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주군을 빼놓고 성립할 수 없는 영화
 
<달이 지는 밤>은 전라북도 무주군을 빼놓고는 성립될 수 없는 영화다. 무주산골영화제가 무주배경 장편영화 제작 프로젝트 첫 번째 기획으로 선보인 본 작품은 무주군과 전라북도의 재정지원으로 제작비를 충당하고 100% 무주군 내에서 촬영이 이뤄진, 'Made in 무주'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엔 인구 2만3645명(2022년 8월 행정안전부 주민등록인구통계 기준)의 작은 지자체 풍광이 오롯이 담겼음은 물론 다수의 단역에 현지 주민들 참여가 이뤄져 완성되었다. 아마 무주 지역으로선 영화가 탄생한 이후 첫 사례 아닐까.
 
물론 영화는 그런 '비하인드'에 의존하지 않고 작품 그 자체로 승부해야 한다. 그 지점에서 이제는 전설이 된 <폴라로이드 작동법>부터 <최악의 하루>, <조제>에 이르는 작업을 선보여온 김종관, <한여름의 판타지아> 이후 오랜만에 연출을 맡은 장건재, 이 두 감독이 각각 1부와 2부를 나눠 맡아 독립적인 단편을 작업한 후 옴니버스 장편 형태로 영화를 조립했다. 그렇게 완성된 영화는 달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보여주듯 대비를 이루면서도 적정한 배경 공유를 통해 지역의 풍경과 영화의 주제를 보는 이들에게 각인시킨다.
 
영화의 배경인 무주는 전라도와 충청도, 경상도 삼도가 서로 만나는 소백산맥 자락에 자리 잡은 산골이다. 지역을 이루는 5개 면의 마을들은 무주구천동과 덕유산 골짜기 곳곳 산등성이 계곡에 자리를 잡았다. 들어오기도 나가기도 만만치 않은 곳이지만 많은 이들이 떠나간 동네다(무주 인구는 반세기 동안 삼분의 일 이하로 줄어든 상태다). 그런 곳에서 과연 어떤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타지 출신인 감독들은 지역의 삶과 역사에 천착해가며 자신의 스타일과 온전히 무주의 정체성을 조화해내려 도전한다. 그 결실이 단편인 동시에 장편으로 기능하는 본 작품으로 귀결된다. 아울러 어느새 무주라는 지역을 표상하게 된 무주산골영화제가 지역의 기대에 부응하고 축제로서의 역할을 다해낸 기념비로 궤적을 남긴다.
 
2_텍스트가 아닌 이미지로 체험하는 영화
 
"달이 지는 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달이 지는 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디오시네마

 

무주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한 버스에서 배낭을 맨 중년 여인이 내린다. 도보여행을 하듯 그녀는 줄곳 걷고 또 걷는다. 마을 슈퍼에서 빵과 우유로 요기를 하고 양초를 산다. 점점 인적 끊긴 길로 접어들던 여인에게 방울소리가 들린다. 금줄 같은 표시물이 앞길에 드리워져 있다. 그 끝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가 있다. 여인은 그 곳에서 밤을 보내며 무언가 제의를 준비한다. 짧은 과거의 추억, 그리고 어찌할 수 없었던 아픈 이별의 기억이 애도의 감성으로 관객에게도 저며 온다.
 
마침내 여인은 자신이 애타게 그리워하던 존재의 환영과 만난다. 사람은 떠났지만 집은 옛날 기억을 마치 저장장치 마냥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준비하며 간절히 소망했던 그리운 만남은 너무나 찰나에 스쳐 지나가버린다. 그리고 곧 희미해져가는 흔적들의 아련함이 하지만 꽤 오래 지속된다(영문제목 'Vestige'는 바로 '흔적'을 의미한다). 그리고 엔딩 크레디트 정보가 쭉 올라온다. 당황스럽다. 이건 뭐지? 하는 가운데 화면이 바뀐다.
 
겨울의 냉기가 가득했던 풍경이 적당히 밝고 따스한 여름 날씨로 바뀌어 있다.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친구와 만난 지방공무원 민재는 이것저것 '치맥'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민재는 이곳 출신이지만 서울로 진학한 후 다시 고향에 돌아온 상태이고 친구는 거듭 취업에 실패해 상심한 듯 보인다. 위로와 격려를 전하는 민재에게 친구는 "항상 될 거로 생각했어. 근데 안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다른 게 보여. 다른 걸 생각하는 거지 내 인생에서." 그리고 친구는 자고 가라 권유하는 민재의 제안을 슬며시 피한 채 사라진다. 민재는 귀가한다. 그녀의 엄마는 시골에 돌아와 버린 딸에 대한 아쉬움이 깊은지 종종 딸 앞에서 푸념하곤 한다. "여기 있는 놈들 느려 터져서 세상 물정 하나 모른다"는 게 엄마의 단골 레퍼토리다. 하지만 민재는 고향을 지키며 사는 게 편해 보인다.
 
