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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국권 수호와 회복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제와 맞섰던 헐버트 박사
 대한제국의 국권 수호와 회복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제와 맞섰던 헐버트 박사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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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요 아리랑을 처음으로 국제사회에 소개한 외국인은 미국인 선교사 호머.B.헐버트(1863~1949) 박사다. 대한제국 시기인 1886년 첫 서양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 교사로 채용되어 한국에 왔다.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1907년)을 도왔다가 일제에 의해 추방되고 미국에서도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저서 <대한제국멸망사>의 서문에서 "나는 1800만 한국인들의 권리와 차유를 위해 싸웠으며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라고 썼다. 별세하기 직전 "나는 웨스턴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고 싶다"고 한 유언대로 1949년 한국에서 숨을 거뒀다.
 
을사늑약 체결 이듬해인 1906년 헐버트는 <대한제국멸망사>라는 책의 머리말에서 조선인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다. "그들은(조선인은) 수적인 면에서 중국에 눌려서 살고 있으며 재치 면에서 일본에 눌려서 살고 있다. 그들은 중국인처럼 상술에 능하지 못하며 일본인처럼 싸움을 잘 하는 민족도 아니다. 기질 면에서 보면 그들은 중국인이나 일본인보다 앵글로 색슨 민족에 가까우며 극동에 살고 있는 민족 중에서 가장 상냥하다. 그들의 약점은 어느 곳에나 무지가 연속돼 있다는 점이지만 그들에게 부여된 기회를 잘 활용하면 그들의 생활 조건은 급격하게 향상될 것이다."
▲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힌 독립운동가 헐버트 을사늑약 체결 이듬해인 1906년 헐버트는 <대한제국멸망사>라는 책의 머리말에서 조선인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다. "그들은(조선인은) 수적인 면에서 중국에 눌려서 살고 있으며 재치 면에서 일본에 눌려서 살고 있다. 그들은 중국인처럼 상술에 능하지 못하며 일본인처럼 싸움을 잘 하는 민족도 아니다. 기질 면에서 보면 그들은 중국인이나 일본인보다 앵글로 색슨 민족에 가까우며 극동에 살고 있는 민족 중에서 가장 상냥하다. 그들의 약점은 어느 곳에나 무지가 연속돼 있다는 점이지만 그들에게 부여된 기회를 잘 활용하면 그들의 생활 조건은 급격하게 향상될 것이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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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사회장이 치러지고 유언에 따라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혔다. 한국정부는 고인에게 1950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에 이어 2014년에는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헐버트는 서울에 머물 때인 1896년 오랫동안 입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을 직접 듣고 오선지에 채보하여 미국에서 <조선류기>(The Repository)(1896년)에 <아라령(A-RARYNG)>이란 제목으로 게재하였다. 여기 실린 아라령은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이다.

"아라령 아라령 아라리오 아라령 얼싸 배띄어라"로 시작되는 이 아리랑은 수많은 아리랑 가운데 곡조까지 담은 것으로는 가장 오랜 것으로 인정받는다. 헐버트의 아리랑은 1919년 3.1혁명을 전후하여 한국에서 많이 불렸다.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의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1906)에 수록된 남대문의 사진자료이다. 전차가 부설되어 남대문 홍예를 통과하던 시절의 모습이다. 하지만 홍예문의 바닥높이는 전차부설 이전이나 이후나 별 차이가 없다.
▲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의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1906)에 수록된 남대문의 사진자료이다. 전차가 부설되어 남대문 홍예를 통과하던 시절의 모습이다. 하지만 홍예문의 바닥높이는 전차부설 이전이나 이후나 별 차이가 없다.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의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1906)에 수록된 남대문의 사진자료이다. 전차가 부설되어 남대문 홍예를 통과하던 시절의 모습이다. 하지만 홍예문의 바닥높이는 전차부설 이전이나 이후나 별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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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도 '아리랑'을 세계에 알린 최초의 외국인이 헐버트 박사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국제고려학회 주최로 2018년 8월 17일부터 18일까지 중국 선양에서 열린 '화해 평화와 번영을 위한 코리아학 국제워크숍'에서 북한 조선사회과학원 민속학연구소 소장 리영호는 발표문에서 "헐버트의 아리랑은 첫 소절과 둘째 소절의 선율과 장단 리듬이 완전히 반복되고 있다"고 말한 뒤 "선율이 완전히 동도진행으로서 일반 사람들이 항간에서 흥얼거리는 노래 형태로 채보되었다", "헐버트 박사가 자유로운 박자로 불리던 민중의 노래를 가감없이 원형대로 채보했음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북한은 그동안 헐버트가 미국인으로 한국정부에서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것 등을 이유로 그가 최초의 아리랑 채보자라는 사실을 침묵으로 일관해왔다. 

헐버트박사 기념사업회 김동진 회장은 "북한공공기관이 처음으로 헐버트의 업적을 국제학술회의에서 평가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주석 1)
 
아리랑을 최초로 서양식 곡조로 채록한 헐버트의 초상(문경새재 아리랑노래비 앞면에 새겨져 있다)
 아리랑을 최초로 서양식 곡조로 채록한 헐버트의 초상(문경새재 아리랑노래비 앞면에 새겨져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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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유네스코 인류무명문화유산(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 목록에는 〈아리랑, 한국의 서정민요(2012)〉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아리랑 민요〉(2014)가 함께 등재돼 있다. 남북관계가 다시 화해 국면으로 풀리게 되면 〈헐버트 아리랑〉을 공동등재 했으면 싶다. 


주석
1> 이 관련 기사는 <문화일보>, <MK뉴스>, 2018년 8월 29일치 참조.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문화열전 - 겨레의 노래 아리랑]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겨레의노래, #겨레의노래_아리랑,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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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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