향기가 있는 나무잖아."


검색한 자료들에서 개암이 영어로는 헤이즐넛이라고 해서 의아했었다. 아이스크림과 과자, 커피 등에 입혀진 느끼할 정도로 진한 헤이즐넛 향과 개암의 연결고리를 전혀 찾지 못했었다.

얼마 전 접했던 개암나무에서는 나뭇잎과 열매 어디에서도 헤이즐넛 향이라고 각인된 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도시적인 향이라고 여겼던 헤이즐넛 향의 원조가 개암이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향은 무슨... 그냥 마른 낙엽 냄새뿐이던데..."
"그 마른 낙엽 냄새를 비집고 살짝 도는 향이 있거든. 그 향을 맡아야 진정 시골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의외였다. 대부분이 개암을 고소한 맛으로만 말을 했지만 그 언니만큼은 향기로 기억하고 있었다. 후각이 미각을 압도한다는 이론을 어디서 본 것 같기는 했다. 시골의 추억을 글로 읽거나 남의 이야기를 공유만 했던 사람들은 결코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은 후각이었다.

개암을 도깨비가 나오는 전래 동화에서 처음 알았던 나한테 미묘한 후각이 있을 리가 없었다. 후각에서 비롯된 감성까지 묘사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개암의 따악 하는 소리와 고소한 맛을 즐기게 된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하고 갈색으로 잘 익은 개암을 한 개 집어 들고는 깨물었다. 동시에 번개처럼 향긋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희미한 헤이즐넛 향기가 감돌았다.

바짝 마른 나뭇잎 사이로 피어올랐다가 스러지는 연기 같은 향이 맡아졌다. 향기의 끝자락을 간신히 붙잡은 것 같았다. 덜 익은 개암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향기가 속껍질에서 살짝 풍겼다.

'이거였나? 시골살이의 감성과 내공은 이렇게 쌓아지는 것일까?' 개암과 함께 향기로운 가을이 오고 있었다. 코를 킁킁거리며 향기를 찾아 신발끈을 바짝 조여 매고 들로 나가고 싶은 가을이다.
 
지인의 집에서 발견한 개암나무
▲ 개암나무 지인의 집에서 발견한 개암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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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조근조근하게 낮은 목소리로 재미있는 시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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