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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천에서의 반탁집회.
 무심천에서의 반탁집회.
ⓒ 청주근세60년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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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빨갱이는 영원한 빨갱이오!" "그렇지 않습니다." "뭐라고?" "전향자를 교화시켜 정보원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라며 의자를 박찬 서병두(1906년생)는 책상 위에 있는 잉크병을 던졌다. 

병이 벽에 부딪혀 깨지면서 잉크가 사방에 튀었다. 사무실에 있던 단원들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사람들의 눈총을 뒤로 하고 서병두는 씩씩거리며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충북 청주시 남문로 1가에 있는 사무실 근처의 봉우리다방에서 커피를 한 잔 시켰다. 1948년 4월 9일의 일이었다.

그는 좌익 전향자들을 정보원으로 활용하자는 대동청년단 정보부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이 그렇게 단순한 놈들이 아니란 걸 왜 모르는지 답답했다.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다 보니, 초저녁에 장남 정식이가 사무실에 들러 한 말이 기억났다. "한약 달여 놨으니까 일찍 들어오세요" 술 먹고 들어오지 말라는 얘기였다.
 
불청객이 노린 사람은...


웬일로 일찍 집에 들어간 그는 저녁을 먹고 러닝셔츠와 파자마 차림으로 안방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때아닌 천둥번개가 치며 비가 쏟아졌다. "쿵쿵." 천둥소리에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가려져서인지 한참 만에야 대문이 열렸다. "부단장님께 긴급히 보고할 사항이 있어 왔습니다." "누구냐?" "..." 서병두가 방문객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탕'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천둥과 뇌성번개가 다시 내리쳤다.

막내딸 정임(1947년생)이를 안고 있던 서병두의 아내 박미남(1907년생)은 천둥번개 소리에 총소리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런데 화약 냄새가 자욱해져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여보..." 불렀지만 남편은 방에 없었고 뒤채로 연결된 쪽문이 열려있었다.

잠시 후 옆집 할머니가 뛰어 들어왔다. "이 집 애기 아버지(서병두)가 대문 밖 버드나무 옆에 쓰러져 있던데, 많이 취했나 보구려" 집안 식구들이 당도했을 때 서병두는 가슴에 붉은 피를 쏟으며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다.

박미남은 시동생들과 대동청년단에 이 사실을 알렸다. 시내에서 식도원을 하고 있던 큰동생 서병찬(1909년생)과 8공주 사진관을 운영하던 둘째 동생 서병덕(1911년생)이 제일 먼저 달려왔다. 곧이어 온 대동청년단원들이 그를 근처의 권내과로 데리고 갔으나 의사는 고개를 저었고 이후 도립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응급조치 한 번 못 해보고 눈을 감았다. (전창식 <월간충청> 1976년 12월호 '서병두 암살사건') 그렇게 해서 1948년 4월 9일 저녁 대동청년단 충북도단부 부단장 서병두는 불청객의 미제 45구경 권총에 의해 생을 마감했다. 

반탁=반공=반소=애국

"반탁은 애국이요 찬탁은 매국이다" "찬탁을 지지하는 공산당을 때려 부수자!" 구름떼처럼 모인 군중은 사회자의 선창에 끝말을 구호로 외쳤다. "때려 부수자!" 청주 무심천 광장에서 1946년 1월 13일에 열린 '반탁 청주시민대회'의 열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른 지지파와 반대파의 의견은 극명하게 갈렸다. 남로당을 위시한 좌익 진영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에서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이 단일한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데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판단해 지지를 천명했다.

해방 직후 친일파로 규정돼 잔뜩 위축되었던 우익진영은 반탁=반공=반소=애국의 논리를 내세우면서, 정국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끌고 갔다. 전국적인 상황과 마찬가지로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을 계기로 청주에서도 우익진영과 좌익진영의 투쟁이 본격화됐다. 1946년 1월 7일 청원군 일대의 농민들이 3일 치의 식량을 휴대하고 조직적으로 청주로 진입했다.

조선공산당이 주장하는 토지개혁과 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이날 집회에는 청원군 부용면, 강외면, 오창면 농민들이 주로 참여했다. 농민들은 괭이와 쇠스랑 같은 농기구와 몽둥이를 들고 청주 시내로 행진했으며, 우익진영은 청주약국 네거리에서 저지선을 쳤다.

하지만 수적 우세를 점한 좌익진영은 저지선을 뚫고 현재 중앙공원 자리에 있던 동지사(同志社)로 집결해, 대오를 정비했다. 하지만 추이를 지켜보던 CIC(미군 24군단 소속 첩보부대)가 집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CIC가 압수한 농기구와 몽둥이는 트럭 두 대 분량이었다.(편찬위원회, 1985, <청주근세60년사화>)

이날 집회가 미군정과 CIC에 의해 무산되었다면, 이후의 집회 대부분은 미군정과 충청북도 경찰국의 비호를 받은 우익단체에 의해 진압되었다. 더 나아가 우익단체들은 연합해 농민들과 좌익들의 가옥을 파괴하거나 지도자들을 테러했다.

대표적으로는 1947년 8월 28일 진천군 이월면에서의 좌·우 격돌 사건이 있다. 우익의 테러에 맞선 좌익들의 저항에 청주와 충주의 우익단체들이 대거 출동해, 좌익진영을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충주독촉국민회 회원 박명섭, 김장렬이 사망했다. 좌익과 우익 간의 목숨을 건 투쟁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때까지 지속됐다.

