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일본은 근현대사를 거치며 두 차례의 거대한 패전을 겪었다. 하나는 2차 세계대전이고 또 하나는 버블경제로 인한 장기불황을 의미하는 '잃어버린 20년'이다. 강대국으로의 도약을 꿈꿨던 일본은 국제무대에서 군사와 경제 전쟁에 걸친 두 번의 크나큰 패배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회적으로 후유증을 겪고 있다. 이웃나라이자 역사-문화적으로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으로서도 일본의 실패를 통하여 교훈을 얻어야 할 대목이다.
 
9월 6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잃어버린 20년! 일본을 붕괴시킨 버블경제'라는 주제로 일본의 전례 없는 초호황기 뒤에 찾아온 경제적 암흑기에 대해 조명했다. 대표적인 일본통이자 경제전문가로 꼽히는 박상준 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가 강연을 맡았다.
 
일본은 현재 미국과 중국 다음으로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꼽힌다. 이러한 일본이 무너질 뻔했던 위기의 시기가 있었다. 바로 '버블경제' 시대다. 그런데 일본인들에게는 가장 뼈아픈 기억인 동시에 가장 돌아가고 싶은 시기로 꼽히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1980년대 후반은 일본 역사상 최대의 경제적 호황기로 꼽힌다. 당시 일본의 1인당 GDP는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을 능가할 정도였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이른바 버블경제의 붕괴로 인하여 일본 경제가 침체기로 접어들고 기업들이 줄도산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일본의 혹독한 경제 침체기를 의미하는 용어가 바로 '잃어버린 20년'이다.
 
일본에게 새로운 기회가 된 '냉전 시대'

2차대전에서 패망하며 암울했던 일본에게 '냉전 시대'의 시작은 새로운 기회가 됐다. 일본을 점령했던 미국은 아시아 지역에 공산주의가 확대되지 못하도록 일본을 자유주의 체제의 일원으로 만들기 위하여 대일정책의 기조를 바꿨다. 일본의 재건을 막는다는 방침에서 오히려 일본 경제의 부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방침으로 선회한 것.

1950년 한국전쟁이 일본의 산업과 경제를 살렸다면,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일본이 국제사회에 다시 복귀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일본은 미국의 후원을 바탕으로 국가 안보에 쏟을 돈을 줄이고 경제 발전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또한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하며 높은 기술력 향상과 수출이익을 만들어냈다.
 
일본은 1964년 세계 최초로 시속 200km의 초고속열차 신칸센 개통, 아시아 최초의 올림픽 개최 등으로 신흥 경제강국 일본의 부활을 전세계에 알렸다. 1965년 일본의 수출액은 불과 5년 전에 비하여 2배 이상 늘었다. 1968년에 이르면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기에 이른다.
 
일본의 급격한 성장과 부활은, 이른바 '안보와 경제를 맞바꿨다'던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미묘한 변화를 불러온다.1970년대 미국에서 그려진 만평에는 미국의 국기인 성조기에 '메이드 인 재팬(Made in Japan)'이라는 라벨이 붙여진 그림을 통하여 일본 제품이 미국 시장을 잠식하는 상황을 풍자하고 있다.
 
20세기 이후 약 70여 년간 세계의 경제패권을 유지했던 미국은 일본의 위협적인 기술력과 전자제품들을 보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일본은 미국에서 도입한 반도체 기술을 활용하여 세계 최초로 휴대용 TV와 워크맨(카세트테이프 리코더 겸 플레이어)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1970년대 오일쇼크 당시에는 연비가 우수한 소형차를 대거 생산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모으기도 했다.

일본은 1980년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자동차 생산국으로 등극하기도 했다.
소니, 도요타 등 당시의 일본 유명 거대 기업들은 트렌드를 선도하며 미국을 비롯한 세계시장을 장악했다. 미국인들에게 일본제품이 없는 집이 없다고 할 만큼 메이드 인 재팬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일본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미국 사회의 적대감은 커져갔다. 1986년 로널드 레이건 미국 행정부는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경제 선진국들이 모여서 제정한 '플라자 합의', 2년 뒤에는 프랑스에서 다시 '루브르 합의'를 통하여 일본에 무역불균형 시정과 금리인하를 요구하며 이를 관철시켰다.

일본은 보복관세와 미일안전보장조약 카드를 가지고 있던 미국의 압박으로 인하여 자신들에게 불리한 합의들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이로 인하여 무역적자가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일본도 이미 미국 시장에서 높은 점유율을 기록중이던 입지에는 당장 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금리 인하의 효과로 덩달아 유례없는 경제호황을 누리며 상호 윈윈이 되는 듯했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하지만 일본인들에게 이 호황이 바로 '잃어버린 20년'의 시작이 되리라고 예상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버블경제(1986~1991) 기간 당시 일본은 부동산과 주가가 크게 부풀려지며 이른바 경제 거품에 휩싸였다. 규모가 커진 기업들은 인재들을 확보하기 위하여 각종 특급 대우와 복지를 보장하며 사활을 걸었다. 일자리가 크게 늘어나면서 오죽하면 구직자가 일자리의 숫자를 따라가지 못하는 웃픈 상황에 이르기도 했다.
 
