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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디테일을 잡아가면서 완성하실게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나뭇잎. 그리고 요즘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을 붙들어 매는 소실점까지. 친구가 보내준 사진 한 장에는 내 마음을 건드리는 이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친구가 찍어 보내 준 풍경 사진. 너무 맘에 들어 무작정 그려보기로 마음먹었어요.
▲ 친구가 찍어 보내 준 풍경 사진. 친구가 찍어 보내 준 풍경 사진. 너무 맘에 들어 무작정 그려보기로 마음먹었어요.
ⓒ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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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진 한 장에 꽂혀 풍경을 그리기 시작한 지 석 달여. 나를 지도해 주시는 미술 선생님께서 드디어 작품 완성을 위한 지침을 내려 주셨다. 그림을 완성하려면 디테일을 잡아야 한다고. 완성도는 디테일에서 판가름 나기 마련이라고. 그러나 주 1회 성인 취미 미술을 시작한 지 1년도 안 된 내게 그림은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하물며 디테일이라니.
 
유화로 풍경을 그리다보면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아요.
▲ 유화 풍경화1 유화로 풍경을 그리다보면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아요.
ⓒ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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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선생님은 어느 디테일을 어떻게 건드려야 할지 몰라 어버버하고 있는 나를 옆으로 앉히고 건드릴 부분을 짚어주셨다. 선생님이 우거진 나무 밑동 주변, 잎이 바랜 연갈색 풀잎들을 빗금 긋듯 선을 그려 넣기 시작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유화로 풍경을 그리다보면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아요.
▲ 유화풍경2 유화로 풍경을 그리다보면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아요.
ⓒ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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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로 풍경을 그리다보면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아요.
▲ 유화풍경3 유화로 풍경을 그리다보면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아요.
ⓒ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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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까지 내 눈에 전혀 보이지 않았던 지푸라기 같은 풀들이 '나 여기 있소' 하고 일제히 우수수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아니, 저렇게 버젓이 존재하던 것들이 왜 여태 내 눈에는 띄지 않았을까. 무슨 매직 아이 그림도 아니고 선생님이 손을 대자마자 또렷이 그 형상을 드러내는 풀잎들이 신기하면서 한편 야속했다.

답을 알고 나면 그전까지 전혀 알 수 없던 것들이 명징해지곤 했다. 노래 가사를 맞추는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전혀 들리지 않았던 가사들을 패널이 추측하고 나면 신기하게도 귀에 쏙쏙 들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또렷하게 잘 들리는지 당황스럽기까지 할 정도로.

나뭇잎 사이사이 은은하게 비치는 햇살을 표현하기엔 내 실력이 턱없이 모자라다. 선생님은 햇살이 퍼지는 모습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시범을 보여주셨다. 가르치는 이의 바른 시범은 배우는 이에게 시도할 용기를 주는 법이다.

다만, 이전까지 없던 햇살이 그림에 등장하는 순간, 그림의 전개는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펼쳐진다. 빛은 비치는 공간 전체에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빛이 비치는 각에 맞춰 거의 다 된 줄 알았던 다른 부분들의 명도에 변화가 생긴다. 
 
유화로 풍경을 그리다보면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아요.
▲ 유화풍경4 유화로 풍경을 그리다보면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아요.
ⓒ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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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사진에서 느껴지는 바람의 방향과 멋대로 휘둘리지 않으려는 나무들의 굳은 결기까지 표현하기에는 아직 실력이 모자라요.
▲ 유화풍경5 원본 사진에서 느껴지는 바람의 방향과 멋대로 휘둘리지 않으려는 나무들의 굳은 결기까지 표현하기에는 아직 실력이 모자라요.
ⓒ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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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는 끊임없는 덧칠로 인한 소멸과 생성이 반복되는 과정. 과연 끝이 있기는 한 것일까. 원본 사진에서 느껴지는 바람의 방향과 멋대로 휘둘리지 않으려는 나무들의 굳은 결기까지 표현하고 싶었던 마음은 욕심이겠지. 

유화로 풍경을 그리다보면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느낌이다. 허허벌판에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멀건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풍경의 초반은 영락없이 시린 겨울 풍경이다. 점점 잔디가 푸르러지고 나뭇잎이 풍성하게 올려지면서 계절은 봄을 지나 여름으로 넘어간다.

원근감을 살리기 위해 가까운 곳에 위치한 나무와 잎에 끊임없이 색을 덧칠하다 나무 사이에서 비추는 강렬한 햇살을 그려내면 계절은 비로소 한여름의 절정에 이른다. 햇살이 뉘엿뉘엿 넘어가고 바람이 잔잔해지기 시작하면 서서히 녹음(綠陰)의 색은 변할테고, 어느덧 한 잎, 두 잎 다 떨구고 나면 처음의 앙상했던 풍경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 자연의 이치는 우리 삶의 여정과 닮았다.

언젠가 지인들과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다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내가 매년 스승의 날이면 연락을 드리는 은사님이 계신다고 하니 지인들이 크게 반색했다. 학창 시절에는 좋아했던 선생님 한두 분쯤은 계셨던 것 같은데 그분들은 왜 나이가 든 우리에게 존경할 만한 어른으로 남지 못하셨을까. 정말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는 것인지, 나이가 드니 더 이상 누군가를 존경하는 마음조차 각박해진 것인지 모를 일이다.

어르신들이 이렇게나 많은 고령화 사회에 진정으로 '존경할 만한' 어른 한 명 없다는 사실은 조금 서글픈 일이다. 그 기준을 너무 높게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기준을 조금 낮춘다면 우리에게도 그런 어른이 생길까.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미술 취미반 레슨 선생님은 내가 못 보는 사진 속 디테일을 어떻게 표현할지 알려주시니 내겐 충분히 스승이시다. 한 분야에서 보낸 오랜 단련의 시간은 그것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은 흉내내기 힘든 내공으로 차곡차곡 쌓였을 테다. 

20년이 넘게 아이들을 만나 오면서 나는 과연 어떤 디테일을 볼 수 있는 힘이 생겼을까. 교직자로서의 삶에 있어 완성이란 없겠지만, 서서히 디테일을 살피면서 내 삶의 그림을 조화롭게 완성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와 블로그에 함께 게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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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넘은 공립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아이들에게서 더 많이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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