청주 제1보통학교를 나와 두 차례 일본에 다녀온 서병두가 '면도칼'이란 별명을 얻은 것은 일제강점기 때였다. 1941년 겨울 어느 날 밤 방공훈련 도중 도내무부장 관사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적의 공습에 대비하는 방공훈련에서 등화관제, 즉 불빛을 차단하거나 아예 끄는 게 기본이었다. 

당시 청주경찰서 옥상에서 경계를 서던 청주경방단(소방단과 방호단을 통합해 일제말기 만든 단체) 간부 서병두는 관사에 전화를 걸어 내무부장과 언쟁을 벌였다. "지금 전화한 놈이 누구야?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하지만 서병두는 원리원칙대로 대응했고 내무부장과 격투 일보 직전까지 갔다. 이 사건은 신문에 대서특필되었고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에게까지 알려져, 충북도 내무부장이 사표를 내게 되었다. 이 일로 서병두는 '면도칼'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해방 후 서병두는 우익 청년단체의 중심에 섰다. 태극청년단(단장 박기운) 부단장에 이어 청년조선총동맹(청총) 회장을 역임한 데 이어, 우익청년단의 대동단결을 주장한 이청천 장군이 만든 대동청년단 충북도단부(단장 민영복) 부단장을 맡았다. 또 1946년 6월 초 청주부(현재의 청주시) 공회당에서 창당한 한민당 충북도당 청년부장을 맡았다.(홍원길, 1978, <청곡회고록>) 이처럼 '면도칼' 서병두는 해방 후 청주 우익단체의 지도자로 자리매김 되었고 좌익과 우익의 투쟁 현장을 진두지휘했다. 

남로당원의 총격에 전 경찰국장도 목숨 잃어
 
남로당원 최시동이 서병두를 암살하는 장면 (그림: 이소리 작가)
 남로당원 최시동이 서병두를 암살하는 장면 (그림: 이소리 작가)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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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두가 불청객의 총탄에 쓰러진 지 14일 후인 4월 23일 밤 괴산읍 동부리에 또 불청객이 나타났다. "탕" 한 발의 탄두는 정확히 김영규의 가슴에 꽃혔다. 김영규(1890년생)는 1948년 5월 10일 시행된 제헌의회 선거에 충북 괴산군에 입후보한 이였다. 그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8일부터 1946년 3월 10일까지 제3대 충청북도 경찰국장을 지내고, 1946년 과도입법의원 충청북도 대표를 역임했다.

김영규는 왜 저격 당했을까. 남로당과 민족주의세력 일부는 제헌의회 선거를 남한만의 단독선거로 규정하고 선거 보이콧을 했다. 그런데 남로당은 단순히 선거 불참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소위 반민족적인 후보를 암살하고, 투표소를 파괴하는 적극적인 방해 운동을 전개했다.

김영규는 1934년 만주국 안둥성 환런현 경찰서원으로 재직했다. 같은 해 3월 만주국 건국공로장을 받았고, 1939년에는 안둥성 환런현 경좌로 근무했다. 그는 1941년 조선의 경제 전반에 대한 세력 범위를 조사해 국세조사(國勢調査) 기념장도 받았다.(중부광역신문 2019년 12월 17일자) 이런 이력 탓에 남로당은 제헌의회 선거 반대 투쟁의 일환으로 김영규를 저격한 것이다.

남로당의 5.10선거 반대 투쟁은 청원군과 영동군에서도 있었다. 1948년 5월 8일 오전 2시에서 4시경 청원군 강외면 봉산리 455번지 국회의원 입후보자 김인영의 자택 사랑방에서 좌익 김민수(가명) 등이 투척한 수류탄에 이옥남, 서용하, 박귀남 3인이 사망하였고, 김오남, 박오규, 박종석 3인이 부상을 당했다.

피해자들은 제헌국회의원 선거 당시 경찰을 도와 인근 투표소의 경비를 하기 위해 조직되었던 야경의 일원으로 사건 현장에 모여 쉬고 있던 중이었다. 가해자는 남로당에 의해 전국적으로 전개된 제헌의원선거 방해 투쟁의 일환으로 테러를 행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영동군 남로당은 1948년 5월 5일 양강면 양정리 뒷산 가장골에서 5.10선거 적극 지지자 및 우익 악질분자 암살계획을 논의했다. 그 결과 양강면 부면장 배원규, 대동청년단장 전광거, 향보단장 김재형, 선거위원장 민진호를 살해할 것을 결정했다. 그 결과 부면장 배원규가 처형당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08 영동군 피해자 실태조사 보고서>)

서병두 암살사건은 이처럼 남로당의 제헌의회선거 방해 운동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이후 경찰 조사과정에서 남로당 충북도당이 작성했다는 '청주시 반동분자 제거 대상 을(乙)호' 명단에는 서병두, 박계택, 홍정흠, 하건홍, 이학구, 차근호, 이장오, 나호기, 민영복(청주시 제2대 국회의원), 박기운(청주시 초대 국회의원) 등이 있는데 서병두가 일순위에 올랐다.

결국 해방 직후 단일 민족국가 건설을 둘러싼 좌우익 투쟁은 제헌의회 선거를 앞두고 최고점을 달했다. 우익은 좌익을 배제하고, 좌익은 우익을 테러하는 역사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영동군 양강면 부면장 배원규가 1948년 5월 5일 암살된 장소
 영동군 양강면 부면장 배원규가 1948년 5월 5일 암살된 장소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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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면도칼, #서병두, #단독선거, #남로당, #모스크바삼상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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