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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3일은 일본의 변호사 후세 다츠지(布施辰治, 1880~1953)의 기일이었다. 영화 '박열'이나 SBS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박열 편을 시청했더라면 익숙한 이름이 바로 후세 다츠지일 것이다. 이 영향 덕분인지 사람들은 후세 다츠지를 단순히 '박열의 든든한 변호사'나 '한국의 독립운동가를 도와 준 일본인'로 인식하고는 한다.

물론 이런 인식은 후세 다츠지의 활동을 빛나게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이런 공로로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후세 다츠지는 단순히 한국 독립운동가를 변호한 사람으로 기억되기에는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법정에서 사회로
 
"인간은 누구든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 나가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 진정한 자신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는 양심의 소리이다. 나는 그 소리에 따라 엄숙히 '자기혁명'을 선언한다. 사회운동의 급격한 조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종래의 나는 '법정의 전사라고 말할 수 있는 변호사였다. 하지만 앞으로 '사회운동에 투졸(鬪卒)한 변호사로 살아나갈 것을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민중의 권위를 위해 선언한다. 나는주요 활동장소를 법정에서 사회로 옮기겠다('자기혁명의 고백', <법정으로부터 사회로>창간호, 1920)." - 동북아역사넷, 후세 다츠지

1920년, 후세 다츠지는 변호사 활동 노선을 변경하면서 '법정에서 사회로'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은 그 이후 후세의 삶이 민중에게 헌신하는 이력들로 가득찼다는 것에서 증명된다. 그렇기에 그가 맡은 사건은 비단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만 한정되지 않았다. 

그것을 증명하는 일이 1926년 후세의 두 번째 조선 방문 때 있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의해 토지를 강탈당한 나주 궁삼면 농민들의 문제를 후세가 조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조사는 총독부의 방해를 받았고, 예정되어있던 강연마저 취소되는 탄압을 당했지만 후세는 조사를 강행하여 토지를 강탈당한 농민들 편에 섰다.

또한, 후세는 일본의 패전 이후 재일조선인 편에서 싸우기도 했다. 패전 직전 후세는 일본제국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변호했다는 이유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는데, 변호사 자격 회복 이후 주도적으로 일본 사회 내 약자였던 재일조선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이 사건으로 우리는 후세를 '독립운동가의 변호사'에서 '민중의 변호사'로 확장시켜 볼 수 있다. 실제로 그의 신념이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였다는 사실은 이를 더 잘 보여준다. 

약자에 대한 헌신이 국경을 뛰어넘다

1953년 그가 죽었을 때 슬퍼한 사람들의 국적은 다양했다.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등. 공통점은 억압으로부터 고통 받았고, 후세가 곁에서 같이 싸워준 사람들이라는 점이었다. 후세 본인이 '법정에서 사회로' 활동 영역을 확장시킨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도 국경을 뛰어 넘었다.

덕분에 그는 폭력의 광기가 주류였던 시대 양심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소중한 증거가 되었다. 더욱이 지금도 그의 행적을 아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처음에도 언급했다시피 최근에는 한국에도 많이 소개되어 후세의 신념이 더욱 빛나고 있다. 

후세 다츠지로 부터 한일관계를 생각한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일본 측에서는 한일관계 개선을 기대하는 분위기다. 윤석열 정부도 이에 호응하듯이 징용공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려는 행동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과정 속에서 피해당사자들은 분노하고 있다. 이런 식의 관계 개선은 무의미하다. 정부 간 사이는 좋아질지 몰라도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감정의 골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분명 일본의 식민지배로 인해 한일관계에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있다. 더욱이 한일관계는 이 상처를 보듬기는커녕 부정하고 더 깊게 찌르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후세 다츠지가 약자를 위해 보여주었던 헌신을 다시 생각한다.

만일 한일관계를 풀어나갈 당사자들이 후세처럼 행동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범죄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서서히 마음을 치유하고 여러 문제들이 해결되는 단초가 마련되지 않았을까?

지금의 한일 양국 사이의 문제는 여러 분야가 얽히고 섥혀 마치 해결 할 수 없는 거대한 실타래처럼 보이지만 피해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방향으로만 나아간다면 언제든지 풀릴 수 있다. 후세는 죽었지만, 그의 헌신은 죽지 않았고 아직도 유효하다. 지금은 졸속으로 한일관계를 개선시키는 것이 아닌 후세의 헌신과 같이 진심으로 과거사 문제에서 상처받은 약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해결책을 마련할 때다.

태그:#후세 다츠지, #한일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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