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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난 6월 30일부터 8월 1일까지 러시아에 체류했습니다. 이 기사는 당시 보고 느낀 것에 대한 기록입니다. [기자말]
로마노프 황가의 유해가 묻힌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의 첨탑
 로마노프 황가의 유해가 묻힌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의 첨탑
ⓒ 이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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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대표적 관광지를 꼽으라고 하면 으레 크렘린궁, 성 바실리 대성당, 겨울 궁전 등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러시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관광지를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를 꼽고 싶다. 차르에게 대항한 혁명가들이 죽어나간 감옥 위로, 차르 일족인 로마노프 황가의 유해가 묻힌 성당의 첨탑이 우뚝 솟아 감옥을 내려다보는 곳.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유산이 같은 장소에서 기억되고 있는 이곳은 현대 러시아에 대한 요약과도 같다. 

처음 러시아를 방문했을 당시 나는 이러한 모순된 이미지의 공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랐다. 무신론을 국교로 했던 소련과 달리 오늘날의 러시아는 러시아 정교회로 대표되는 종교적 활동을 장려하고 정교회의 정점이었던 로마노프 황가를 다시 추억할 뿐만 아니라, 보수적인 종교적 가치를 서구와는 대비되는 '러시아적' 가치로 내세워 반민주적이고 억압적인 정책을 정당화한다. 

오늘날의 러시아는 혁명 직후의 소련과는 물론 스탈린 시절의 국가자본주의 소련과 비교했을 때조차도 완전히 다른 국가이다. 종교를 위시한 보수적 가치를 러시아의 전통적 가치로 내세워 군국주의적 정책을 정당화하는 오늘날의 러시아가, 혁명과 혁명의 결과물인 소련의 유산을 기리는 것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때로 장려하기까지 한다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푸틴의 '의도'
 
"불편한 여자들: 페미니즘의 역사"라는 페미니즘 서적에 19세 이용가 표시가 붙어 있는 모습
 "불편한 여자들: 페미니즘의 역사"라는 페미니즘 서적에 19세 이용가 표시가 붙어 있는 모습
ⓒ 이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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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 방문한 러시아의 서점에서 페미니즘, 사회주의 등의 강한 정치적 지향을 가진 책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고, 대부분의 서점에서 "사회학" "정치학" 등의 코너는 매우 작거나 존재하지도 않았다. 특히 "페미니즘" 책들은 매우 적고 얼마 안 되는 책에도 19금 표시가 붙어 있어, 오늘날 러시아에서 페미니즘은 군국주의에 대한 전통적 저항 세력의 역할을 하기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도 레닌, 트로츠키 등 러시아 혁명 사상가들의 책들은 많은 경우 눈에 띄는 곳에 진열되어 있었고, 상당수 구소련 국가들이 반공주의를 표방하며 레닌 동상을 철거하는 와중에도 러시아에서는 곳곳에서 레닌 동상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레닌은 대러시아주의를 비판하고 차리즘 아래 고통받던 국가들을 포함해 모든 민족의 자결권을 옹호하는 한편, 제국주의 전쟁을 비판하고 전쟁 추구를 계급 투쟁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한 인물이기도 했다. 왜 푸틴의 러시아가 반전 국제주의 혁명 사상을 폈던 혁명가들을 기억하도록 내버려 두는가? 

오늘날 러시아의 역사 쓰기에서 혁명 사상이 무엇이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일련의 박물관 방문 경험 이후였다. 페테르부르크의 정치사박물관에는 2009년 전까지는 없었던 적백내전에 대한 전시관이 새로 생겨 있었고, 적백내전은 차리즘과 혁명 가치의 대립이 아닌 '민족의 비극'처럼 해설되어 있었다. 혁명 가치의 중요한 일부였던 여성해방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사상가인 콜론타이의 '특별전'은 적백내전 전시관보다 한참 작은 골방에서 먼지를 쓰고 있었다. 

혁명 이후에도 지속된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도, 유대인뿐만 아니라 슬라브인에 대한 인종 청소를 부르짖던 나치 독일에 대항해 혁명의 가치를 지켰다는 믿음은 러시아인들의 큰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시에 방문한 모스크바의 승전박물관에서 '대조국전쟁(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승리는 단지 '러시아인' 즉 러시아계 백인 남성의 영광처럼 그려지고 있었다. 수많은 민족과 여성들이 나치 독일에 대항해 혁명 소련의 가치를 수호한다는 믿음 아래 싸웠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은 듯 보였다. 
  
