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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었다." "여름의 끝을 만났다."

요즘 sns 피드를 훑다 보면 이런 문장이 자주 발견된다. 문장 뒤로는 기분 좋은 바람이 불고, 우아한 은빛 깃털을 가진 새가 어른거린다. 여름을 훌훌 털어버리고 이제 서정의 계절, 가을을 말하는 풍경이다. 여기에 생각 없이 기대고 싶다가도, 금세 정신이 번쩍 든다. 잊기엔 너무 빠르지 않은가 싶기 때문이다. 올여름, 무척이나 지난하고 극심했던 가뭄과 폭염과 폭우와 태풍을 말이다.

두려움과 당혹감, 막막함을 경험하게 한 여름이었다. 우리가 익히 알던 여름이 아닌 여름. 물론 우리가 그런 감정에 휩싸이게 된 것은 단지 날씨와 기후, 기상 현상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무서운 힘을 가진 비와 바람과 메마름과 열기가 어디를 향하는지, 어디부터 향하는지를 뚜렷이 목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8월 9일, 전날의 기록적인 폭우로 서울 관악구의 반지하 집에 살던 세 여성이 참사를 당했다. 이것은 가난과 주거취약성이라는 삶의 조건을 끌어안은 채로도 꿋꿋이 버텨온 이들의 삶이 한순간 침수된 사건이었다. 그 삶을 꾸준히 모른 척해온 정부의 무관심과 무능이 그들을 침수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사건이 품은 진실 앞에서 많은 이들이 통탄하고 아파하고 분노했다. 국가가 방치하고 키워낸 기후재난은 가장 낮은 곳부터 겨냥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목격했기 때문이다.
 
8월 8일 밤 내린 기록적 폭우로 인해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한 빌라 반지하에 살던 모녀(47, 13)와 발달장애인(48) 세 식구가 숨졌다. 9일 반지하 집 앞에 널브러져있던 토끼 인형.
 8월 8일 밤 내린 기록적 폭우로 인해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한 빌라 반지하에 살던 모녀(47, 13)와 발달장애인(48) 세 식구가 숨졌다. 9일 반지하 집 앞에 널브러져있던 토끼 인형.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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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쩌면 가장 낮은 곳은, 인간이 있는 자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곳에는 비인간동물이 있다. 다만 그 사실은 '뚜렷이 목격'되지 않는다. 그것을 보지 않아도 되게 해왔던 문화와 믿음체계, 산업시스템 때문이다. 그리하여 기후재난은 비인간동물에게 더욱 위력적인 것이 되고 만다. 이들의 이름 없는 죽음은 애도될 수도 없다. 애도는 아예 상상되지 않거나, 겨우 상상된 애도는 비인간동물이라는 재산을 잃은 인간에 대한 위로로 쉽게 치환된다.

8월의 참사가 있은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는 포항 남구의 한 아파트에서 다시 6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 참사는 앞서 일어난 참사와 그렇게 다를까? 이것이 그저 태풍 힌남노가 동반한 폭우 때문이기만 할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를 태풍과 폭우에 대한 대비 매뉴얼의 부재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해야 한다. 이 역시 재난에 대한, 기후 문제에 대한 정부의 오랜 안일과 무능 때문인 것이다.

이 기후위기, 기후위협의 시대에 그들은 대체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가. 지금 당장, 바로 지금, 머잖아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위험의 가능성을 시뮬레이션하고, 구체적인 대비책을 마련하고, 열악한 삶의 조건을 견뎌온 존재들을 더한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지금의 시스템을 성찰하고 되돌려야 할 그들.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는 이미 그들이 무얼 하고 있는지 보았다. 그중 대표적인 누군가는 폭우가 어떤 이의 삶을 집어삼키든 말든, 태풍이 누군가의 남은 시간을 다 쓸어가든 말든, 일상의 리듬을 전혀 흩뜨리지 않은 채 저 높은 곳에 마련된 자신의 안락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 모습은 그 무엇보다 훌륭한 탄소흡수원이자 생물다양성의 보고인 갯벌을 파괴해 새로운 공항을 거듭해 지어 나가려는 국토부의 독단적이고 폭력적인 행보를 거울처럼 비춘다. 또 이 모습은 우리나라의 대표 정유사이자 탄소기업인 SK이노베이션, 현대오일뱅크, GS칼텍스, 에스오일이 최근의 원유값 인상과 유류세 인하의 흐름을 틈타 역대 최대의 영업이익을 내면서도, '횡재세'(windfall tax) 등 요구엔 우리도 힘든 때가 있었으니 이제 돈벌이 좀 하게 놔두라 말하는 장면과도 흡사하다.

그뿐인가. 원자력발전소가 세워진 마을 주민 대부분이 피폭되고 마을이 폐허가 되어도, 깨끗한 원자력발전이 기후위기시대의 대안이라는 식의 주장을 하는 윤 정부의 모습은 폭우보다 무섭다.

이제 우리는 말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뚜렷이 목격한 이 모든 장면들을 더는 모른 척하고 살 수 없다고. 이제 우리는 이미 뚜렷이 목격된 그 장면들보다 더 깊은 곳까지 들여다볼 것이라고. 우리가 먼저 바뀌고 우리가 직접 바꾸겠다고. 그렇게 더 늦지 않게 목소리를 모아 말해야 하지 않을까. 924 기후정의행진에서 우리는 만나고 외치고 노래해야 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으로도, 분노하는 마음으로도, 낮고 더 낮은 곳에 있는 공거의 존재들을 지키려는 마음으로도 우리는 거리에서 만나야 하지 않을까.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 희음 활동가. 기후정의행진 집행위원회 조직팀.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 희음 활동가. 기후정의행진 집행위원회 조직팀.
ⓒ 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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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 희음 활동가는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 기후정의행진 집행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이 기고는 기후재난과 불평등을 뛰어넘어 기후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결성된 '924 기후정의행진' 집행위원들의 릴레이기고입니다. 오는 9월 24일 광화문 일대에서 열리는 기후정의행진에 함께 해주세요. (정유4사 부분 관련, 8월 18일 <한겨레> ‘정유사 횡재세 도입?... “온실가스 뿜는데 기름값 올라 횡재”’ 기사를 참조했습니다.)


태그:#기후정의, #기후정의행진, #희음, #기후위기앞에선창작자들, #924기후정의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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