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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에 붙어 있는 이번 주 식단. 사실 지난 주부터 고기였다.
 냉장고에 붙어 있는 이번 주 식단. 사실 지난 주부터 고기였다.
ⓒ 박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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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생활 일 년 동안 냉장고가 세 차례 위기를 맞았다. 설날, 추석 그리고 김장. 가을에 결혼했으니 김장, 설날, 추석 순으로 각 집안의 행사를 한 번씩 다 겪었다. 각자 살가운 며느리와 사위 역할을 해내느라 정신노동을 했던 것 이상으로 힘든 건 집안과 회사에서 대량으로 건네주는 명절 음식이었다. 아무 생각 없던 신혼부부에게 이 세 차례의 행사는 갑자기 찾아온 해일과도 같았다. 이번 추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첫 번째 고비는 아내의 회사에서 온 추석 선물 세트였다. 추석 일주일 전, 아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구이용 한우 1.2kg과 LA갈비 2kg을 받았을 때만 해도 "와, 사원복지가 좋네!" 했다. 바로 이어진 광란의 고기 파티. 그 파티가 나흘째 이어지자 슬슬 명절날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엄습했다. 양가 어른들 모두 손이 큰 편이기 때문이다.

지난 설날만 해도 장인어른께서 직접 담근 장아찌 두 통, 꿀과 매실청 그리고 포도주 각각 1병을 받았다(집에 들고 가는데 가방끈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뜯어졌다). 그걸 들고 오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333리터짜리 냉장고에 이걸 어떻게 다 담아야 하는가, 하는 수학적 난제였다. 이걸 어느 세월에 다 먹어야 하는지도 문제였다. 

싸주시는 명절 음식, 이걸 다 어디에 
 
단문형 냉장고. 총 용량 333리터. 작아 보이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둘이서 쓴다.
 단문형 냉장고. 총 용량 333리터. 작아 보이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둘이서 쓴다.
ⓒ 박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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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로부터 받은 음식들이 냉장고를 점령하고 있다면 사실 즐거움보다 고민이 크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명절 전에 장을 봐 놓은 재료들이었다. 당장 해 먹지 않으면 며칠 내로 상해서 버려질 게 뻔했다. 그게 아까워 새 요리를 만들면 반대로 양가 부모님들이 보내준 음식들이 남겨질 터였다. 이렇든 저렇든 낭비였다.

오해는 마시길. 두 집안의 손맛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까. 특히 아파트 옥상 텃밭의 농장주이자 다년간의 전업주부 생활로 갈고 닦은 장인어른의 케일 장아찌는 먹는 순간 박수가 나올 정도다. 다만 '빨리 먹지 않으면 상하고 말 거야'라는 마음으로 이 음식들을 해치우고 싶진 않았다. 다 먹지 못해 버려지는 건 더 슬프고.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 그렇다고 "저희, 반찬 이렇게까지는 필요 없어요"라고 어떻게 입을 뗀단 말인가! 우물쭈물하던 내가 답답했는지 결국 아내가 칼을 빼들었다. 이번만큼은 처가에서 최소한의 반찬만 받아오겠다는 것이었다.

눈에서 결연함이 읽혔다. 그녀가 내 표정을 읽었는지 먼저 얘기를 꺼냈다. "오빠는 가만히 있어, 내가 알아서 할게." 바로 수긍했다. 그래, 이런 문제는 각자 해결하는 게 좋지. 그 자리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의 작전은 다음과 같았다. 최대한 굶고 가서 주는 대로 다 먹어 없앤다. 그다음 용돈을 드린다. 한참 두 분의 기분이 좋을 때 조심스럽게 반찬 얘기를 꺼낸다. 아직 보내준 반찬이 좀 남아 있어서 많이 받아봐야 냉장고에 공간이 없다면서 출구를 봉쇄한다.

결과적으로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그날 우리는 호두 한 봉지와 LA갈비 한 통만을 얻어오는 데 성공했다. 엄마가 LA갈비 4kg를 재워 놓은 상황이었지만 이건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각자 집은 각자 알아서. 이 불개입주의야말로 부부싸움이 크게 번지지 않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므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둘이서 이번 명절은 나름 선방했다며 협상의 성공을 자평했다. 열흘 내내 한우에 이어 LA갈비를 먹어야 하는 강제적 호사를 누려야 하는 건 피할 수 없게 됐지만.

부모님들, 저희 매일 잘 먹고 있습니다
 
적극적인 애교와 협상의 결과, 딱 이 만큼의 갈비만 받아왔다. 남은 갈비는 아내와 힘을 합쳐 처가에서 상당 부분 먹어 치웠다.
 적극적인 애교와 협상의 결과, 딱 이 만큼의 갈비만 받아왔다. 남은 갈비는 아내와 힘을 합쳐 처가에서 상당 부분 먹어 치웠다.
ⓒ 박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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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얻은 깨달음은 다음과 같다. 명절 일주일 전부터는 절대 장을 봐서는 안 된다는 것. 혹시나 필요 이상의 반찬을 받았을 때 이를 대량으로 소비할 수 있는 요리법과 인맥을 확보해 놓아야 한다는 것(명절 시즌만큼은 직장 동료들끼리 남은 반찬을 소진하기 위한 도시락 테스크포스(TF)를 꾸리는 것도 괜찮겠다).

그럼에도 냉동은 최대한 지양할 것. 그것은 결국 채무유예에 불과할 뿐이니까(솔직해지자. 우리는 정말 냉동실의 식재료들을 적재적소에 꺼내 먹고 있는가).

사실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부모님으로부터 적당한 양의 음식만 받아오는 것이다. 여기에는 처세술, 설득력,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의 임기응변, 두 사회의 갈등을 최소화하는 조율 능력이 필수적이다. 어쩌면 사위와 며느리 역할의 총합,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정말 쉽지 않은 얘기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혼자 사는 게 아닌 이상 문제는 늘 생기기 마련이고, 이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무난하게 이 일을 해결하는 것뿐(웃음과 애교, 그리고 선물과 용돈이 꼭 필요한 이유다).

이 글을 읽고 계신 50, 60대분들은 이런 글 자체가 조금 섭섭할지도 모르겠다. 부모님들의 걱정, 우리 역시 모르는 바는 아니다. 내 새끼들 따로 나가 사는데 밥이나 제대로 챙겨 먹고 사는지, 걱정되는 그 마음 말이다. 자신이 정성 들여 만든 음식을 건네주는 일이야말로 최대의 애정표현이라는 것도.

그럼에도 당신들의 사랑에 비해 우리의 위장은 늘 한정돼 있다는 것도 좀 알아주셨으면. 어머니 아버지. 저희, 생각보다 잘 먹고 있는 걸요. 걱정 마세요. 사실 너무 먹어서 걱정입니다. 이 뱃살을 보시라고요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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