낮은 금리로 인한 인수 내수시장확대는 오래가지 않아 독으로 드러났다. 부동산 투기가 범람하며 수도인 도쿄의 토지가격 상승률은 1984년부터 1990년까지 약 6년 만에 3배로 뛰어올랐다. 은행들은 자신들의 실적을 위하여 담보를 과대평가하여 원금보다 초과대출을 해주는 방식으로 투기를 조장하는 데 동참했다. 돈이 없는 서민들은 설 자리를 잃고 점점 외곽으로 밀려났다.
 
당시의 일본인은 이런 위기의 경제적인 징조들을 버블 현상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금리 인하 정책이 기업의 기술투자로 인한 경제발전 정책으로 이어질 것을 기대했다. 일본인들의 부동산 투기 열풍은 자국이 아닌 해외로까지 이어지며 뉴욕의 액손빌딩, 록펠러 센터, 컬럼비아 영화사 등이 일본 기업들에 잇달아 매입된 것은 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여기에 주식열풍도 더해졌다. 일본의 주식투자 상황을 분석하는 '닛케이지수'에서 1980년까지 6천 엔이있던 것이 1989년에는 3만 8천 엔까지 급상승했다. 일본인들은 너나할 것없이 주식에 빠졌고 1990년대 일본 도쿄증권거래소에서 상장사 거래총액 합계는 미국을 누르고 세계 1위에 올랐다.
 
버블시기에 발생한 '버블 레이디' 사건은, 지금도 일본 버블 경제의 부작용과 붕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회자된다 오노우에 누이라는 마담이 자신이 운영하는 고급 술집을 담보로 무려 30조 원에 이르는 거액을 대출한 고액 부채 사건이다. 기업, 야쿠자, 일반 국민에 이르기까지 수입이 많아지며 씀씀이도 커진 당시 일본인들은 돈을 지르는 데 맛을 들이며 향락과 퇴폐적인 '플렉스' 문화에 빠졌다. 
 
끝없는 욕망의 대가는 결국 버블의 붕괴로 인한 일본경제의 추락이었다. 1990년 당시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주가 상승을 이구동성으로 예상했지만, 정작 주식 매도자들의 증가로 주가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본 은행들은 주가를 6%까지 올려 대출규제를 강화했다. 높아진 금리로 인하여 사람들은 대출상환을 서두르기 시작했고, 돈을 구하기 위하여 부동산 매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주택 가격은 하락했다.
 
하지만 부동산과 주식을 다 팔아도 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상환이 어려운 부실채권이 증가했다. 1993년 집계로 일본의 부실채권 규모는 약 13조 엔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잃어버린 20년'이 시작되면서 사실상 버블을 부추긴 은행들은 증오와 원망의 대상이 됐고, 1992~1994년 사이에서만 은행직원들을 향한 보복성 증오범죄가 19건이나 발생했다. 그중 40%는 야쿠자와 관련된 기업에 대출한 사례였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20년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버블경제의 분위기로 불황 시대에 접어든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일본에서는 저렴한 가격의 생활잡화점인 100엔 숍이나 유니클로 매장이 높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수렁에 빠진 일본 정부와 은행은 한때 6%까지 올렸던 금리를 3년 만에 1.75%까지 내렸다. 이때만 해도 일본 사회와 정부, 외국인들도 일시적인 경기후퇴로만 여겼을뿐 20년이나 지속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1995년 1월 17일, 고베에서 벌어진 한신-아와지 대지진은 일본 사회는 물론이고 경제에서도 엄청난 파장을 미친 사건으로 꼽힌다. 진도 7.3 규모의 대지진으로 사망자 6434명, 부상자 4만 3792명이 발생했고 재산피해는 10조 원에 이른다. 2차대전 이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큰 피해를 입힌 지진 중 하나로 꼽힌다. 일본 수출과 무역의 중심도시이던 고베의 항만시설은 지진으로 대부분 파괴됐고 막대한 부채까지 떠안게 됐다. 고베 대지진의 여파로 약 3년간 394개에 이르는 일본 기업이 도산했다.

여기에 지진 피해 복구를 위한 미국의 지원으로 달러가 유입되며 엔화 가치는 급상승했다. 일시적인 엔고 현상으로 일본내 기업들의 수출은 더욱 어려워졌다. 일본 은행은 고심 끝에 금리를 0.5%까지 낮췄지만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고베 대지진 이후 불과 2년 뒤에는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IMF)가 도래했다.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가 금융위기의 공포와 그 후폭풍에 휩싸였다. 야마이치 증권, 산요 증권, 홋카이도 타쿠쇼쿠 은행,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일본의 거대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잇달아 폐업과 도산을 피하지 못했다.
 