그녀에겐 군청 동료이기도 한, 동네 친구에서 연인이 된 태규가 있다. 태규는 치매 할머니를 돌보며 조부모의 빈집을 지키는 중이다. 둘은 시골 공무원다운 일상을 영위하며 일과 삶을 공유한다. 그리고 꿈인지 현실인지 모호한 체험을 나눈다. 그 이야기들은 언뜻 괴담으로 들리지만 대도시와는 다른 결의 시간 흐름 속에서 그 이야기가 점점 관객 눈에 형상화되는 과정은 마치 명절에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왔다 돌아가는 정취처럼 그려진다. 그 기이한 풍경은 지역의 상황과 역사를 좀 알면 알수록 더 깊은 감흥으로 자리매김할 테다.
 
이제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이미지의 축제가 펼쳐진다. 1부에서 지극히 개별적인 애도와 추모의 기억이 흔적으로 그려진다면 2부 마지막에는 그 흔적이 시공간을 가득 채우며 축제의 질감으로 다가온다. 말 그대로 '축제'의 순간이다. 그 '축제'는 이청준 원작, 임권택 감독의 1996년 영화 <축제>와 통한다. 전통적인 유교식 장례를 치르기 위해 모인 가족들의 시간. 산자가 죽은 자를 전송하기 위한 축제로 표현된 애도와 기억의 찰나와 잇닿아 있는 그 느낌이다.
 
3_영화예술이 구현해낸 잊지 못할 마법의 순간
 
"달이 지는 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달이 지는 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디오시네마

 

1부의 주역인 김금순 배우는 비통함과 간절함을 표정과 몸짓으로 마치 1인극을 구사하듯 표현해낸다. 이미 독립영화계에선 정평이 난 연기자이지만 이 작품에서 선보이는 연기는 그중에서도 특기할 수준이다. 그녀가 그토록 재회하고 싶은 존재를 연기한 안소희는 이제 배우의 얼굴을 선보인다. 2부에서 민재와 태규, 그리고 친구 경윤을 맡은 강진아, 곽민규, 한해인 배우는 각각 장편영화 1편을 혼자 지탱하는 게 가능한 역량을 가진 능력자들이다. 이들이 무심한 듯 툭툭 던지는 대화와 일상의 표정이 그림처럼 어우러진다.
 
그렇게 조화를 이룬 배우들의 표정과 동선을 떠받치는 건 각각 '겨울'과 '여름'으로 대비되는 무주의 공간이다. 같은 공간이지만 서로 다른 배우와 계절이라는 차별화에 의해 전혀 다른 색채를 띠게 된 평범한 시골길은 그 자체로 진귀한 볼거리로 변모한다. 여기에 서로 다른 톤의 음악으로 공간을 채워내는데, 경력과 실력 검증된 뮤지션 모그와 이민휘의 솜씨가 근사하게 덧붙여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영화에서 딱 한 장면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 황혼녘의 도로, 그곳에 홀연히 등장하는 (거의 유일하게) 다수 군중이다. 무주 지역에서 섭외된 평범한 지역 주민들로 대부분 구성되었을 게 분명한 이 출연자들이 <달이 지는 밤>의 진정한 '얼굴(들)'일 테다. 그리고 지역 주민들을 그저 영화제라는 행사의 소비자나 구경꾼이 아니라 주역으로 제 자리를 찾게 하는 도전의 결실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운 기이한 그 풍경에서 공동화되어가는 '지역'의 정서가 제대로 전해져온다.
 
그렇게 재현된 놀라운 이미지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떠난 자와 남은 자들이 재회하는 '매직 아워'이자, 1년에 단 하루 허용된 마법의 시간으로 기능한다. 실로 산자와 죽은 자가 어우러지는 '발푸르기스의 밤'이다. 하지만 그 극적인 순간은 불안과 공포의 표정을 하지 않는다. 쌉쌀하지만 부드러운 밤의 촉감으로 다가와 꽤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 될 마법의 순간이다.
 
<작품정보>
 
달이 지는 밤 Vestige
2020|한국|드라마
2022.09.22. 개봉|70분|15세 관람가
감독 김종관(1부), 장건재(2부)
PD 조지훈(무주산골영화제 프로그래머)
주연 김금순(해숙 역), 안소희(영선 역), 강진아(민재 역), 곽민규(태규 역)
출연 한해인(경윤 역), 안민영(숙희 역), 유순웅(민재 부 역)
음악 모그(1부), 이민휘(2부)
제작 무주산골영화제
배급 ㈜디오시네마
 
2020 9회 무주산골영화제 개막작
2020 25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파노라마'
2020 46회 서울독립영화제 '페스티벌 초이스'
달이 지는 밤 김종관 감독 장건재 감독 무주산골영화제 조지훈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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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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