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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이 시작된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책상 위에 엎드려 잠든 아이들을 깨우러 다니는 감독 교사의 심정은 참담하다. 시험지를 받기도 전에 이미 쿠션을 꺼내 잠잘 준비를 마쳤다. 그들에게 2시간 가까운 시험 시간은 애초 다음 과목을 준비하기 위한 휴식 시간인지도 모른다.

고등학교의 수능 모의평가 2교시 수학 영역이 치러지는 교실의 익숙한 풍경이다. 수능을 코앞에 둔 고3부터 고1 교실까지 별반 차이가 없다. 학년과 상관없이 소위 '수포자(수학포기자)'가 많다는 뜻이다. 애써 풀든 찍고 자든 점수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이미 알아버렸다. 

한국사 실력 뽐내는 그 학생은 '수포자'
 
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전 마지막 모의평가인 2022년 전국연합학력평가가 지난 8월 31일 진행됐다.
 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전 마지막 모의평가인 2022년 전국연합학력평가가 지난 8월 31일 진행됐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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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31일 치러진 9월 고1 전국연합학력평가의 수학 영역 시험 시간. 착실함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민섭(가명)이 역시 충혈된 눈으로 책상 위에 쓰러져 있었다. 내 수업 시간에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라 적잖이 놀랐다. 그마저 '수포자'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학년에서도 내로라하는 '한국사 덕후'다. 모둠활동으로 진행되는 수업 때 그는 늘 '스카우트 대상 1호'다. 모둠을 편성할 때 서로 모셔가기 위해 안달이 날 정도로 그의 한국사 실력과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가 속한 모둠은 감점을 당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요즘 아이들의 성적에 대한 불문율이 하나 있다. 공부 잘하는 친구가 운동도 잘하고, 영어 잘하는 친구가 수학도 잘한다는 것. 성적이 개인별 자존감과 정비례한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이는 없다. 뒤집어 보면, 공부 못하는 친구가 사고 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뜻이기도 하다.

엊그제 민섭이가 큼지막한 도화지에 연필로 스케치한 그림 하나를 들고 왔다. 그림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주변의 모든 동료 교사들도 하나같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언뜻 학창 시절 추억이 담긴 빛바랜 흑백 사진인 줄 알았다. 그림 속 인물들의 표정과 동작이 마치 살아있는 듯했다. 

2절지 크기의 그림으로, 완성하는 데 두 달 정도가 소요됐단다. 공부하다가 집중이 안 될 때 틈틈이 그렸다는데, 만약 도중에 쉬지 않고 매달렸다고 해도 족히 몇 날 며칠은 걸렸을 법한, 말 그대로 '대작'이었다. 주먹만 한 크기의 작은 얼굴에 수백 번의 연필 자국이 남아있으니 그림에 들인 정성을 알 만하다. 

민섭이는 이 그림으로 교사들 사이에서 일순간 '장인'으로 소문이 났다. 그런데, 교사들만 몰랐을 뿐, 이미 친구들은 그의 그림 실력을 다 알고 있었다. 중학교 시절 예술고등학교 진학을 염두에 뒀다고 하니, 자신의 남다른 예술가적 기질과 재능을 뽐내고 싶은 바람이 있었던 듯하다.  

민섭이는 과연 대학 진학에 성공할 수 있을까
 
두 달을 공들여 그린 민섭이의 작품. 교실 뒷편에 표구해서 급훈인 양 걸어두었다.
 두 달을 공들여 그린 민섭이의 작품. 교실 뒷편에 표구해서 급훈인 양 걸어두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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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중지추'라고나 할까. 비록 다른 꿈이 생겨 인문계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일상 속에서 그의 재능은 감출 수 없었다. 그는 한국사와 미술뿐만 아니라 국어와 사회 등의 교과에도 관심이 많아 박학다식한 친구로도 통한다. 지금껏 '한국사 덕후'로만 여겨온 게 되레 외람될 정도다. 

그는 실습 나온 교생 선생님과 함께한 즐거웠던 추억을 부러 그림에 담아낼 만큼 마음 씀씀이 또한 순수하다. 매사 명랑하고 쾌활하지만, 그 또래 아이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삿된 비속어를 그에게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모범생'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멋진 친구다.