1998~1999년 외환위기 당시 불과 2년 만에 일본에서 도산한 금융 기업은 89개에 이르렀고, 1990년부터 2000년까지 범위를 넓히면 10년간 142개가 문을 닫았다. 경제위기가 절정에 달했던 1998년에 일본에서 도산한 기업은 총 1만 9171개, 개인파산 건수도 10만여 건의 전년도 1.5배나 급증했다.
 
또한 부동산·주식 폭락의 여파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일본인의 숫자는 1997년 2만4천 명에서 2년 만인 1999년에 3만 3천 명까지 늘어났다. 2003년에 이르면 일본내 자살률은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당시 일본의 전철마다 선로에 뛰어든 자살자들의 시도로 운행이 중단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고. 혼란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10대들을 중심으로 최신형 휴대전화, 명품가방들을 구매하기 위하여 이른바 '원조교제'로 불리우는 청소년 성매매가 사회적 문제로 부상하기도 했다. 
 
계속되는 일본의 경기침체는 새로운 문제들을 만들어냈다. 물가하락으로 인한 투자 감소로 기업들의 경쟁력이 약화됐다. 반면 일본 경제가 침체기에 빠진 1990년대 미국은 IT산업이 급성장했고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아마존 등의 기업이 두각을 나타냈다. 한때 미국시장을 강타했던 일본 기업들의 빈 자리를 파고든 것은 삼성과 LG같은 한국 기업들이었다.
 
설상가상 외환위기가 터질 무렵 발생하기 시작한 청년층의 인구감소는 곧 소비인구의 감소로 이어지며 더 줄어든 내수시장 약화는 저성장 저물가의 디플레이션 시대를 초래했다.
 
일본의 87~89대 총리인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이러한 일본의 만성 디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개혁 정책을 시도했다. '우정 민영화'로 대표되는 공기업 민영화 정책으로 자율적인 성장체제를 도입했다. 정부에서 부실채권에 대한 직접적인 관리감독을 실시고, 빚을 갚지 못 하는 기업에게는 대출규제를 강화했다.
 
2001년 일본은 세계 최초로 '양적완화(중앙은행이 시중에 돈을 직접 공급하여 시장 경기를 활성화하는 통화 정책)'를 실시하기도 했다. 엔화 가치의 하락을 유도하여 해외시장에서 수출 경쟁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한 의도였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 리만 브라더스 사태를 기점으로 전 세계를 강타한 미국발 금융위기는 간신히 회복되어가던 일본 경제를 다시 뒤흔들었다. 당시 미국, 영국과 유럽 등에서 일본을 벤치마킹한 양적완화 정책을 따라하며 상대적으로 다시 상승한 엔화가치로 인하여 일본기업들은 수출 감소로 큰 타격을 받았고, 도요타는 전 세계적인 자동차 리콜 사태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금융위기가 발생한 2008년은 일본 경제에 있어서 제2의 암흑기로 꼽힌다.
 
2011년에는 일본 지진 관측 역사상 가장 거대한 지진으로 기록된 동일본 대지진과 그 여파로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발생한다. 이 사건은 일본사회에 큰 충격을 줬을뿐 아니라 일본 정부의 재정상태를 급격히 악화시키는 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은 이해 GDP 기준 국가부채규모 1위라는 불명예의 주인공이 됐다. 실업률 증가-기업도산-소비심리 위축으로 이어진 악순환이 되풀이되면서 일본 경제는 또다시 디플레이션에 빠졌다.
 
이 시기 집권한 아베 신조는 이른바 '아베노믹스'라 불리우는 무제한 양적완화 정책을 추진한다. 아베의 경제정책은 취업률과 영업이익, 물가 상승 등으로 일부는 성공을 거뒀다는 평가다. 하지만 코로나19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한일-중일관계 악화 등 국내외의 불안한 정세로 인하여 일본 경제의 미래 역시 여전히 안갯속이다.
 
일본인들은 '잃어버린 20년'을 통하여 많은 아픔과 교훈을  동시에 얻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청년 인구가 줄어들고, 2012년부터 인구 감소가 시작되면서 일본은 작은 경제적 위기에도 취약한 구조가 만들어졌다. 일본 사회는 문제의 원인과 대책을 분석하기 시작했고, 고용과 임금 안정, 출산율 제고 등에 대하여 많은 학습효과를 얻었다는 평가다.
 
클라이브 S, 루이스는 "과거로 돌아가서 시작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부터 시작하여 미래의 결과를 바꿀 수는 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한국은 일본과 지리-역사-경제적으로 밀접해있고 현재 GDP 대비 가계부채 1위 등 많은 비슷한 고민들을 공유하고 있다. 일본이 겪은 시행착오는 우리에게도 더 나은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좋은 교훈이자 반면교사이기도 하다.
벌거벗은세계사 버블경제 양적완화 잃어버린20년 디플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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