더 황당한 것은 현대사박물관에서의 일이었다. 폭정으로 혁명에 불을 당긴 로마노프 왕가의 몰락이 비극적인 일처럼 그려지고 있는 데다 19세기 후반부터의 역사를 다루고 있음에도 레닌은 거의 등장하지도 않는다는 사실도 황당했지만, 제일 어이가 없었던 것은 스탈린 시기를 다룬 관이었다. 

그 관에는 엉뚱하게도 스탈린의 정책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일본 사무라이 갑옷을 비롯해 전 세계의 진귀한 물품이 전시되어 있어서 의아함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관의 요점은 스탈린 시절은 러시아의 영광스러운 시절이었고, 그래서 수많은 국가가 소련에 온갖 진귀한 선물을 줄 정도였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이 여성 해방, 민족 자결권과 같은 혁명 사상을 적극적으로 퇴보시켰다는 사실은커녕 대숙청에 대한 언급조차 존재하지 않았고, 스탈린은 소련인에게 영광스러운 시절을 선사한 지도자로서만 기억되고 있었다. 

소련은 러시아인의 마음속에서 이미 지울 수 없는 무엇인가가 되어 버렸다. 그렇기에 푸틴의 러시아는 그것을 잊는 대신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국이었던 소련의 이미지만을 활용해, 애국심을 고취하고 군국주의적 지향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한다. 

'아버지'라는 공통분모 

통념과는 달리 러시아는 혁명 이전에도 '러시아인'(러시아계 슬라브인) 단일 민족 국가가 아니었고, 소련 시절은 물론 지금도 러시아는 엄청나게 다양한 민족이 어우러져 사는 대표적인 다민족 국가이다. 러시아인들이 전쟁을 마냥 반길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는 러시아에서도 우크라이나의 피가 섞인 사람을 흔히 찾을 수 있고, 우크라이나에서도 러시아의 피가 섞인 사람을 흔하게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말을 잘못했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전쟁을 언급하는 것조차 꺼렸고, 국가 차원의 조사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지금 러시아인 중 몇 퍼센트가 전쟁에 찬성하는지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러시아 방문을 통해 확실히 느낀 것은 지금의 '특별군사작전'이 전쟁 없이 크림반도를 병합한 2014년만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전쟁에 찬성하는 사람에게도 형제나 다름없는 국가의 국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눈다는 것에 찝찝함을 느끼지 않기란 어려운 듯 보였다. 

그러나 '러시아인'만을 배타적인 '영광'의 대상으로 호명하는 현재의 역사 서술에서 우크라이나인들 또한 그들과 함께 소련을 세우고 나치에 대항한 형제였다는 사실은 잊히고 있었다. 그리고 민족이 돌아가야 할 대상으로 '과거의 영광'이 호명될 때, 그 영광을 재현해 줄 것처럼 보이는 강력하고 마초적인 독재자에 대한 애착도 강해질 수밖에 없다. 푸틴이 레닌뿐만 아니라 스탈린 또한 적극적으로 기리는 이유일 것이다. 

혁명의 결과물인 소련을 연상시키는 이미지와 종교를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던 차르 왕가의 상반된 이미지가 함께 기억될 수 있는 것은, 두 시대 모두 러시아/소련적 가치를 수호하고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기만 한 러시아/소련인에게 '영광'의 시대를 선사하는 '아버지'의 이미지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기억될 수 있는 까닭이다. 

페미니즘 책들을 19금으로 팔아야 하는 것, 콜론타이와 같은 여성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업적이 잊히고 있는 것, 여성 전쟁 영웅이나 국가 영웅들을 적극적으로 기리지 않는 것 또한 강력한 '아버지'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의도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몽골 지배, 혁명 직후 주변국들의 공격, 세계대전과 냉전, 갑작스러운 자본주의의 침투에 이르기까지 험난한 역사를 살아온 러시아인에게는, 외세와 외세적 가치의 침략이라는 수사와 그러한 침략에 맞서 나라를 강력한 아버지의 이미지만큼 익숙한 것도 없다. 

그리고 푸틴은 그것을 안다. 잊을 만하면 화제가 되는 '푸틴 달력'의 웃통 벗은 마초적 이미지들은 또 한 번 군사화되어가는 국가에서 다시금 강력한 '아버지'의 정치학을 추구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계산된 이미지인 셈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과거의 추억에 소구하는 것을 통해 '아버지'의 통치를 정당화할 수 있을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다음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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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이름으로 읽고 씁니다. 남성적 추상화가 아닌 여성의 뼈와 살에서 나온 지식을 추구합니다. 사회학, 심리학 전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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