그러한 민섭이는 과연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대학 진학에 성공할 수 있을까. 인문계고등학교에 왔으니 대입 준비를 게을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도 진학 관련 자료들을 찾아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차근차근 준비하는 모습이지만, 불안해하는 낯빛을 감출 순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특출난 재능이야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거지만, 그것이 대학 진학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수포자'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대입을 앞둔 고등학생이 수학을 포기했다는 건, 다른 그 어떤 탁월한 역량이라도 순식간에 무력화시키는 장애물로 작용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수포자'는 이공계열 학과를 선택할 수 없다. 이른바 '신입생 모셔오기 전쟁'을 치르고 있는 무명의 지방 사립대라면 모를까, 웬만한 대학에서는 어림도 없다. 더욱이 이공계열 학과의 비율이 70%를 상회하는 현실일진대 선택지는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알다시피, 수학은 이공계열 모든 전공의 기초 학문에 해당한다. 수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다면 사상누각일 뿐이다. 학생부종합전형의 경우, 대학마다 교육과정 내 수학 관련 교과목인 미적분과 확률과 통계, 기하 등을 모두 이수한 수험생을 우대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렇다고 인문 사회계열로의 진학이 호락호락하냐면 그것도 아니다.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이라면 애초 넘볼 수조차 없다. 대입 전형과 상관없이 명문대일수록 전공과 상관없이 국어, 수학, 영어를 비롯해 모든 과목의 성적이 두루 우수해야만 진학을 꿈꿀 수 있다. 

대학에서 전공을 공부하는 데 수학이 꼭 필요해서라기보다 기본적인 학업 역량과 학교생활의 성실도를 판단하는 지표로 삼고 있어서다. 수학 성적만 제외하면 전혀 꿀릴 것 없는 그에게 명문대는 '넘사벽'인 셈이다. 대입 수험생에게 '수포자'는 천형과도 같은 낙인이다. 

'수학'이 쥔 열쇠
 
수학.
 수학.
ⓒ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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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의 진로는 수학이 열쇠를 쥔 모양새가 됐다. 돌고 돌아 미대에 진학하겠다는 거다. 솔직하게 말하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도 있고 그나마 수학이 영향을 덜 미치는 전공을 찾다가 다다른 결론이다. 그가 굳이 인문계고등학교에 진학한 이유가 사라진 셈이다. 

지방대 미대라도 만만하게 볼 건, 물론 아니다. 진학 지도 경험이 많은 한 동료 교사는 이렇게 매조지었다. 국·영·수 성적이 어느 정도 뒷받침되는 아이 중에 미술에 재능이 있는 경우 진학하는 곳이 미대라고. 그는 '수포자'가 미대에 합격한 경우는 없다고 잘라 말하기도 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왜 전국의 모든 수험생이 애면글면 수학에 목매달아야만 할까. 수학 공부할 시간에 다른 과목을 공부한다면 더 큰 학업의 성취를 이룰 텐데, 자신의 적성과 흥미와는 상관없이 수학을 수험생의 '기본 자격'으로 삼고 있느냐는 거다. 

이는 아이들이 이구동성 건네는 질문이기도 하다. 수학 때문에 다른 공부까지 싫어졌다며 하소연하는 아이들마저 적지 않다. 고등학생에게 수학은 말 그대로 '공공의 적'이다. 교실에는 '수포자'와 '아직 포기하지 않은', 어쩌면 '곧 포기하게 될' 아이들 두 부류만 존재할 뿐이다. 

흔히 수학의 도움 없이는 사회현상과 자연과학의 원리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다며 칭송한다. '이팔청춘' 아이들의 절반 이상을 책상 위에 거꾸러뜨리는 현실에서 민망한 찬사다. 수학이라는 학문에 무슨 죄가 있으랴마는 수학에 대한 아이들의 혐오는 어느덧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다. 

아무리 중요한 학문일지언정 해가 갈수록 '수포자'만 양산하는 수학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나. 원인이 대입에 있든, 교과 내용과 교수법에 있든 하루빨리 대책이 나와야 한다. 고등학교의 정규 수학 수업만 개인당 200시간에 육박한다. 아이들이 그 많은 시간을 허송하도록 방치하는 건, 학교를 넘어 우리 사회의 죄다. 

수학 수업 시간, 오늘도 민섭이는 책상 위에 엎드려있다. 그 시간 차라리 도화지를 펴놓고 그림을 그리도록 하면 어떨까 싶다. 하다못해 좋아하는 역사책이라도 마음껏 읽게 한다면 덜 미안할 듯하다. 교실 벽에 담임교사가 부러 표구해서 걸어둔 그의 작품이 부디 그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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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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